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지역얘기/담론

[김대규]벽산로 ‘블루스’

안양똑딱이 2016. 6. 30. 14:24
[김대규]벽산로 ‘블루스’

[2005/05/13 시인. 안양시민신문 회장]


 

칼럼 제목이 근래 유행하는 가요나 영화제목같지 않습니까? 이 제목을 읽고 무슨 생각을 하셨는지요? 두 가지를 떠올리셨으리라 생각합니다. 벽산로 노점상 강제철거와 ‘블루스’라는 노래나 춤말입니다.

마침 갈등을 빚던 노점상 강제철거에 따른 후유증이 일단락됐다는 기쁜 소식이 있군요. 다행입니다. 사람이 하는 일,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마음’을 어떻게 먹느냐는 것이겠지요. 필자가 ‘벽산로’에다가 ‘블루스’라는 말을 붙여 쓰고자 하는 것은, 노점상 강제철거 문제가 아니라, 현재의 ‘벽산로’ 일대에 서린 옛추억을 더듬어 보려는 것입니다. ‘블루스(Blues)’라는 말에는 흑인들의 비참한 삶에서 우러난 슬픔의 가락이 배어 있지요. 추억의 회상은 언제나 달콤한 슬픔이지요.

벌써 반 세기가 훨씬 지난 일이지만, 필자가 초등학교에 다닐 무렵, 그러니까 1950년 전후, 현재의 ‘2001아울렛’자리에는 ‘고려석면’이라는 공장이 있었고, ‘벽산로·중앙시장’ 일대는 밤나무가 들어선 넓디 넓은 공터였습니다. 당시 우리들은 그 운동장같은 공터를 ‘신사마당·신사터’라고 불렀는데, 그때는 어려서 잘 몰랐었지만, 훗날 어른들 얘기에 의하면 일제시대 때 그곳에 ‘야스쿠니신사’의 축소판같은 작은 구조물이 있었다는 것이고, 한국인들에게도 참배를 강요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최근에 독도·역사왜곡·신사참배 등의 문제로 한일관계가 사상 최고로 악화됐는데, 우리 안양에도 그러한 역사적 현장이 바로 ‘벽산로’ 일대에 있었다는 사실에 다시 한번 숙연한 마음을 품게 됩니다.

그와 같은 역사적 아픔은 별도로 하고, 필자에게 가장 잊지 못할 추억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그 ‘신사마당’에서 주민 위안행사로 상영한 ‘호동왕자와 낙랑공주’라는 영화를 본 일입니다. 아마도 내 인생에서 최초의 영화감상이 아닐까 합니다. 어린 나이에도 ‘낙랑공주’(조미령)가 자명고(自鳴鼓)를 찢어버리고 죽게 되자, ‘호동왕자’(김동원)가 가슴에 안고 애통해 하는 ‘라스트 신’은 아직도 뇌리에 선명하게 각인돼 있습니다. 여러 날 밤잠을 못 이뤘지요. 아마 ‘사랑’에 대한 감정의 원형적 고민을 하게 된 것 같습니다. 조미령 여사는 그 이후에도 가련한 여인의 모습으로 오랜 동안 나의 소년시절을 지배했습니다.

그 후 ‘신사마당’에는 지금 ‘안양극장’자리에 ‘읍민관’도 있었고, 중앙성당, ‘근로자회관’(현 전진상복지관) 등의 건물들이 들어서면서 옛추억들은 자연히 잊혀지게 되었지요. 그 중 가장 안타까운 변화의 하나는 중앙시장 건너편에 자리했던 ‘항아리골목’이 언제부턴가 그 명목을 잃어버리게 된 일입니다. 흔히 ‘문화의 거리’라고들 일컫지만, 나는 평소 ‘밧데리골목’, ‘항아리골목’처럼 특색화된 ‘명소’가 더 문화적으로 기여한다고 주장해 왔습니다. 도로정비 차원에서 환경미화나 하고, 거기에 ‘문화의 거리’라는 호칭을 붙이는 것은 지극히 형식적인 행정의 소산이지요.

갈수록 옛것에 대한 관심 자체가 사라지는 현실입니다. 같은 뜻이더라도 ‘장내동(牆內洞)’보다는 ‘담안’이, ‘후두미동(後頭尾洞)’보다는 ‘병목안’이 더 친근하고 향토적인 문화성을 지니고 있지 않을까요? 옛추억을 되살려 보너라니 공연히 ‘블루스’같은 슬픈 얘기가 된 것 같습니다.

2005-05-13 18:49: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