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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조성원]1960년대 안양과 신작로 길

안양똑따기 2017. 3. 8. 15:45

[조성원의기억속 안양]60년대 안양과 신작로 길

2-1 신작로 길 1
언덕너머에 신작로(新作路) 길이 생겼다. 동네 사람들이 다들 신작로라 불러서 나는 그 길 이름이 신작로인 줄 알고 지냈다. 우리 동네는 신작로 말고도 아래엔 아스팔트로 포장된 국도가 가로질러 있었다. 수원과 서울로 통하는 유일한 길이었다. 해마다 개나리 필 무렵 수원에 모 심으러 박대통령이 행차하는 날엔 우리는 그 길 변에 늘어서 박수를 쳤다. 그때는 그가 수원으로 향한다는 사실만을 알고 있었는데 후일 그가 간 곳은 농촌진흥청이고 권농일이라는 날짜에 맞춰 해마다 그곳을 향했다는 사실도 자연 알게 되었다.
안양에 유명한 갈비 집으로 ‘화진정’이란 곳이 역전에 있었는데 그는 당시 박통이 수원에 오면 으레 들리던 갈비집에 주방장 출신이라고 했다. 수원은 갈비가 예전이나 지금이나 유명하다. 우시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만동’이란 동네 이름이 뜻풀이 그대로 이를 반증한다. 그 위치에 선 유명한 갈비집 이름이 ‘본수원 갈비’라는 집인데 오랜 전통을 자랑한다. 얼마 전 가보았더니 용인 민속촌을 들르는 일본관광객이 지정코스로 들리는 거의 기업수준으로 운영이 되고 있었다.
어느 막걸리 집은 박통이 그 날 막걸리 마시는 사진을 간판으로 내 걸고 옛 향수를 불러일으키고도 있다. 요즘도 가끔 가는 막걸리집인데 그 집 이름은 '박통'이다. 어쨌든 나는 반듯한 도포를 한 국도 1번 길로는 거의 다니지 않았다. 위험하다는 부모님 말을 잘 들어서도 그렇지만 그 도로는 양변에 플라타너스만 무성할 뿐 좁고 속도를 낸 차 이외는 거의 볼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국민학교는 신작로와 1번국도 사이에 낀 우리 집으로부터는 북쪽에 약 2킬로 가까이 떨어져 있었는데 나의 등교 길은 신작로도 국도도 아닌 그 사이를 누비는 좁다란 길이었다. 당연 나로선 그 길이 지름길이고 안전했기 때문이다. 한 눈에 바라보아도 시원스럽고 수덕스럽게 서편에 자리한 수리산. 안양 냇가의 발원지는 바로 그곳이었다.
저 멀리 산본이라는 곳은 수리산 남측 끝으로 (지금의 군포방면) 그곳에서도 냇가를 형성하여 벌터라는 곳(지금의 평촌신도시)으로 물이 모여들지만 우리동네 바로 위인 소골안이라는 동네에서도 냇물은 굽이굽이 아래로 흘러 내 살던 곳을 지나 천양포도주 공장과 오리온 햄 소시지 공장을 지나 기차 길을 넘어 쌍 개울로 나가 벌터 물과 합쳐져 비산 천에 이르고 이는 곧 지금의 안양천에 합류를 한다.
작은 냇가는 비가 오면 넘실거리며 냇가 변에 늘어선 올망졸망한 집들에게 크나 큰 위협이 되기도 한다. 한 번은 비가 넘쳐나 비산다리가 끊기고 과천으로 향하는 버스가 떠내려가는 일도 있었다. 그로 비산동에 사는 아이들은 등교를 못했고 버스사업을 운영하는 우리학교 다니는 아이네 집은 그것으로 그만 폭삭 망하고 말았다. 그 시절에는 안양에서 몇 안가는 부잣집이었는데 짐작컨데 보험이 없던 시절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하지만 냇가는 평상시는 수량이 적어 징검다리 너댓개를 밟으면 그만이었다. 나는 그 냇가를 건너 냇가를 경계로 길게 늘어선 평촌이라는 작은 동네를 지나 보리밭과 포도원 사이 길로 해서 그 당시 남달리 부르던 학교밑창이라는 교화동을 지나 학교 뒷문을 통하여 등교를 했다. 그 길은 지금 생각해도 꽤 운치 있는 길이었다. 생각해보면 전원적 분위기와 변모하는 당시의 모습이 단면처럼 드러나는 상징적인 일면을 갖는 추억의 길이다.
냇가는 그 당시는 물이 맑아 빨래터가 되기도 했으며 한 겨울 철에는 썰매를 타고 팽이도 돌리고 하루해가 저무는 줄 모르고 놀던 곳이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고학년에 이르러서는 그 누구도 그곳 물이 맑다하지를 않았다. 공장이 들어서도 아니고 천변에 늘어선 집집이 마구잡이 식 이물질 투하가 빚어낸 자충수이다. 그리고는 그 냇가는 70년대 중반쯤에 청개천같이 콘크리트로 복개가 이루어져 그곳이 냇가였는지 육안으로 보아도 알 수 없이 변하고 말았는데 지금도 별 반 다르지 않다.
그리고 평촌이라는 부르던 조그만 동네, 나는 학교 때 뿐 아니라 평소에도 냇가를 건너 그 동네를 많이 찾았다. 형들이 많아 놀거리가 많고 재미난 구경거리가 수북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골목길이 주는 의미가 그러하듯 올망졸망 얽히고설킨 석면집들이 즐비한 그곳은 사람 수 만큼이나 많은 가난이 질펀하게 펼쳐진 동네였다. 나는 그 골목길에서 적잖은 싸움 풍경과 아이들 칭얼대는 소리를 듣고는 했다.
골목길과 신작로. 둘 다 농촌에선 존재하지 않는 길들이다. 신작로는 문명으로 접어들기 위해 필요로 만든 길이고 골목길은 이미 문명화 된 동네에 군더더기 마냥 다닥다닥 붙은 집 사이로 겨우 길을 만든 통로이다. 안양이 시대로 쳐서 바로 그쯤 그러니까 도농으로 바뀌는 길목에선 상황이었다. 골목길이 생기고 나서 전봇대 집이 생겨났고 쌀가게 연탄집 같은 여러 잡화에 구멍가게도 생겨나고 만화가게도 들어섰다. 아이들이 꼬이고 저녁나절 술판이 벌어지는 그 어디쯤에 대포집도 생겨나고...

2-2 신작로길 2
하지만 당시에는 신작로라 해서 도로망이 갖추어진 것 일뿐 포도(鋪道)가 된 상황도 아니고 그냥 동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휑하니 큰 길이 났을 뿐이다. 그 바람에 아버지가 다니는 가축위생연구소(현 수의과학연구원) 와 임업시험장이 두 동강이 나 별도로 담을 친 형상을 했을 뿐이다. 지금의 명학 역 주변은 아름드리나무들이 무성한 임업시험장 터인데 그 좋은 나무들은 온 간 데가 없고 지금은 빽빽이 아파트가 들어차 당시를 상상조차 할 수 없이 되고 말았다.
그 시절을 떠올리며 말을 하다보면 사람들은 그래도 안양은 문명이 트인 곳이라고 말을 한다. 흔한 말로 깡촌이라고 하는 산하가 그 당시는 우리네 대부분의 삶이었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70%가 농업에 종사하던 때로 당시 우리집을 발판으로 서울로 진출하려는 친척들이 줄을 서 대기 중이었으니 말이다. 인구 2만에서 50만으로 급팽창을 한 도시는 우리나라에서 뿐 아니라 지구상에서도 몇이 안 될 노릇이다. 그만큼 안양은 하루가 다르게 변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신작로가 갖는 의미는 대단한 것이다. 태초에 아예 길은 없었다. 필요에 의해 다니며 길은 생긴다. 하지만 길이 길다워지는 것은 이쪽 저쪽을 잇는 문명이 대량으로 파급되어야 만이 비로소 가능하다. 바로 그 냇가에 콘크리트 다리가 놓였다. 그로 큰 길로 오가는 문물이 늘어나고 팽창에 팽창을 거듭하여 순식간에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로 또한 동네는 인구가 불어 늘어나는 것이 골목길이다.
사람이 들끓지 않는다면 골목길은 생겨나지 않는다. 골목길은 어쩔 수없이 겨우 생겨난 길 이어서인지  찌든 때의 궁상과   코흘리개  채취가 더덕더덕 묻어난다. 집집이 뒷깐 때문 여간한 문제가 아니었던 그 시대, 너도 나도 돈을 벌기위해 지하이든 단칸방이든 얹혀서 살던 삶의 애환이 그대로 묻어나는 길이다. 전세 월세에 사글세란 말 표현은 골목길에서 생겨난 도심에 사는 소시민의 한 모습이다. 주인집 위세가 만만하지 않던 때 골목길을 차지한 대부분은 바로 그런 시골뜨내기들이었다.
마을길이 끊기면 마음의 길이 열린다는 말이 있지만 그 말은 첩첩산중의 마을에서의 적막함을 이를 때 하는 말일 뿐 삼척동자로 살던 그들이 도심으로 향하는 길목에선 이별의 명암속에서 눈물바람이 먼저였다. 아마 안양도 이에는 어김없이 한 몫 하였을 것이다. 맨 몸으로 야간열차를 타고 엄마가 삶아준 달걀을 눈물로 삼키며 무작정 상경했다는 말들이 그 시절에는 그렇게 흔했다. 나는 그 무렵 태어난 것이고 그러기에 나는 전원적인 풍경은 전혀 알지 못한다.
기껏해야 포도밭과 보리밭 사이로 거닐던  한 때의 기억이 전부이다. 그래도 학교 아래 편 시내와는 달리 내 살던 곳은 빈터가 많아 밭을 일구고 닭이나 돼지를 키우는 가정들이 제법 많았다. 우리집도 닭장을 두고 감자와 콩 같은 작물을 재배하였다. 안양에 포도밭하면 알아주던 시절 덕분에 나는 지금도 군청색 포도의 달콤함을 그대로 낱낱이 기억하고 있다.
그로 나는 달착지근한 설탕을 버무려 만든 포도주만을 사랑하여 지금도 시큼하며 쓴듯 맛스럽다는 프랑스 제 외인 맛을 정녕 거부하고 있다. 당시 포도밭 이름 몇을 기억하는데 그중 지금도 잊지 않는  이름은 ‘마스컷 포도원’이란 이름이다.  이름치고 특이한 게 그 뜻을 몰랐다. 단지 외국에서 수입한 특산이란 생각만 했는데  요즘 그 기억을 되살려 알아보니 마스컷 오브 알렉산드리아 라는 종으로  쉽게 말해  청포도를 말하는 것이었다.
지금 그 신작로는 일번 국도를 제치고 안양이라는 거대도시의 중심을 관통하는 안양대로가 되었다. 분명히 신작로는 문명의 첨병이다. 문명세계에서 필요는 빠른 시간을 전제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기에 그 길은 미루나무 마냥 쭉 뻗어 있으며 문명에 편리하도록 반듯하다. 문명 길에서는 길이 끊기면 황량함이 되고 말 것이다. 이후로 나는 신작로를 만드는 무수한 광경들을 우리나라 곳곳에서 보았다. 촌로들은 바깥세상을 기웃이라도 할 양으로 으레 신작로 길 초입의 구멍가게 평상에 앉아 문명 길에 펼쳐진 광경들을 쳐다보곤 한다.
하지만 아이들에게 신작로는 그다지 중대하지도 필요하지도 않다.  아이들에겐 당연 골목길이 우선이다. 골목은 세상의 전부이고, 골목 안에서 모든 것이 다 통하고 골목대장도 탄생한다. 속절(俗節)을 나누고 정을 쌓으며 생활을 품앗이하는 골목길 . 그러기에 고샅이나 골목은 마을사람의 삶과 이야기가 고스란히 밴 애틋한 길이다. 하지만 밀려드는 문명은 고샅으론 만족할 것이 아니다. 신작로가 동네를 가로지르며 고샅의 정감을 미련 없이 밀쳐 내자  인위적으로 갈라진 동네는 예전같이 더 이상의 왕래도 정감도 없었다.
그쯤 나도 좁은 골목길에서 벗어나 신작로 길에 올랐다. 신작로는 시간을 따른다. 그 길을 통해 학교를 가고 장터를 가고 도회지로 나간다. 신작로는 빠르게 오가는 통로일 뿐 느긋하게 거닐거나 이웃을 살피거나 도란도란 얘기를 나눌 수 있는 골목길이나 고샅길 같은 길은 아니다.
하지만 당시의 신작로는  그래도 내게는 거리의 잡화상처럼 흥미로운 길이었다. 시내로 향하는 신작로는 널찍하여 오고갈 많은 것들이 있었으며 훤하여 보기에도 좋았다. 아이들은 시발택시가 먼지를 날리고 지나가면 그 먼지 속으로 달려들어 다른 세상을 맛보듯 휘발유 냄새를 맡곤 했다. 나의 창은 바로 그 신작로였다. 그곳을 지나치는 것은 무엇이든 새로웠다. 분명 이는 큰 세상으로의 발 돋음이었다. 그 길에서 새로운 문물을 터득한 셈이다.
마차는 말할 것도 없고 꽃상여도 그 길에서 보았으며 소몰이꾼도 그 길에서 보았다. 색종이를 알록달록 붙인 시발택시 타고 시집가는 풍경도 그 길에서 보았다. 그 길은 안양의 살림밑천이었다. 나무를 짊어지고 시흥에 내다파는 노인하며 보따리 행상에 사내들 일 깜은 늘 그곳을 통하였다. 신작로 빈 공간 한편에서는 연탄도 찍고 흙벽돌도 만들었으며 하다못해 성 나자로 병원이라 하여 근처에 문등 병 환자 수용소가 있었는데 그들 또한 그곳을 통하여 구걸을 하러 돌아다녔다.
나의 누나 또한 그 길로 걸어들어 왔고 그 길을 통하여 멀리 시집을 갔다. 먼지 풀풀 날리던 그 시절의 신작로 길, 그렇게 나는 그 길에서 골목에서 터득하던 정감과는 아주 다른 세상 물정을 배웠다. 그곳에 검은 도포가 씌워질 무렵부터 안양의 사람들은 더 이상 순박한 처지는 아니었다. 흡사 질주하는 차들의 느낌으로 변하여 그 신작로를 통하여 떠났다.
이후 그곳을 스쳐 지나지만 별반 갖는 느낌도 없는 무감한 8차선 대로가 되어버렸다. 분간이 흐릿한 뽀오얀 안개 길을 가노라면 스미듯 마치 예전의 단 맛 나는 구불구불한 골목을 접어드는 기분은 여전하다. 하지만 더 이상은 문명이란 명분으로서도 그 굽이쳐진 정감은 이제 정녕 돌아오지 않으리라. 뽀오얀 먼지를 일으키던 그 신작로도 시간을 쫓아 기억조차 흐릿한 아득한 먼 안개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초가을 안개가 몰려들어 몽연하기만 한 오늘 먼지 폴폴날리며 그 신작로 길을 따라 멀리 시집간 누나가 마치 먼 미지로 떠난 양 자꾸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이 글을 쓴 조성원(어릴적 이름 조형곤)씨는 1957년 안양에서 태어난 안양초교 38회, 안양중학교 23회 졸업생으로, 저하고 동창으로 오랜 기간 대덕 모 연구소에 근무하고 있지요. 블랙죠라는 이름을 글을 쓰다가 수필가로 등단해 현재는 한국수필가협회와 수필문학가협회에서 이사직으로 적극적인 문단 활동을 해오며 제2회 문학저널 창작문학상과 수필문학사가 주관한 제1회 소운문학상을 수상도 했는데 첫 번째와 두 번째 수필집인 ‘빈 가슴에 머무는 바람 1&2’이외에도 ‘송사리 떼의 다른 느낌’, ‘작게 사는 행복이지만’, '‘오후 다섯 시 반’ 등 7권의 수필집을 내놓었으며 ‘2천 년 로마 이야기’와 ‘스페인 이야기’ 등 여행 에세이집도 발표했고 최근에는 역사에세이 '고구려 9백년의 자취소리'를 펴냈는데 인기몰이를 하고 있지요. -편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