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국적으로 유명했던 신영순 병원장과 국회의원을 지냈던 신영순(申英順.1936-2019)씨는 1936년 황해도 신천에서 출생해 인천여고와 1961년 수도의과대학(고려대 의대 전신)을 졸업했으며, 가톨릭의과대학교 대학원(의학박사,1984)을 나왔다.
그녀는 1965년 신영순병원장, 1986년 경기도여성단체협의회장과 1993년 6월1일 제17대 한국여자의사회장, 고대의대 교우회장, 1994년 대한의사협회 부회장, 1995년 사단법인 베트님한인 2세와 하께 가는모임 공동대표, 1988년에는 당시 여당이던 민정당 전국구 비례의원으로 제13대 국회에 진출해 정치에 입문하기도 하는 등 여장부다운 면모를 과시했었다.
1992년 4년의 임기를 끝낸 신영순은 의사이자 활동가로 돌아와 1996년 12월 안양8동에 모자보건 전문병원을 오픈한다. 비둘기가 알을 품고있는 디자인으로 건축부분 상을 받을 정도의 아름다운 건물이었던 신병원은 안타깝게도 1997년 IMF 직격탄을 맞으면서 무리한 확장의 후유증으로 개원 44년만인 2003년 폐업함에 따라 병원을 잃고만다.
신병원 문을 닫은 신영순은 안양을 떠난다. 그녀는 울산 보람병원장으로 잠시 근무하다가 2009년 9월 전남 강진으로 내려가 마량에서 우리의원을 개원(강진신문 2009.09.18)하고 인근 주민들을 위해 진료에 나서는 등 인생 마지막 순간까지 의사로 일했으나 지병으로 2019년 3월17일 향년 83세를 일기로 별세한후 에덴낙원에 자연장으로 묻혔다. 유족으로는 섬유공예 예술가로 활동해온 동생 신영옥이 있다.
44년을 의료인으로 살았던 그녀는 한 언론(경행신문 1996.08.12)과의 인터뷰에서 '사후에 봉사를 소명으로 알고 여성의 권익 향상에 발벗고 나섰던 사람이자 모자보건에 온정열을 쏟았던 여의사'로 기억되면 좋겠다고 말한적이 있다.
한편 현재 안양6동에 거주하는 동생 신영옥씨는 홍익대학교 미술대학교와 대학원에서 강의를 하였다. 오랜기간 섬유예술가로 활동해 왔으며 2003년 ‘안양을 빛낸 여성상’을 수상한바 있다. 부군은 안양시 지명위원이자 만안구 만문누리위원으로 활동중인 최승원 건축가이다. 그녀의 뛰어난 작품은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 특별전과 필라델피아미술관등에서 전시되었다. 영국의 빅토리아&알버트미술관, 일본의 갤러리 나노리움, 캐나다 한국대사관, 대만시립미술관,필라델피아미술관,국립현대미술관,일민미술관,성곡미술관,홍익대미술관등에도 소장돼 있다.

신영순 (1936-2019)
1936년 황해도 신천군출생
연혁
1961 수도의과대학(고려대학교 의과대학 전신) 졸업
1960 고려대학교 의과대학 총학생회장
1984 가톨릭의과대학교 대학원 박사과정수료(의학박사)
1965-1996 신영순병원 원장
1997-1999 신병원 원장
1979-1988 조산원 수습기관 인정 및 교육기관장
1986 전문의 취득 (마취과 576)
1986-1995 경기도 여성단체협의회 회장
1988-1999 고려대학교 의과대학 외래교수
1988-1992 제13대 국회의원
1993-1996 한국여자의사회 제17대 회장
1994-1996 안양 소년소녀합창단 단장
1995-1999 원자력을 이해하는 여성모임 총재
국제회의 참가
1980 국제불임시술협회 총재 한국대표
1980 세계여자의사회 총회 한국대표
1981 제9차 아세아,오세아니아주 산부인과 학술대회 한국대표
1983 세계 N.R.B.초청 미국방문
1984 미주 의학협회 세미나 한국대표
1990 국제 의사국회위원회 한국대표
상훈
1978 보건사회부장관 표창 (의료보호사업)
1980 보건사회부장관 표창 (가족계획 사업실적 우수)
1987 국민훈장 석류장, 경제분야 (저축장려)
1994 재무부장관 표창 (성시한 납세의무이행)
1996 과학기술처장관 표창 (원자력 안전성 확보와 안전문화 정착에 공헌)
1997 제1회 안양을 빛낸 여성상 (안양시)
1997 경기도 건축문화상 금상 (신병원)
1997 환경문화대상 건축부문 우수상 (신병원,문화관광부)
1998 국제 원자력 여성상 (WIN Award)
저서
1984 “병원경영의 이론과 실제” (세경사)
1990 “여성이 주인이 되는 사회” (삼성출판사)
신영순 원장 여동생인 섬유공에에술가 신영옥 작가 남편 최승원 건축사가 정리한 글
提元 신영순
제원은 4.19 의거시 의대학생회장으로 참가하였으나, 보상금을 신청하지 않았다.
제원은 1935( 을해년 돼지띠 진시 호적나이1936)년 모친의 친정 전라남도 장성군 북일면 0산리 351 태생胎生이다. 1953년 9월8일 법령179조 의하여 호적에 기록하다.
조부는 평산 신씨 신승칠申承七 원적은 황해도 신천군信川郡 산천山川面 한양리漢陽理 454번지이다.
조모 김정순金貞順 은 1901년11월30일 부 김덕균은 김해金海 김씨 이언련李言蓮 사이에 출생하였다.
부친은 신지환申智煥은 1912년6월20일 임자년 쥐띠해 황해도 신천信川군 산천면 용동리 8번지 출생이며, 인천 가본적은 중구 송월동 1가 9번지이다. 1934년12월16일 김판례와 결혼신고 되었다. 1940년7월5일 전 호주 신승칠 사망으로 호주상속 되었다고, 병원신축 감독후 1974년 5월30일 지병으로 사망하였다.
모친 김판례金判禮는 1917년9월16일생으로 장성군 북일면 신성리135번지 호주 노산老山 김씨 김청경金靑慶 모 박월순朴月順 의 자이다.
부친은 안악공립보통학교 제17회 졸업기념 시진이 소화3년(1928년) 3월24일로 남학생106명 여학생16명 합122명이고 남자선생12명 여자선생3명 총15명이고, 두루마기 입은 남자선생이 3명 여선생 1명이다. 남학생은 모두 두루마기 차림이고, 여학생은 흰 저고리에 검정치마이며 모습은 중학교 졸업생으로 보인다. 당시에는 입학이 늦어 나이든 학생이 있었다고 한다. 졸업후 철도학교를 졸업하고 철도원 역장으로 근무한다.
고모와 고모부는 격식 있는 사람들 이었다고 한다.
남동생은 철도원으로 재혼후 부산에 살았다. 앋들은 기계체조 선수생활후 교사가되었다. 부인은 병원 허드레일을 하면서 신영순의원에 여으사들을 여러번 소개해 주었다. 동생 혜원을 귀여워 해주었다고 한다.
당시는 이승만 김구 등이 황해도 출신으로 정치성향이 센 지방이다. 신천 출신은 오치성 백두진 여행가 감찬삼 축구인 김용식이 있다.
부친이 철도원 역장으로 장성 근무시 모친을 만났다고 한다. 인천은 황해도 인접해 많은 피난민이 내려와 사는 도시이다.
소화14년2월 (1939) 3세경 전남 장성군 북일면 신흥리에서 찍은 모녀사진이 있다. 소화16년(1942)에도 모녀가 같이 직은 사진이 있다. 제원은 부친 직장 따라 초등학교를 여러군데 다녔다고 한다.
1942년 04.01 중앙선(청량리~경주)개통으로 영주에서 역장으로 근무하다가 제천철도관사에서 살게 되었다고 본다.
여동생 신영옥 1949년 음 2.12 제천 철도관사에서 제원의 딸 같은 나이에 출생하였다. 난산이라 의사가 와서 면도칼로 열어서 아기 코에 작은 상처가 있었다고 한다. 당시에는 출산시 산모 사망률이 많은 시대이다.
1946년 우량제보선구표창 기념 사진(1947.4.5.)으로 보아 제천서 오래된 동명초등학교를 4학년 다닐 때 웅변대회에 나가서 우승했다. 1949년2월27일(음녁2월12일)에는 제천에서 차녀 신영옥을 낳고 기어 다닐 때까지 제천철도관사(답사해 보니, 8등급작은 관사로 보이고 2호연립주택 앞에 정원이 있으나 주로 텃밭으로 사용)에서 살다가 부친직장 인천으로 이전 인천시 송월동1가 934 출생으로 1953년 9월24일 신고한다.
6,25 전쟁시 피난을 장성으로 갔을 때 주변 굴에 폭격이 심할 때 놀라서 부친이 머리를 아궁이에 박고 있었다고 하는 우스운 이야기가 있다.
1952년 인천박문여중을 졸업하고 동생과의 놀이는 지면 절받기를 시켰다. 이어 인천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한다. 여고 재학시에는 공원에서 웅변연습해서 학교 대표로 웅변대회에 출전하여 대통령상을 받았다고 한다.
상패는 학교에 전시되었다고 한다.
여자의과대학에 진학
제원 고교시 부친은 남녀공학에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었다. 재원은 법대를 가고 싶어 했는데 부친이 남녀공학을 반대하였으며 의과대학을 나와도 정치를 할 수 있다고 만류하여 1955년 현 고려대학인 수도여자의과대학에 입학하게 된다. 이 의과대학은는 48‘년 서울여자대학으로 개교하고, 57’년 수도의과대학으로 교명을 변경하고 남녀공학이 된다.
시험 때는 학교에 있는 인골을 집에 가지고 와서 공부하기도하여 가족들을 놀라게 하였고, 책을 보며 밥을 먹으면서 열심히 공부 했다고 한다. 후일 서울의대에 못간 것을 아쉬워 하기도하였다. 1957년 수도의과대학으로 교명이 바뀌고 남녀공학이 되었으며, 안양 성심병원 의사 엄주택도 홍대 국문과를 다니다.이대학에 편입한다.
부친은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중구 만석동에 커다란 2층 절충식주택을 튼튼하게 지었는데 후일 병원으로 쓸 수 있게 지었다고 한다. 이후 부친과 용산역 주변에 기거하며 학교를 다니면서 주말에는 집에 내려오면 모친이 공들여 키운 닭을 잡아 가족회식을 하였다.
이중살림 중에도 모친은 동생도시락을 6년간 매일학교에 가져다주는 열성을 보였다. 이러면서 한글을 깨우치고 같이 졸업한 격이다. 모친은 굴 껍질을 주서다 절구에 빠고 닭을 열심히 키워 학교 담임선생에게 보내기도 하고 계란을 인근중국집에 보내서 살림을 보탰다고 한다. 막내딸에게 닭장에서 계란을 가져오계 하였고, 닭장사진을 찍어 논 것이 특징이다.
1958년2월21일 혼외동생 신영호 출생으로 갈등이 시작 된다. 당시는 아들 선호사상으로 유사한 일이 주변에 많이 있었기에 아들 없는 장녀들은 아들 같은 행동을 하였다고 본다. 재원은 아이들 자기가 키우겠다고 업고 인천집으로 돌어 오자, 모친은 머리에 피도 마르지 않은 년이 나슨다고 많이 화들 냈다고 한다.
1960년3월~ 61년 2월) 의과대학 총 학생회장에 취임하자 3 .15부정선거로 데모가 심해져 4,19의거에 참가하는 중 모친이 걱정이 되서 모친이 의거현장에 찾아 간적이 있다. 학생 운동중 동국대학교 전라도 농민집안 출신 박완일회장을 알게 되고 교제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즘에 부친은 고혈압으로 병이 나서 학비조달 치료비 등으로 공 드려 튼튼히 잘 지은 인천집을 팔게 되고 서울 흑석동 용산철도변관사 로 전전하게 된다.
`1961년2월 의대를 졸업하고 청주모병원에서 수습과정을 가지는데 가족의 생활비 조달로 보수가 좋은 지방을 택했다고 생각된다. 모친이 매달 생활비를 받으러 청주에 다녔다고 한다.
박완일 회장은 전남 송정리 사람으로 불교신자인데 고정소득이 없기에 부모가 반대하는 결혼을 하게 된다. 제원은 남자 같이 생각하므로 장애를 느끼지 못한다.
나혜석이 기혼자 최승구를 사랑하고 사랑을 배우고하는 것하고는 차이가 있으나 혜석이 결혼의 형식에 얽매인 결혼식 관습은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은 재원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나혜석은 진정코 좋아하는 남자가 생긴다면 혼례식따위는 치르지 않고 그저 형식적인 맞절만으로 살림을 차려도 무방하다고 한때 생각했다.
그러나 오래가지 못하고 헤어지게 된다. 후일 박완일회장은 불교협회 회장을 하는 중에 길에서 여동생을 만나 서로의 안부를 물었다고 한다. 박회장은 허우대가 좋은 삶으로 말을 잘했고 숙명여대출신과 잘 만나 자손을 두었다고 한다.
동생 신영옥 수도여자중학교 졸업 사진은 1964년1월 주소는 용산구 한강로3가65~804통9반으로 되어있다.
제원은 전원도시 안양에서 개업 한다. 오긍선의학 박사의 사회사업이 유명한 곳이다. 안양은 시흥군의 수도로 주변에 산이 많고, 물, 돌, 여자가 많은 삼다읍으로 수도권에서 생기 있는 도시였다.
1965년 안양1번가에서 부친의 지인으로 국회의원을 한 권수창부친 권창식 소유로, 중앙의원 건너편 적산가옥(일본집)같은 집에서 부인의원으로 개업한다. 권찬식은 안양충혼탑 안양대학교에 부지를 기증한 큰유지 이었다. 사진에는 마당에 나무 한 구루가 인상적이다. 모친은 의원 피 빨래 청소를 담당하였는데 사진으로 남아있다. 백수 건달상태의 남편으로 염증이 생기고 새 남자가 생기자 이혼한다. 지금은 이혼 30%시대라 보통이지만 당시는 특이하게 보았다.
1967년1월 신영옥이 (영등포구 흑석동 196~3) 수도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의대를 가기 위해 2번 시험 보나 낙방하고 수도고녀 급우 홍명희(상명여대미대졸업후 집에서 살림)의 소개로 미술학원을 다니고, 급우들이 다니던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공예과에 진학하계 된다.
1968년1월22일 시흥군 안양읍 안양리 946번지내 호주 경찰 박규희 와 재혼시 3남1여의 다자녀 경찰이 본부인과 이혼하고 오기에 부모가 심한 반대를 했다고 한다. 친정에서는 불만이 많으나 제원 친정식구 4명 거느리고 있음을 생각하고, 박순경과 같이 살기로 결행했다고 본다. 박순경이 전처와 이혼하고, 재혼은 정상적인 사고의 틀을 벗어나는 행위 일 수박에 없었다.
동생을 의대에 보내고 싶어 두 번이나 의대에 시험을 보았으나 인연이 없었다. 심지여 수술실에서 산모를 잠시 부뜰고 있으라고 했는데 피냄새가 역겨워 의식을 잃고 쓰러지는 일 있어서, 의대를 포기하고 미술학원을 거처 미대에 진학하게 된다.
부친은1974년 5월30일 오전5시 서울특별시 마포구 신수동 69번지의64에서 돌아가신다. 신수동집은 언덕위 작은 집으로 홍대 와우산 동편 언덕으로 대학과 도보권으로 ㄱ자를 뒤집어 놓은 형이고 대지27평(90m2) 건물이17평정도아고 방3개 대청과 부엌 다락이 있었다. 옆집 지붕 위로 고압선이 지나가는 곳이라 부친의 질병에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된다. 동생은 집에서 아우아파트붕괴 소리와 모습을 보았다고 한다. 모친은 이집에서 안양병원까지 출퇴근하였다. 동생은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공예과에 다녔고 메운 땅위 기초가 내려 않아 와우아파트가 큰소리로 붕괴되며 먼지가 집체 같이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간호사들이 부친간병을 하고 동생도 대학원 재학시 간병을 도왔다고 한다. 권옥희 간호원에 이어 박점숙 간호원이 간병을 하였는데 부친은 간호사에게 친절했다고 한다. 권씨는 19‘년 우리집방문시 간호시 졸았다고 나에게 말한 적이 있다. 권간호원은 제원의 소개로 기술자를 만나 쾀에 거주하다가 미국 뉴욕 남쪽 스테이트 아일랜드에 정착한다. 평택오빠가 교통사고로 병원에 입원타가 용인에 있는 공원묘원에 장례지냈는데 후일묘소방문시 미국에 가기싫은 것을 갔다고 나에게 한탄하였다. 전자제품수리점 DP점 세탁소등을 하면서 2남1녀들 두고 장남은 필라델피아 치대에 다시 다녀 치과의사가 되어 검안사와 결혼후 개업하녀 자손을두고 있다. 딸은 2번대학에 다녔고 초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나와서 뉴욕에 있는 출판사에 취업하여 재택 근무식으로 근무하나 이혼 후 높은 뉴욕 임대료 등으로 친정에서 출퇴근한다. 모친과 소통이 잘 안되고 부친은 재혼 압력을 놓으나 잘 성사되지 않는다.
의과대학대 입학후 꿈꾸던 자기병원을 74년 초부터 건축되던 1975년6월 안양 일번가에서 지하1충 지상 2층을 조명호건축사설계로 아담하게 건축되었다. 부친은 열심히 감독하였다고 한다. 설계는 일본설계가 참고된 것으로 보았다.
‘제원을 조명호건축사는 일본에 가깝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 사채가 유행하던 시대라 함경도집 박주안부인 등의 돈이 사용되었으며 건축 후 빚으로 고생했다고 한다. 시의원을 역임한 박주안은 기독보육원서무를 보았으며 부인은 구시장에서 옷가지 등을 팔면서 제원과 가까이 지낸 사람이다.
1974년 5월30일오전5시 서울시 마포구 신수동 69번지의 64에서 사망 동거자 김판례 동년 12월18일 신고한다.
동생이 등록금도 던져 주어서, 돈을 줍느냐고 마음 고생을 하였다고 한다. 무리한 공부를 하였다고 본다. 사채를 많이 쓸 때라 예민하고 거친 면을 보였다고 본다.
사용승인후 지하1층에서 모친이 음악다방 명(明)다방을 경영했는데 인기가 있어 젊은이 들이 어머니라고 부르며 드나들었다고 한다. 필자도 학생시 몇 번 간적이 있다.
이시절 제원은 정읍사람 이순자원장이 운영하는 서울시 중구 회현동 입구에 있는 일본식 2층집 1층 동아미용실에 다닌다. 미용실은 시아버지가 결혼시 전세를 얻어주고 구며주어 개업한 사업체이다.
안양동674-51외1필지 (안양로 304번길 7)
1975.06.02. 증축2015-1(허가:66.19,준공:66.11.10) 지층68.18, 1층139.90, 2층139.90 증축(설계:조명호)
1976.08.24. 증축140 (허가:75,4.9,준공:76.8.24) 입원실3층 129.4, 4층21.72증축(설계:최승원)
1977.12.30. 증축976호 (허가:77.8.16,준공:77.12.26) (설계: 최승원)
1979.09.15. 증축164호 (허가:79.4.3,-준공:79.9.13) 병원 4층 110.08, 5층 224.10 증축(설계:최승원)
동아미용실은 1965년경 개업한 곳으로 정치인 정대철의 부인, 건축사 김만성의 부인등이 다니는 잘나가는 미용실 이었다. 자녀들은 리라학교에 다녔다. 일본만국박람회시 부부가 참여하고 일본에서 3남을 출생하여 만박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1976년 회현동 동아미용실 이순자원장으로부터 좋은 신랑감이 있으니 병원에서 신부감을 소개하라고 요청한다. 어느날 제원은 병원지층 명다방에 권옥희간호사와 같이 나와 처음 인사를 한다. 대화중 제원의 동생이 매우 공부를 열심히 한다고 하며 또순이 같이 생활력이 있다고 설명하고 혜여졌다. 이후 초조한 시간이 지나면서, 대학원논문 마감으로 시간이 없고 얼굴에 알러지가 생겨 미팅이 지연된다고 연락이 왔다. 긴급으로 명동내 호텔커피샾에서 미팅하였다. 제원 동생 혜원은 동아미용실에서 새단장을 하고 환한 보름달 같이 얼굴을 꾸미고 나왔다. 후에 안일이지만 모친이 반대하였는데 제원의 결정과 혜원의 마음으로 만나계 되었다고 한다. 사보이호텔에서 양식을 하고 혜진적이 있었는데 그날 밤에 ‘참 맛있다’고 잠꼬대 하여 모친이 다음날 무엇을 먹었냐고 질문 했다고 한다. 76년 겨울 온양등으로 데이트후 4월3일 명동소재 로얄메트로호텔 서울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고속버스타고 경주에 신혼여행을 다녀왔다. 집은 신랑이 얻는다는 풍속에 따라 도곡동 삼승맨션 1층을 180만원 전세를 얻어 신혼살림을 차리었다. 대방동에서 집을 보면서 걸어와 이곳에 얻게 되었는데 모친이 출퇴근시 들를 수 있는 위치로 홍익대 나상기교수 작품으로 형관옆에 기름보이라실이 각집에 있는데, 인데 부도후 중앙공급 보일러형으로 2룸에 소형창고가 있다. 명동 미팅시 혜원은 질문에 신뢰성이 보였다고 답하였다. 76년 제원은 건축설계사무소 사무실(오기동한약사소유)임대 및 간판 개업 준비를 하여 3월 2일 개업하였다. 경기가 좋은 시절이라 보증금은 후일 환원하였다.
1978년 4월에는 의료보호사업관계로 보건사회부장관 표창을 받는다.
1979년4월~1988.3월 조산원 수습기관인정 및 교육기관장을 하면서
1979년4.3~9.13일 증축을 하였고, 공사자금을 은행에서 대출하게 된다.
1980년3월(7일간) 국제불임시술협회 총제 한국대표로 참가한다. 53년전후 베비붐시대 출산아 들이 출산기에 들러가며, 한국은 인구가 핵분열하듯이 늘어난시기다.
1980년5월에는 보건사회부장관표창 (가족계획 사업실적우수)
1980년5월 한국여자의사회회장 주일억 으로부터 감사폐를 받는다.
1980년8월(14일간) 세계여자의사회 총회 한국 대표로 참석한다.
1981년5월(7일간) 제9차 아세아, 오세아니주 산부인과 학술대회 한국 대표
의료사업이 순조롭자 1981년12월~1984년12월 사단법인한국부인회 경기도지부장을 한다.
1982년12월~1992년12월 경기도청자문위원
1983년 1월(10일간)세계N.R.B. 초청미국방문
1984년 2월 카톨릭의과대학교 대학원 박사과정수료(의학박사)
1984년 5월(7일간) 미주 의학협회 세미나 한국발표
1984년 4월 병원경영 이론과 실제(세경사)
1985년 5월~1992년12월 수원지방검찰청 의료자문위원
1986년 3월 국립의료원 자문위원
1986년 4월 전문의 취득(마취 576)
1986년 9월~1995년 9월 경기도 여성단체협의회 회장(10년 역임)
-경기도 주부의날 제정 (매년 5월말)
-단체 기금 조성
-단체 사무실확보
-도내 여대생 취업 교육
-재활용 캠페인 및 환경보존 강연회마련(10년간)
1987년 10월 국민훈장 석류장, 경제분야(저축장려)
1988년 2월~고려대학교 의과대학 외래교수
1988년 5월~1992년 4월 제13대 국회의원 (전국구, 보건사회상임위원회 의원)
13대국회
- 모자 복지법 제안 의원입법으로 제정
-영유아 보육법 제안 의원입법으로 제정
-환경기본법제정 심의
-보건소법 개정 제안
1989년 1월~1990년 12월 고려대학교 의과대학교우회 회장
1989년 9월 사회체육사이클 안양시연합회에서 감사폐를 받다.
1990년 2월 6일 모친 김판례별세 구로 고대병원에 안치. 제원 혹가이도에 여행중이었다.
1990년3월(7일간) 아세아 여성국회위원회의 한국대표
1990년 4월 (7일간) 국제 의사국회의원회 한국대표
1990년 5월‘여성이 주인이 되는 사회‘ (삼성출판사)
1991년 5월 고려대학교(고려의대 도서관 건립 기여) 감사패
1991년 5월 고려대학교 의과대학 교우회 공로패
1992년 5월 한국여자의사회 공로패
-기금으로 1천만원 기탁
1993년 1월(8일간) 고려대학교 노동대학원 고위지도자 과정
제2기 원우회 회장 자격으로 영국 옥스퍼드대학 방문
‘개혁정치와 삶의 질 향상을 주제로 강연
1993년 5월~1996 4월 한국여자의사회 제17 회장
-장학기금으로 1천만원 기탁
-에이즈의날 기념행사 비롯한 건강강좌를 통해 에이즈에 대한 경각 고취
- 젊은 여의사의들의 권익향상을 위한 영포럼 창립
1993년 5월~ 환경미화원 후원회 이사
1993년 7월 안양여자의사회 경기도지회 (초대회장)공로페
1994년 2월~1996년 12월 안양소년소녀합창단 단장
1994년 5월~1996년4월 대한의사협회 부회장
1995년 7월 1997년 6월 민주평화통일 자문위원회 자문위원
1995년 9월 공로패 경기도 여성단체협의회 19년간 회장으로 기여
1995년 9월~현재 고려대학교 노동대학원 고위지도자과정 제2기 원우회 회장
1995년 10월~현재 사단법인 한국베트남 함께가는 모인 공동대표((KOVIET)
김종철대표는 동아일보 해직기자 출신으로 후에 1998년 7월 연합통 신사장을 역임한다.
-베트남 한인2세 초청 및 치료
- 베트남 한인2세 합동 결혼식 추진 (9회 65쌍)
-의약품기증 (3회 2천만원 상당)
베트남에 여성병원 추진 기획설계(최승원)
1995년 10월 ’그래도 나는 사랑을 믿는다’도서출판 경당
1995년 12월14일(사) 원자력을 이해하는 여성모임 총재취임
1995년 12월 연세대학교 (10년간 근육병 클리닉 후원)감사패
1996년1월 공노패 안양시장 (안양소년소녀합창단 결성)
경제 위기는 97년 이전부터 왔고,
• 이를 극복할 능력이 안되었기에.
• 결국 버티지 못하고 97년 11월 IMF 구제금융 신청
• 1997년 11월 21일
• 김영삼 대통령은 박태준 자유민주연합 총재,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 김대중 새정치국민회의 후보, 조순 한나라당 총재와 회담
• 오후 10시, 임창렬 부총리 IMF에 구제금융을 공식 신청 발표
건축시 병원경영담당 박광수교수 (경기대 대학원장 역임후 배재대학교총장 역임)가 병원에 투자생각이 있었으나 투자치 않았다.
1996년 12월~1999년 6월 신병원원장 IMF중
건축전에 일번가 구병원을 팔아서 건축해야 하나, 미리 팔지 못해 땅값은 떨 어 지고 건축비 이자는 증가 하였다. 필자는 건축을 반만 하자고 하였 으나 채택되지 않았다. 재원은 여의사회에 병원을 넘 길려고 하였으나 계획보다 낮은 가격에 넘긴다.
출산감소로 산부인과 감소 기획무리
건축중 IMF 발생.
후에 인천시 송도근처에 기존건물을 구입 병원으로 무리한 재투자하다.
1997년 7월 제1회 안양을 빛낸 여성상
1997년 10월 경기도 건축문화상 금상
1997년 12월 환경문화대상 건축부분 우수상
1997년 12~현재 안양여성합창단 단장
1998년 2월~현재 경기도 여성발전 위원 고문
1998년 3월~현재 신병원 세사미 어린이뮤지컬합창단 단장
1098년 4월 (4일간) 원자력을 이해하는 여성 모임 국제학회(대만)
1998년 4월 22일 국제원자력여성(WIN) 수상
1999년 2월~현재 여성자원봉사연맹 참사랑의료원 회장
1999년 3월~ 현재 경수로 사업 지원부 기획단 자문위원
1999년 6월~2001년 1월 의료법인 세원 의료재단 신병원 이사장
1999년 10월 (4일간) 아시아지역 원자력 홍보 세미나(일본)
2000년 9월 6일 대통령단체 표창 수상(원자력 여성 모임)
병원유지하기위해 직원들은 월급을 반납하겠다고 하였다고 한다 (고과장 증언)
2001년 2월~ 인천신병원원장(인천 연수구 동춘동 53-3)
안양신병원이 은행으로 넘어가고 인천 은행에 잡힌건물을 인수하여 수리 후 재개업하였으나 부채로 넘어간다. 수리 및 의료기계 관련 부채 가 있었으나 모두 갑아 나갔다.
제원은 1999~2001 동생과 만나지 않는다. 가끔 있었던 일이다.
2001년 3월 30일 IAEA(국제원자력기구) 사무총장 자문위원 위촉
2001년 11월 7일 WIN-KOREA(원자력 전문직 여성) 명예 회장
2001년 12월 13일 원자력을 이해하는 여성모임 명예총재
이후 용인 울산 정읍 등지에서 원장으로 봉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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