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지역얘기/사람

[20230128]42세때 국회의원에 당선 3선을 역임한 윤국노의원

안양똑딱이 2023. 1. 28. 12:17

윤국노(尹國老) (1936∼1986)
정치인. 본관은 해평. 호는 도암. 일제강점기 당시 경기도 평의원을 지낸 윤경섭과 어머니 김복성 사이에서 5형제 중 4남으로, 안양시 안양동 634에서 출생했다.
큰형 학노는 전 국회의장 이재형(작고)과 군포초등학교 동기동창으로 광복전에는 평양지법 판사. 광복후에는 대구.;대전.서울지법 부장판사를 역임한 원로법조인으로, 이승만 대통령의 법관 연임을 거부한 유일한 율사로 기록돼 있다.
양조업을 하는 부친 덕분으로 비교적 유복하게 자라 어려서부터 쌀을 몰래 빼어다 어려운 이웃을 돕기도 하고, 주말이면 안양2동에 있는 안양기독보육원을 찾아 원생들과 하루해를 보내기도 했다. 훗날 JC(청년회의소)와 국회의원으로 있을 때 「나」보다도 「우리」라는 인식을 중시했고, 바로 그런 즐거움을 생활화하면서부터 봉사하는 정신이 싹텄다고 주위 사람들은 이야기하고 있다.
1949년 안양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이어 안양중학교, 양정고등학교를 거쳐 경희대학교 경제학과를 나온 후 한때 강원산업에서 세일즈맨 생활을 하기도 했다. 그 뒤 서울 방산시장에서 「협동비닐상사」라는 자그마한 회사를 운영하다가 군포에 내려와서 비닐 생산업체인 협동화학이라는 유수의 업체로 키웠다. 세일즈맨을 하고 자립을 해서 회사를 설립한데는 그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정치에 눈을 뜨면서 갖게 된 두 가지 철학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서였다. 첫째는 「매사를 바라보듯 하라」는 심성의 문제이므로 의지력 하나만으로 충분히 가능한 것이었으나, 다른 또 하나의 숙제인 「수신제가」는 자신의 경제력 없이는 불가능하므로 가난에 쫓기다보면 금전적 유혹을 뿌리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1969년부터는 JC와 인연을 맺어 그해 서울JC에 가입한 후 1972년 서울 JC회장, 1974년 한국JC상임부회장, 1975년 한국JC중앙회장을 역임하였다.
정치에 관심을 가진 것은 양정고등학교 재학 때부터였다. 안양의 집이 당시 국회의원에 출마한 이재형의 안양지역 선거대책본부였는데, 여기서 팜플렛을 돌리고 합동유세장에 따라나가 잔심부름을 하는 등 선거와 정치에 대한 견문을 넓혔다. 이러한 연고로 결혼식 때에는 이재형이 주례를 섰고, 대학졸업 후에는 결국 이재형의 충실한 정치참모로 일관했다.
10대 소년시절부터 정치를 꿈꿔오다가 드디어 1978년 12월 12일 제10대 국회의원 선거 때 그 기회를 포착했다. 당시 시흥,안양,광명,옹진,부천지역의 성주는 오학진이었다. 오학진은 혁명주체이며 공화당 4선에 정무위원을 겸하고 있는 집권당의 실력자였다. 이를 따돌리고 민주공화당에 공천을 받자 중앙정가에 이름이 알려졌고, 결국에는 8만1천161표로 당선되었고, 이후 1981년 3월 25일 시행된 제11대와, 1985년 2월 12일 시행된 제12대 선거에서도 내리 승리를 거뒀다. 11대 때는 민정당의 원내 수석부총무로 있으면서 대야 교섭 창구역할을 수준 이상으로 해냈고, 12대 때는 상공위원장 후보로 나서 230표의 최다득표자가 됐다. 말수가 적고, 조용하고, 술을 전혀 입에 안대는 사례 등은 적어도 또 다른 대인관계에선 옥의 티로도 지적되기도 했지만, 자기 과시나 자랑을 싫어하는 선비형의 정치가일 뿐만 아니라, 한번 손을 대면 무엇이든 끝을 보고야 마는 적극성과 끈기가 있다. 만년에는 불우한 학생들을 위해 「애향장학회」란 명칭 아래 기금 조성을 하던 중 1986년 12월 9일 14시 5분 이화여대 부속병원에서 부인(문화자. 1937년생. 서울 종로구 창성동 출신)과 딸(윤현경. 1962년생)을 남겨둔 채 한창 일할 51세의 아까운 나이로 타계했다. 그가 타계하자 안양의 미래를 위해 일할 정치인 한명이 일찍 사라졌다며 안타까워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의 묘는 의왕시 청계동 청계산 아래에 있고, 묘 앞에는 그의 고향 후배인 시인 김대규가 짓고, 석천 이경희가 쓴 시비가 있다. 그의 정치 수제자격으로는 1987년 설립된 (재단법인) 도암 윤국노 장학회를 이끌고 있는 노충호 이사장(전 경기도위원)이 있다. 그는 윤국노 의원 비서관을 지냈으며 경기도의회 4.6대 도의원을 역임했다.

 

윤국노 묘비글(지금은 고인이 된 고 김대규 시인이 글을 썼다)

사람,아 참사람
그날,1986년 12월9일 이땅의 별하나
스스로의 빛 다하지 못한채
어둠 저편으로 사라졌나니
젊음에 뿌린 봉사의 씨앗으로
인생의 의미를 꽃피운 사람
부름 있는 곳엔 언제나 달려 갔으나
이제는 아무리 크게 불러도
우리 곁으로 돌아올 수 없는 사람
그러나,우리 모두의 가슴속 깊이
영원히 살아 있는 당신
사람은 떠나도 남긴 뜻은 빛나는 자
어둔 곳 먼저 찿아 밝은 등불 달아 주고
아픈 마음 쓰린 가슴 어루만져 달래주며
나라일 살핌에 몸 낮춰 사람 우러렀나니
불의의 손길이 아니면 누구와도 나누었던
그 덕성의 어진 악수!
선량이 아니라 그저 한 인간으로
귀한 존재가 아니라 그저 한 착한 사람으로
영광은 조국에,영예는 모두에게 안기고
내가 아니라 우리를 위해
이름이 아니라 실질을 위해
자신을 버림이 겹겹이 쌓여
드디어는 당신의 한 신명
그대로 이땅에 바치었거니
어느 먼 훗날
당신의 뜻 이어갈 참사람 있을진대
그로하여금 노래하게 하리라
1986년 12월9일 그날 오후 2시20분
스스로의 빛 다하지 못한채
이땅에서 사라진 별하나
여기 고요히 잠들어 있노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