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지역얘기/담론

[임병호]이승언 선생에 관한 추억

안양똑딱이 2016. 7. 24. 16:37
[임병호]이승언 선생에 관한 추억

[2010/10/12 경기일보]경기일보 논설위원

 

이승언 선생에 관한 추억

2002년 1월20일 타계한 향토사학자 이승언(李承彦·본명 이한기) 선생은 지독한 자료 수집가였다. 생전의 그는 자료 수집에 따른 희열과 그 순간의 성취감을 큰소리로 웃으면서 자랑스럽게 언급한 적이 많았다. 필요한 자료라고 판단되면 수중에 넣을 때까지 그 어디라도 전화를 걸거나 직접 방문, 자료를 발간한 기관의 담당자나 개인 소장 인사를 난감하게 만든 적이 수없이 많았다.

매번 ‘미친 놈’ 소리를 들어가면서도 자료 확보에 대한 욕심은 끝없이 이어졌다.

그가 수집·소장한 자료는 멀리는 조선후기의 읍지류, 고문서, 교지 등을 비롯해 근·현대시기엔 시·군지, 읍·면·동지, 지명유래집, 금석문집, 보고서, 문화유적 관련 책자, 지도류 등 4만여점에 이른다. 한 개인이 수집했다고 보기에는 도저히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방대하다. 더구나 자료 내용을 거의 다 숙지하고 있어 ‘걸어다니는 백과사전’으로 불렸다.

1945년 4월10일 시흥에서 태어난 그는 ‘왜 안산(安山)이어야 하는가’(1984년), ‘의왕의 전통과 문화’(1992), ‘시흥의 문화재와 유적’(1995), ‘시흥의 인물과 행적’(1995), ‘시흥의 생활문화와 자연유산’(1995), ‘한말·일제하 수원기사색인집’(1996), ‘안양시 지명유래집’(1996), ‘연표로 보는 군포 역사’(2000) 등 많은 저서를 출간했다.

‘안양의 유래’ ‘안산시 지명유래’ ‘수원화성행궁자료에 대하여’ 등 학술 강연과 논문도 상당수에 이른다. 특히 타계하기 한 달 전 자신이 작성한 ‘이한기 연보’는 그의 경력, 저서, 향토사 논문, 향토지 발간 주관(主管), 학술발표, 학술토론, 강연, 유물·유적 발견 및 문화재 지정, 일제(日帝)지명 바로잡기, 학교 교명 작명, 초등학교 향토교재 감수, 전적(典籍) 발굴, 서화·초상·사진 발굴, 전통민속놀이 고증·발굴·지도(指導), 소장품 전시·상훈·공로패·공로장, 금석문 탁본 및 전시, 문화유적비 건립, 향토문화제 작명, 행정지명·도로명 작명 및 자문, 아파트 마을명 작명, 전철역사명, 전철역사 내 벽화 설치 및 고증, 전철역명 유래문 설치 및 문안 작성까지 소상히 기록했다. 그의 활동이 그대로 비문처럼 음각됐다. 자신의 운명을 예감한 듯 일생의 족적을 미리 남겼다.

1989년 발족돼 오늘날 수원화성행궁 복원의 기틀을 마련한 ‘수원화성행궁복원추진위원회’의 초기 활동 시 그는 조사편찬부장을, 기자는 기획부장을 맡았던 인연으로 많은 것을 배웠다. 특히 융릉(사도세자 능) 벽화에 ‘사신도(四神圖)’가 있음을 규장각에서 찾아낸 집념은 실로 대단하였다. 덕분에 경기일보가 그 사실을 처음 보도하는 특종의 기쁨을 누렸다.

급작스럽게 유명을 달리한 이승언 선생을 지난 6일 공주대학교에서 열린 학술세미나 ‘지역문화의 버팀목, 향토사가(鄕土史家)의 생애’에서 만났다. 공주향토문화연구회·충남향토사연구협의회가 주최한 학술대회에서 주혁 한양대 교수(경기향토사연구협의회)가 <‘자료’에 미쳤고 ‘수집’에 열정을 바친 ‘자료 수집 대왕’ ‘향토사료 수집광 이한기의 생애>를 소상하게 추모했다. 오산 야외에서 지석묘(支石墓)를 발견하고 막걸리를 마시며 소탈하게 웃던 그의 모습이 떠올라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었다. 수원에선 ‘기전(畿甸)향토문화연구회’ 이창식 회장과 김훈동·임병호·신금자 연구위원이 참석했다.

향토사는 지역사·국사·민족사의 모체요 뿌리다. 곧 모든 역사의 콘텐츠다. 전국 각처에서 향토사연구에 ‘미친’ 사람들이 모인 ‘향토사가의 생애’에서는 이승언 선생을 비롯한 청재 강수의·춘강 김영한·월당 윤여헌 선생의 생애가 재조명됐다. 흘러간 강물 같은 역사를 만나기 위해 하구(河口)에서 기다리는 향토사가들은 고독하다. 그러나 나그네의 지친 발길을 쉬게 해주는 뱃사공 같은 사람들이다. 밤바다의 항로를 밝혀주는 등대불빛 같은 사람들이다.

한국향토사연구전국협의회 제23차 전국학술대회가 이틀간 개최된 공주에서 1400년 전의 백제가 부활한 ‘2010 세계대백제전’이 열리고 있었다. 백마강이 옛날처럼 흐르고 있었다.

임 병 호 논설위원

2010-10-11 21:48: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