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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정진원]의왕 덕장학교 이야기

안양똑딱이 2016. 6. 11. 20:30
[자료]덕장학교 이야기

[02/27 네이버블로그]귀천/귀향/귀인


 

덕장학교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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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교 덕장초등학교 10회 동창생들은 대개 1945년생들이다. 해방둥이가 대부분이었다. 올해가 해방 60주년이 되는 해라니, 우리는 회갑의 나이, 이순(耳順)의 때가 된 것이다.해방과 더불어 태어난 것이 잘 된 것인지, 어떤지는 모를 일이다. 하여튼 압제의 땅이 아니라 해방된 신세계에 나왔다는 것이 행운이라면 행운이다. 모교가 1944년에 개교했다고 하니, 우리들의 삶은 모교와 더불어 시작되었다고 보아도 되겠다.

나는 덕장골이라는 동네에서 태어났다. 덕장골에서 덕장초등학교 이름이 비롯되었다. 내 선친과 작고하신 숙부님 등이 덕장초등학교 창립에 주도적 역할을 하셨기 때문에 학교 이름도 우리 동네 이름을 따서 덕장초등학교라 하였단다. 그리고 덕장초등학교 교가를 선친께서 작사하셔서 지금까지 후배들이 부르고 있다.




삼천리 한 복판에 장엄하다 청룡산은

창공에 우뚝 서서 광교 모락 마주보고

청계천 맑은 시내 길이길이 흐르는 곳

화려한 이 마을에 덕장학교 세웠도다.




복되다 우리 형제 즐거울손 우리 자매

우리 글 힘껏 배워 새론 문화 건설하고

이내 몸 굳세이기 무쇠같고 돌과 같이

새 나라 새 일꾼들 씩씩하게 자라난다.




우리는 너도나도 대한 나라 어린이들

나라를 사랑하며 겨레끼리 서로 돕고

부모님 효도하는 좋은 행실 많이 배워

높이자 학교 이름 빛내자 나라 이상.



정건모 작사 안제하 작곡




숙부이신 정성모 선생님께서는 모교의 교사, 교감을 오랫동안 역임하셨고, 돌아가시기 직전에는 모교의 교장으로 계시면서, 운동장에서 운동회 준비를 독려하시던 중 순직하셨다.

6ㆍ25전쟁의 초연이 모락산, 청계산, 무재봉에 아직 걸려있었고, 전쟁 이야기로 뒤숭숭하던 1952년 봄에 우리는 모교에 입학하였다. 처음에는 가건물에 칠판을 걸고 공부했었다. 나중에 목조로 교실을 신축하여 들어갔다. 마루와 복도가 있고, 철로 된 레일 위로 유리창이 여닫이로 되어 있는 것이 여간 신기해 보였고, 요즘은 그런 집을 볼 수 없게 되었지만 바깥벽은 좁고 긴 널빤지를 붙여서 만들고, 기와를 올린 교사였다. 대단한 현대 양식의 건물을 대하는 것처럼 호기심의 대상이었다. 입학하던 첫날 무슨 옷을 입고, 무슨 신발을 신었었는지 모르겠으나, 웬 콧물을 그렇게 많이 흘렸는지, 코 닦는 수건을 마치 입학허가증이나 되는 것처럼 앞가슴에 매달고 입학식에 갔던 기억이 난다. 우리 남루한 어린 시절의 주홍글자처럼.

골마다에서 코흘리개 아이들이 모교 운동장으로 모여들었다. 솜바지저고리 차림이 대부분이었던 것 같았다. 6년 후 찍은 졸업 기념사진을 보니 반은 바지저고리를 입고 있었으니까. 검정고무신이나 제대로 신고 있었는지. 당시 동네와 그곳의 친구들 이름을 다시 불러보고 싶다. 그 아이들이 이제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었다. 다정한 이름들이다. 옆집의 영자, 아래 모텡이의 노자, 대원, 병길, 벌모루에 기남, 이미에 봉재, 세거리에 득춘, 양지편에 원재, 인록, 기옥, 구렁골에 완석, 옥박골에 선희, 문순, 논골에 제필, 제대, 건너말에 세근, 제실, 필근, 한배, 청계에 정용, 낙순, 순화, 순자, 양자, 경해, 한직골에 석정, 영관, 제순, 희영, 옥자, 성고개에 규천, 해자, 옥자, 영애, 원터에 학열, 종식, 형근, 종윤, 새터말에 재원, 학현에 하재, 상순, 명륜보육원에 광남, 난수, 백석, 능안에 종환, 재호, 원우, 영희, 인순, 양호, 속말에 훈재, 의일에 영균, 명재, 북골에 연준, 오린개에 찬민, 철우, 형심, 저수지에 연기, 학교 옆 도화 등 죽마고우들이다. 적어도 열 명은 이미 이 세상의 사람들이 아니다.

그 때 모교를 생각하면 모든 것이 크고, 호화롭고, 신기하게만 생각되었다. 운동장은 우리들에게 올림픽스타디움 정도의 크기로 느껴졌었다. 그곳에서 가을 대운동회가 열리면 만국기가 파란 가을 하늘에 나부끼고, 개선문을 세우고 청ㆍ백군으로 나눠서 뛰고, 응원하고 하는 것이 대단한 행사였다. 청군, 홍군이 더 어울릴 것 같은데 6ㆍ25전쟁 직후여서 그랬는지 홍군이 백군으로 되었었다. 백군은 언제나 백기를 들고 있었을 것이니, 싸움의 결과는 뻔한 것이 아니었겠나 싶었다. 흰줄이 들어가 있는 검정 빤스(팬츠)와 대개는 구멍난 나닌구(넌닝셔츠)를 입고, 청ㆍ백색 머리띠를 하고 운동장을 달렸다. 맨손달리기, 장애물달리기, 기마전, 기둥 넘어뜨리기, 오재미(일본말임, 놀이주머니)를 던져 박 터트리기, 마스게임 등을 하였고, 오후 마지막 경기로 달리기 계주가 있었다. 운동회가 끝나는 시간에 맞춰서 인덕원 사거리를 반환점으로 하는 단축마라톤은 먼저 출발시켜 놓았었다.

배워서 알게 된다는 것이 참으로 신기한 일이었다. 요즘과는 아주 달라서 학교에 들어가서야 비로소 한글을 기역, 니은, 디귿, ‘아야어여’부터 배우기 시작하였다. 1, 2, 3 아라비아 숫자를 익혔다. 3학년 때인가 4학년인가 윤을모 선생님 시간이었던 것 같은데, 오후에 눈이 갑자기 내리자 선생님께서 칠판에 ‘뜻밖에’라고 쓰시고, 그 뜻을 물으셨다. 그때 누가 바른 답을 하였는지 모르겠다. 뒷동산 작은 소나무 임간학교에서 국어 받아쓰기를 할 때 불러주신 ‘핥아먹다’를 제대로 받아쓴 친구들이 있었는지 궁금하다. 국어 책에 실려 있었던 무슨 동시를 외우게 하고, 제대로 잘 되지 않은 친구들은 나머지공부(요즘 말로 방과후 보충수업)를 해서라도 외우고 집에 돌아가게 했던 일이 기억에 남아있다. 학교에 헌 풍금이 한 대 있었다. 처음으로 보는 서양 악기였다. 국경일이 되면 기념 노래를 풍금반주로 배웠다. 국경일 노래는 모두 우리 문중의 내 조부 항렬의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 선생께서 작사한 것이어서 자랑스러웠다. ‘기미년 삼월 일일 정오 ...’, ‘비 구름 바람 거느리고 인간을 도우셨다는 ...’, ‘흙 다시 만져보자 바닷물도 춤을 춘다 ...’, ‘우리가 물이라면 새암이 있고 ...’ 등이었다.

당시 초등학교는 각종 정보의 집산지였다. 쇄신의 물결이 퍼져나가는 진원지였다. 며칠에 한 번 자전거를 타고 학교에 오는 우체부 아저씨가 누구보다도 반가운 손님이었다. 창밖에 서서 능안 사는 누구, 이 편지 가져가거라. 오린개 사는 누구네 편지, 가져가거라 하였다. 우리는 목조 교실 창가에 서서 세상의 온갖 이야기를 커다란 가죽 가방에 넣어오는 우체부 아저씨를 기다리곤 하였었다. 사동(포일리, 청계리, 내손리, 학의리)의 골짜기 안에서 일어난 일과 사건들, 루머, 뉴스들이 운동장에 모여 있는 조무래기 뾰족한 입들의 재잘거림을 통하여 어떤 것은 확대 포장되고, 어떤 것은 축소 왜곡되어 전 세계로 구전되었다.

소풍은 대개 청계산 청계사로 갔었다. 청계 맑은 개울을 따라 난 오솔길을 걸어서 가는 원족이었다. 상청계 누구네 돌담 울타리에 개나리가 곱게 피고, 정용이네 맞은편 산언덕에 진달래 붉었었다. 개울에서 도롱뇽 알을 건지기도 하고, 가재를 잡기도 하였다. 요즈음 청계사를 다시 가보니 절 입구까지 시멘트 포장이어서 답답하였고, 개울도 오염되어 가재들도, 도롱뇽도 살 수 없게 된 것처럼 보였다. 관악산 연주대로 소풍을 갔던 적도 있었다. 그 날 비가 너무 많이 내려서 돌아오지 못하고, 예정에도 없게 절에서 하루 밤을 묵게 되었었다. 그 때 먹어본 절밥과 산나물 반찬의 맛을 잊을 수가 없다.

덕장골에서 덕장초등학교로 나아가 우리는 비로소 동굴의 우상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우리는 모교의 교실과 교정에서, 운동장에서 세상을 배웠고, 세상을 알게 되었다. 한글을 알게 되고, 구구단을 배웠고, 6학년 때는 유근학 선생님께서 풍매화, 충매화 등 꽃가루받이에 대하여도 가르쳐 주셨다. 정사각형에 내접한 원 밖에 있는 한 모서리 면적을 구하는 방법을 숙부 정성모 선생님한테서 배웠다. 그분은 육상지도에도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계셔서 모교에서 육상 국가대표 선수를 길러내기도 하셨다. 내가 공부깨나 하는 사람으로 된 것은 그 숙부님의 은덕이었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 미술사학계의 태두 윤희순 선생의 따님이신 윤을모 선생님이 계셨다. 그 때 덕장학교에서 터득한 물리로 이제껏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이다. 그밖에 남상익 교장, 이종필, 우귀근, 임옥희, 김우분, 최성원 선생님 등이 그때 계셨다.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고향 덕장굴과 모교와 그곳의 많은 친구들과 교실에서 바라보던 한직골 들판의 아지랑이, 광교산과 모락산 위의 가을 하늘과 구름. 봄이 오면 학교 뒤편 언덕 영자네 과수원에 복숭아꽃이 만발하고, 꽃들 사이에 나비들이 날고, 꿀벌이 잉잉대고 있었는데 ...

2006-02-26 20:36: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