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상기(1927년 5월 5일 - 1989년 4월 27일)는 평안남도 성천 출생으로 대한민국의 건축가이자 대학 교수 였으며 1984년 한국건축가협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건축가 나상기는 1944년 평양공립공업학교 건축과를 졸업하고 평양공업대학에 진학하여 정인국(鄭寅國)의 지도 하에 건축 수업을 받고 건축실무에 나섰다.평양공업대학(정인국 사사) 홍익대학교 교수로 재직하였고, 1950년6·25전쟁이 일어나자 남하하여 미 제5공군사령부 시설국에 들어가 건축기사장으로 일하면서 미국식 설계기법과 건축용어를 익혔다. 1956년부터는 한양대학교 홍익대학교의 강사로 있다가 홍익대학교 교수가 되었다.
1961년 미국무성 초청으로 미국에 건너가 이구(李秋)01)의 도움으로 펜실베이니아대학교 미술대학원 건축과에 입학하여 루이스 칸의 지도를 받으며 졸업한 후 계속 그의 건축사무소에서 근무하였다.
그 후 정인국의 권유로 펜실베이니아대학교에 재입학하여 도시계획을 공부하여1969년 도시계획학 석사학위를 받고, 1970년 귀국하여 홍익대학교 도시계획과에 복직하였다.
이 때부터 그의 사회 참여는 활발해져서 건축과 도시계획 등 여러 방면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1973년 부산광역시 용두산공원에 높이120m의 부산타워를 설계하였다.부산을 상징하는 건축물인 부산타워는 경주 불국사 다보탑(佛國寺多寶塔)의 보개(寶蓋)를 본떠서 만들었다.
1959년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 문교부장관상, 1974년과1976년에 한국건축가협회 추천작가상을 받았으며, 1979년 초대작가, 1984년 한국건축가협회회장이 되었다.
서울대공원, 어린이대공원 설계에도 참여하였다. 반월(안신)신도시 기본설계에도 참여하였다. 홍익대학교·아주대학교 및 하와이대학교에 그의 작품이 있다.
자료 발글; 최승원님
국립중앙박물관 평의원
홍익대학교 성균관대학교 건축학과 전겸임교수
김중업건축박물관 안양박물관 운영위원장역입
앙가주망건축사사무소 건축사
안양시 지명위원회 위원
안양 만안구청 만민누리 위원
건축가 나상기교수
평안남도 성천(成川)군 능중(陵中)면 출생(1927~‘89). 성천은 산수가 수려한 고장이다. 면의 동부에 철봉산·광대산(光大山, 704m), 서쪽에 봉화산(烽火山, 498m)·태을덕산(太乙德山, 526m), 남쪽에 각흘산(角屹山, 631m), 북쪽에 사방산이 둘러싸고 있어 산간지대를 이룬다.
성천의 근대 교육기관은 한 말인 1895년 학부(學部)에서 소학교령을 공포한 뒤 이 지역을 근대식 학교 설립 지로 지정해, 평안남도의 다른 군보다 먼저 공립소학교가 설립되었다.
건축가 김중업의 부친은 일제강점기 평양 근교인 평안남도 강동. 중화, 성천成川에서 군수郡守를 지낸다. 김중업은 성천의 모습을 서사시 같이 남기었다. “읍邑 한쪽에 자리 잡고 있는 관사의 넓은 뜰에는 늙은 느티나무며 향나무가 군데군데 서있고, 화단에는 이름 모를 꽃들이 잘 가꾸어져, 봄이면 일제히 피어, 마치 관사는 로렐라이의 화원 花園 속에 묻힌 집 같고 여름이면 그 늙은 느티나무며 향나무의 짙은 녹음 속에서 매미가 한가로이 울어댔다. 그리고 이른 아침이면 얼핏 보기에 이불 두께만 한 몽롱한 여름 안개가 양털을 펼쳐 놓은 듯, 넓은 관사 뜰 위의 군데군데에 떠있던 것을 종종 볼 수가 있었다. 혹은 여름 안개가 자욱이 사방으로 퍼질 때면 온 뜰과, 내려다보이는 읍내의 일각이 하양 바다처럼 보이고, 군대군데 우뚝 솟은 나무들은 흡사 바다의 암초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새들은 재재거리면서 안개를 헤치고 하늘 드높이 밝은 곳까지 올라가 날개를 펼친 채, 햇볕을 쪼이다가는 유리알같이 반작이는 나뭇가지며 젓은 판자 울타리 내려앉기도 하였다”고 살던 집을 서사시같이 기술하였다.
1944년 평양공립공업학교 건축과를 졸업하고 실무중 47‘년 평양에 평양공업대학이 개교하자 진학하여 정인국(鄭寅國)교수의 지도하에 건축 수업을 받고 ’50년 4월에 졸업하고 건축 실무에 나섰다.
일제강점기에는 서울법대 외에 조선에는 4년제 공대가 없었다. 일제는 공대를 먼저 만들려고 하였으나 조선인들이 법대를 먼저 만들어 달라고 하여 법대가 먼저 생겼다.
졸업한 해에 6·25전쟁이 일어나자, 1950년 10월 국군 북진 시 남하하여 미제5 공군사령부 시설국에 들어가 건축기사장으로 53년 4월까지 일하면서 미국식 설계기법과 건축용어와 영어를 익혔다. 이 근무는 생에 기틀이 된다.
미국식 설계 시공 감리 실무에 능통 하자 최고의 직장을 ’53년 5월에 주한 미국대사관 주택국 건축가로 ‘54년 4월까지 근무하였다.
1954년 6월부터 충주비료공장건설 맥우로우.하이드로카본社 MCGrow Hill Hydrocarbon Co. 기사장으로 ’56.4 근무한다. 1961년 충주비료공장의 준공으로 중화학공업 발전의 토대가 마련되었디. 충주비료공장은 1955년 5월13일 미국 건설회사 시공으로 기공했다. 그래서 시공도면을 그리고 감독할 수 있는 고급인력이 필요해서 스카우트 되었다고 본다.
물가상승으로 공사가 지체되고 상공부, FDA, 미국건설업자 간에 협의가 계속 되었다. 건설회사는 대만의 비료공장 시찰을 권하여 김일환장관은, 57년 3월 한미양국의 기술자 4~5명을 데리고 시찰하여 많은 참고가 되었다. (상공부장관-김일환 회고록) 나상기는 건설 기초를 마련해주고 ‘56년 4월까지 근무하였다.
한양대학교 공과대학 건축공학과 강사(’56.4~‘58.3)를 한다.
’56년 5월 개강 후 1개월이 지난 후 급히 홍익미술대학 미술학부 건축미술과에 조교수가 되어 미술계 교수와 잘 어울리며 ’62년 11월까지 6년을 근무하였다.
‘58년에는 인천박문여고 강당(W45,000) 인천고려극장(W65,000)설계를 한다..조각가 윤효중교수가 정부에 건의하여 국전에 건축파트가 만들어 진다.
‘59.10 대한민국 미슬전람회 건축부분 특선으로 문교부장관상을 수상 하였다.
‘60년에는 서울성북동에 정병택씨 저택을 W12,000 설계 하였다.
이화여자대학 생활미술과에서 강의(61.3~62.11) 하였다. 당시 홍익대 교수들은 이대에 강의하는 사례가 많았다.
1960년 8월에는 국제미술협회 제3차 총회(필립핀 마닐나) 한국대표로 참석였다.
’61년 34세 시 미국무성 초청으로 미국에 건너가 연수 및 시찰후 귀국시 유럽 동남아를 돌아보고 들어 왔다.
국제미술교류협회 제4차 총회 한국대표로 참석하였다. (카나다 몬트리올‘63)
이구(李玖: 英王 李垠의 아들 MIT졸업(1931~2005)의 도움으로 펜실베이니아대학교 미술대학원 건축과에 입학하여 루이스 칸의 지도를 받으며 ’64년 5월 졸업한 후 ‘65년 5월까지 계속 그의 건축사무소에서 연구하였다.
“루이스 칸은 건축의 본질적인 문제에 대한 집착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건축물을 구성하는 요소들의 기하학적인 형태, 공간, 빛 등을 연구하며, 이들을 조합하여 기하학적인 구성으로 새로운 공간을 창출하는 것을 지향했습니다. 그 결과 그가 디자인한 건축물들은 강력한 기하학적인 형태와 조명의 사용, 그리고 자연과의 조화가 특징입니다. 따라서 루이스 칸은 건축의 본질적인 문제에 집중하며, 건축물에 대한 철학적인 고찰을 하였다.”[chat gpt-5]
1965.5~’68.1 미국 필라델피아 EPS. B 건축도시연구소에서 건축 및 도시계획연구를 하였다. ‘68.1에는 미국 펜실베니아 대학교로부터 엘톤 및 동대학원 장학금을 받았다.
‘68년 10월에는 미국 건축학회, ’69.8 미국 도시계획학회 회원이 되었다.
그 후 정인국의 권유로 펜실베이니아대학교에 재입학하여 도시계획을 공부하여 1969년 5월 도시계획학 석사학위를 받고, ‘70년 4월 귀국하여 홍익대학교 도시계획과에 복직하였다.
나상기교수는 미국 내에 남긴 건축작품- 필라델피아 9건, 펜실베니아 6건, 뉴저지3건, 벌티모어시 2건, 매닐랜드 2건, 합 23건이다.(파트너 포함추정)
1970~’76.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강사
‘71~‘73 연세대학교 행정대학원 및 성균관대학교 경영행정대학원 강사를 역임하였다.
1970년대가 황금기로 그의 사회 참여는 활발해져서 건축과 도시계획 등 여러 방면에서 두각을 나타내었다. 1970~‘73 홍익대학 건축 도시계획연구원으로 개편. 원장과 교수로 나상기가 활동 하였다. ’73년 부산광역시 용두산공원에 높이 120m의 부산타워를 설계하였다. 부산을 상징하는 건축물인 부산타워는 경주 불국사 다보탑(佛國寺多寶塔)의 보개(寶蓋)를 본떠서 만들었다. 진로가(장회장)소유주 이다.(오인욱교수댓글)
‘71.12.25 대연각호텔에서 불이나자 나상기교수는 현장에 나와 TV생중계 방송에서 비상계단 내장재등을 설명하였다.
1972.3 미국 동서 문화연구소 도시주거 자문위원회의(於방콕)
’72.8 아세아지역 주택 및 계획기구 제4차 총회 한국대표(於서울)
‘73년 서울시민회관 신축현상설계 준우수상
’73 삼승아파트먼트 서울 금천구 독산동
1973년7월1일 안양읍이 시로 승격하자 안양시청을 Y형으로 포용적 디자일을 하였다. 당시 시장은 장용순으로 도시개발에 박차를 가하는 시기였다.
부산시 구덕종합운동장을 설계 완공하여 우수한 시설로 인정되어 성남공설운동장설계자 (조명호 최승원)가 답사하는 사례가 있다.
안산시(반월)도시계획을 하였으며 공업도시+예술도시로 예술인아파트를 건설하여 사당동 예술인마을 거주 예술가들을 많이 이주시키고 본인도 은퇴 후 거주할려고 하였다. 도시 건설시 안산시 건축심의위원으로 봉사 하였다.
1974년 제23회 대한민국 미술전람회 건축부분 추첨작가상
‘74 UN군 참전기념탑
MONUMENT FOR UN’ FORCES PARTICIAPTE LN THE KOREAN WAR
대지/Site : 부산시/Busan/1,220M2 높이 ; 13M
설계노트/Design : 3교차도로의 로타리 중앙록지상에 참전16개국을 상징하는 16개의 주 지구의로 구성되어 있으며 탑신은 철근콘크리트 지구의 및 다른 조각은 브론즈/16pilars is symbolic of the 16nations of United Nations, had Participated in the Korean war. Bronze globe and 16 statues of soldier had been Sculpture by professor KIM, CHAN SIK
UN군 참전기념탑은 부산 남구 대연동 부산박물관 앞 UN 로터리에 위치한 조형물입니다. 참전국을 의미하는 하얀 조형물이 세계 평화를 상징하는 지구를 떠받치고 있어 의미 있는 상징물 입니다. 이 기념탑은 ‘75년 17대 박영수 부산시장 재임기에 UN창설 30주년을 기념해 건립한 기념탑입니다
1976 제25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 건축부 추천작가상을 수상하고,
미국에서 아파트 설계 경험을 살려 1973년경 독산동 삼승맨션을 설계하였다. 난방이 중앙공급이었으나 건설중 부도후 현관 입구 광에 단독 보리라실을 만들었다. ‘76년 봄에 필자는 여기서 전세로 신혼살림을 시작하였다.
’75.5 국제건축가연맹 제12차 총회 및 13차 대회 한국대표(於베니스 및 마드리드)
1976 서울대공원 기본계획 SEOUL GRAND PARK BASIC PLAN 경기도 과천
‘77. 반월 신공업 도시계획 및 도시설계
1979~’84 홍익대학교 부설 환경개발연구원으로 개편. 원장 교수 나상기가 활동한다
‘80.6 국제건축가 연맹 제14차총회 및 15차 대회 한국 수석대표(於바르샤와)
’80. 반월 신공업 도시 BAN WEOL NEW INDUSTRIAL TOWN
‘84년에는 안양본백화점 문화홀에서 열린 최승원건축전에 와서 한양대 김진일교수 석주선박사 신영순 조명호건축사와 같이 테이프 커팅을 하였다.
자택은 서울 평창동 동측 끝단 경사지에 손수 설계하여 벽돌조적 콘크리트스래브 2층으로 건축하였다. 대지 828m2 2채용으로 사서 1/2을 팔아 자택을 짖었다고 한다. 규모로 보아 경제적으로 다소 무리했다고 본다.
설계노트/Design Note 는 경사진 대지의 이점을 살리기 위하여 주 접근 층을 상층에 두고, 주거실 층을 하부에 두었다 주변의 오픈스페이스와 아름다운 자연조건에의 부합이 디자인의 제일 관건이 됨
사회활동도 열심히 하여 서울지역 로타리클럽 회원으로 참여하면서 남안양로타리클럽에 초대되어 스피치도 하였다.
김중업 김수근(청진) 나상기 모두 이북출신이다. 이분들이 남한의 건축을 일으킨 건축가이다.
정인국 스승처럼 정년퇴직 전에 병으로 사망하니, 작품이 남아서 그를 생각하며 글을 올린다
한편, 1959년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 문교부장관상, ’74년과 ‘76년에 한국건축가협회 추천 작가상을 받았으며, ’79년 초대작가, 1984년 한국건축가협회회장이 되었다. 홍익대학교 문헌관 ·아주대학교 교회 및 하와이대학교에 그의 작품이 있다.
페친들이 찿아 준 아들 나관섭은 홍익대학교 건축과 졸업후 엄이건축연구소에서 근무하였다. 엄덕문은 홍익미대에 건축과를 만들고 강의 한 바 있다.
나상기교수는 여러번 엄이건축을 방문하였다고 페친(캐나다거주 안상범건축가)이 밝히고 있다. 당시 일반적으로 해외공사도면을 제작시 정기적으로 영문도면을 첵크해 주는 사례도 있었다.
연락이 되지 않는 상태이다. 사모님과 따님은 안양8동 570-7 필자의 집을 방문후 선물로 수저 한벌을 주시고 식사후 귀가 하였다. 어린 따님은 작업실 겸용 우리집을 이상히 보았다. 얼마후 가족이 있는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미국내 주소를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