이야기보따리/자료 371

[20221212]1919년 3월 30일 시흥군 군포장 삼일운동 만세시위 기록

2022.12.12/ #역사 #기록 #삼일운동 #군포 #군포장 #만세시위 국사편찬위원회의 삼일운동 데이터베이스를 확인한 결과 1919년 3월 30일 시흥군 남면 당리 군포장 부근 두 군데에서 약 300명과 약 1,000명의 군중이 만세시위를 벌였다. 이는 당시 일본 경찰이 작성해 조선총둑부와 일본 육군성에 보고한 '조선소요사건관계서류' 문건에 기록된 내용이다. 삼일운동 데이터베이스의 [3월 30일 경기 시흥군 남면 당리 군포장 부근 만세시위]제목의 조사 자료에 따르면 3월 30일 水原郡[始興郡 南面] 軍浦場 부근 2개소에서 300 내지 1000명의 군중이 騷擾를 일으켜 水原으로부터 장교 이하 4명을 파견하였다. 부상자 2명 발생했다고기록되어 있다. 이 자료는 조선군참모부에서 작성한 3월 26일~4월 5일..

[20221212]1919년 3월 31일 의왕 고천리 삼일운동 만세시위 기록

2022.12.12/ #역사 #기록 #삼일운동 #의왕 #고천면사무소 #고천파촐소 #만세시위 국사편찬위원회의 삼일운동 데이터베이스를 확인한 결과 1919년 3월 31일 수원군 의왕면에서 약 800명이 면사무소, 고천경찰관주재소 앞에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에 경찰관이 보병과 협력해 바로 해산시켰다. 이는 당시 일본 경찰이 작성해 조선총둑부와 일본 육군성에 보고한 '조선소요사건관계서류' 문건에 기록된 내용이다. 삼일운동 데이터베이스의 [3월 31일 경기 수원군 의왕면에서 만세시위] 제목의 조사 자료에 따르면 3월 30일 경기도 수원군 의왕면 京畿道 水原郡 儀旺面 3개소에서 800명의 군중이 騷擾를 일으켜 경찰관이 보병과 협력해 바로 해산시켰다고 한다. 시위 장소는 古川里 (京畿道 水原郡 儀旺面 ) 古川里 (..

[20221210]1919년 3월 29일 서이면 안양리 삼일운동 만세시위 기록

2022.12.10/ #역사 #기록 #삼일운동 #안양 #안양리 #만세시위 국사편찬위원회의 삼일운동 데이터베이스를 확인한 결과 1919년 3월29일 京畿道 始興郡 西二面 安養里_시흥군 서이면 안양리(현 안양역앞)와 京畿道 始興郡 東面 安養里_시흥군 동면 안양리(현 석수동 삼막골)에서 삼일운동 만세시위가 전개된 사실이 드러났다. 삼일운동 데이터베이스의 [3월 29일 경기 시흥군 서이면 안양리 만세시위] 제목의 조사 자료에 따르면 3월 29일 시흥군 서이면 안양리와 동면 안양리에서 약 300명의 군중이 만세시위를 벌였다고 한다. 이같은 사실은 당시 일본 경찰이 작성해 조선총둑부와 일본 육군성에 보고한 '조선소요사건관계서류' 문건에 기록된 내용이다. 기록을 보면 동면 안양리와 서이면 안양리 2곳에서 진행된 시위..

[20221210]1919년 3월29일 안양 박달리 삼일운동 만세시위 기록

2022.12.10/ #역사 #기록 #삼일운동 #안양 #박달동 #만세시위 국사편찬위원회의 삼일운동 데이터베이스를 확인한 결과 1919년 3월29일 안양 박달동에서도 삼일운동 만세시위가 전개된 사실이 처음으로 밝혀졌다. 삼일운동 데이터베이스의 [3월 29일 경기 시흥군 서면 박달리 만세시위] 제목의 조사 자료에 따르면 3월 29일 시흥군 서면 박달리에서 약 80명이 만세시위를 벌였다고 한다. 이같은 사실은 당시 일본 경찰이 작성해 조선총둑부와 일본 육군성에 보고한 '조선소요사건관계서류' 문건에 기록된 내용이다. '조선소요사건관계서류'는 한국의 독립운동과 관련해 일본 육군성이 발·수신한 문서로서 약 13,000면의 분량이며 7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시기상으로는 1919년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 3월 ..

[20221210]1940년대 안양 시대상을 담은 채만식의 '안양복거기' 전문

소설 『탁류(濁流)』로 유명한 채만식의 수필 ‘안양복거기’에는 1940년대 안양의 모습이 세밀하게 담겨져 있다. 저작권 보호만료로 전문이 공개된 안양복거기를 통해 과거 안양속으로 들어가볼까 한다. 이 ‘안양복거기’ 전문을 소개하는 이유는 그것이 문학작품이어서가 아니라, 당시의 시대상, 특히 안양과 관련된 생활사 연구의 자료적 가치와 더불어 문화 유산가치가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채민식은 1940년에 인천 송도에서 ‘양지말’(현 안양 3동)로 이사를 와 작품활동을 하다가 1946년에 낙향(이리)하여 4년간의 폐결핵 투병생활 끝에 세상을 떠났다. ‘안양복거기’는 그가 새롭게 삶의 터전으로 삼게 된 ‘안양의 인상기’라 할 수 있는데, 아주 긴 편지 형식의 글로 매일신보에 연재한바 있다. ‘P형’에게 보내는 ‘..

[20221121]2021년 안양천 생태모니터링 자료(안양군포의왕환경련)

안양군포의왕환경운동연합에서 2021년 안양천 생태모니터링 보고서 ‘안양천을 걸어요’ 책자와 모바일용 전자책을 발간했습니다. 1990년대 오염된 하천으로 알려진 안양천을 살리려고 1999년에 인근 지자체와 시민단체들이 모여 수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 결과 식물과 곤충, 새, 물고기 등 다양한 생물이 살아갈 수 있는 자연형 하천으로 변화했습니다. 깨끗해진 안양천이 되어 흐른 지 20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안양천은 도시의 녹지공간으로, 생태통로로, 또한 시민들에게는 충분한 휴식처로 훌륭한 역할을 해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각종 시설물의 설치, 하천을 이용하는 많은 사람들, 기후변화에 의한 생물종의 변화가 있어 모니터링의 필요를 느꼈습니다. 그래서 안양군포의왕환경운동연합은 안양천이 흐르는 상류와 중류 그리..

[20221117]안양6동 옛 검역원 정원에 있던 축혼비

안양시 만안구 안양6동 중앙로변에 자리했던 농림축산검역본부. 안양지역민들에게 국립수의과학검역원이란 명칭으로 더 친숙한 곳으로 지금은 안양시 땅이지만 시가 어떤 공간으로 활용할지는 아직 결정되지 않아 빈 공간이다. 이 공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건물의 앞마당 화단에 세워져 있던 축혼비(농림축산검역본부가 김천으로 이전하면서 가져갔다) 부터 이해해야 한다. “열 목숨 얻기 위해 한 목숨 바친 그대 희생 빛내리. 넋이여 고히 잠드소서. 1969년 10월 20일” 인간의 안전한 식생활을 보장하기 위하여 동물을 대상으로 갖가지 실험을 한다. 결국 이 동물들의 생명을 끊는 것으로 끝나는데 이 시설에서 희생된 동물들의 넋을 기리는 비석이 세워져 있고 매년 제사를 지낸다. 꽃 피는 철에는 붉은꽃으로 에워싸이는 화단은 어찌..

[최병렬]기록으로 안양천 톺아보기-PDF파일(2022.11.06)

2022.10.04/ #안양천 #문화도시 #안양문화예재단/ 안양문화예술재단이 안양의 문화도시 사업으로 ‘내가 만들고 가꾸는 PLAY CITY’를 실현하기 위해 마련한 ‘안양천, 요즘 어때요?’ ‘안양천, 요즘 어때요?’는 안양천 유역 생태계와 역사-문화를 함께 알아보고 시민 개개인의 경험을 공유하며 안양천의 놀이 문화 조성을 함께 모색하는 활동으로 총 7회에 걸쳐 ▶안양천의 역사와 문화 ▶수변문화 활성화 사례 공유특강 ▶안양천의 다양한 활동조사 발표 ▶활동 제안 워크숍 등 교육과 라운드 테이블 형식으로 진행했다. 그중 안양천 톺아보기는 안양천의 약사와 문화 등 이해를 돕기위해 지난 10월 4일 실시한 한 강의로 PPT내용을 PDF로 변환한 자료다.

[최승원]1824년 채제공이 쓴 時文 안양교행/安養橋行(20221025)

채제공(蔡濟恭1720-1799)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사도세자의 신원 등 자기 정파의 주장을 충실히 지키면서 정조의 탕평책을 추진한 핵심적 인물이다. 이황(李滉), 정구(鄭逑), 허목(許穆), 이익(李瀷)을 이은 청남(淸南)의 영수로서, 노소론 당쟁의 와중에서 탕평을 표방한 영조와 정조의 신임을 받았다. 특히 사도세자의 보호에 앞장선 것이 인정되어 정조로부터 특별한 대우를 받았다. 오랜 관직 생활을 하는 동안 신해통공, 이조 전랑 통청권(通淸權) 혁파, 수원 성역(城役) 등 개혁 정책을 실행하였다. 안양교행(安養橋行)은 조선 후기의 문신 채제공(蔡濟恭)이 1824년 쓴 시문집인 《번암집》에 실린 글로 정조 임금이 아버지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묘인 현륭원(顯隆園)에 전배할 때 건너기 편리하게 하고자 197..

[최승원]일제강점기 안양시 시회(詩會)자료 관양음사욕란첩(20221024)

안양시 시회(詩會)자료 일제강점기에도 전통적인 의미의 시회(詩會)는 지속되고 있었다. 지역사회에서의 詩會는 일제강점기 전통적인 식자층의 지식인으로서의 위상을 사회를 통해 확인하는 기제가 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전주류씨가 소장자료에는 [관양음사욕란첩冠陽吟社浴蘭帖](6-137, 8-4)이라는 25장으로 된 시집이 남아있다. 이 자료는 일제강점기의 안양의 詩會를 조명할 수 있는 중요 자료로 평가된다. 이 시집은 관양음사(冠陽吟社)에서 펴낸 것이다. 서문은 1925년 단오(端午) 5일전 즉4월30일에 무정(茂亭) 정만조(鄭萬朝:1858~1936)가 지었다. 이왕직(李王職) 전사 (典祀)로 재임하던 정만조는 서문에서 “나 또한 관양인(冠陽人)으로 선묘(先墓)가 있고 병사(丙舍:산소 곁에 지어놓은 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