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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325]잊혀진 독립운동가, 의왕 하우현성당 윤예원 신부

안양똑딱이 2025. 3. 25. 20:52

르베르트 베버, ‘하우현성당 남교우들’, 유리건판, 1911년 3월, 경기도 하우현,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구한말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의병항쟁을 비롯해 많은 민족해방운동이 일어났을 때, 한국 천주교회의 인사들 가운데도 의분을 참지 못해 독립운동에 참여한 이들이 많았다. 그들은 평신도를 비롯해 사제와 신학생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나타났다. 하지만 이들은 대부분 이미 친일로 돌아선 교회지도부의 거부로 종교적-정치적 어려움을 겪었다.

 

1919년 3.1만세운동 당시 독립선언문을 읽은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천주교 신자는 없었지만, 천주교인 역시 겨레의 독립을 바라는 마음은 한결같았다.

 

당시 천주교회의 주교들은 한결같이 민족의 거사였던 3.1운동을 단죄하였다. 뮈텔 주교는 “우리 천주교 신자들은 이 운동에 가담하지 않음으로써 기존 정부에 대한 충성의 모범을 보였다.”고 하였으며, 대구 교구장이던 드망쥐 주교는 “일본 정부는 합법적 정부이므로 우리 가톨릭은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바쳤다”는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사실상 교계제도로 꽉 짜여진 한국천주교회를 주도하던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독립운동을 단호히 금지하는 상황에서 신자들의 독립운동 참여는 매우 어려웠다. 

 

한국인 사제 가운데 민족운동에 협조적이거나 적극 침여한  분들도 있었다. 풍수원성당의 첫 한국인 사제였던 정규하 신부(1863-1943)는  1910년 고종의 아관파천(俄館播遷) 이후 일제에 항거하는 의병운동이 일어났을 때, 일본군에 쫓겨 풍수원성당으로 피신한 의병들을 도와주었다. 그리고 성당 사랑방을 빌려 이 의병들과 본당 신자들을 모아 삼위학당(三位學堂)을 설립했다. 이때 교사로 충남 논산에서 박 토마씨를 초빙하여 한글과 한문, 수학 등 신학문을 가르쳤다. 특히 역사 교재로 <월남망국사>를 채택, 베트남의 예를 들어 독립의 꿈을 키웟다. 하지만 오래 가지 않아 이 교재는 일본 관헌에 압수당하고, 박 토마는 옥고를 치러야 했다. 

 

안학만 신부(1889~1944)는 용인의 압고지성당에서 본당사목을 하다가 일부 신자들의 모함으로 성무집행을 정지당하자, 이 처분의 부당함을 원 라리보 주교에게 전하고 1930년 만주로 떠나 1937년까지 독립운동을 하다 총상을 입고 귀국한 경우도 있다.

 

윤예원 신부(1886~1969)는 황해도 은율성당 본당신부인데, 상해 임시정부에서 파견한 임 빌리버라는 청년을 만나면서 독립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 사실이 뮈텔 주교에게 알려지면서 경고를 받았으며, 문책성 인사로 경기도 하우현성당으로 옮기게 되었다. 그후로도 윤예원 신부는 1925년 고향인 부여의 땅을 팔아서 성당 아래에 ‘애경강습소’라는 이름으로 학교를 지어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윤예원(1886~1969) 신부는 한국인으로서 23번째로 성직자가 된 인물로서 갑신정변이 일어난지 2년후가 되는 1886(고종 23) 충남 부여군 구룡면 금사리에서 순교자의 후손인 윤정두의 52녀중 3남으로 탄생하였다. 13세가 되는 1898(광무 2) 기낭 신부의 추천으로 용산 예수성심 신학교에 입학하였으며, 191437일 사제서품을 받았는데, 윤 신부가 사제서품을 받은 1914년은 대한제국이 일제에 의하여 국권을 잃은지 4년후가 되는 시점이다.

 

신부가 된 이후 최초로 부임한 곳이 황해도 은율 본당신부인데, 이때부터 천주교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 신부로 활동하였던 윤예원 신부의 본격적인 사목활동이 시작된 것이다.

 

윤 신부가 은율 성당에 부임한 이후로부터 5년후에 3.1운동이 발생하는데, 시위에 직접적으로 가담한 증거는 없으나 윤 신부의 평소 성향으로 미루어 볼 때 간접적으로나마 신자들의 시위를 독려하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윤 신부가 본격적으로 항일운동 대열에 참가하게 된 계기는 상해임정에서 파견된 임 빌리버라는 청년과의 만남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임 빌리버는 상해임정에서 설립을 인가한 대한적십자회(大韓赤十字會)의 회원으로서 조선에 파견된 것으로 짐작되는데, 구체적으로 191910월 황해도 매화동 본당에서 사제회의가 열렸을 때 윤 신부에게 상해임정에서 천주교 신자들에게 적극적인 독립운동 참가를 촉구하는 권고문 500부를 전달하며, 이어서 적십자운동의 동참을 권유한다.

 

이러한 임 빌리버의 권유를 받아들인 윤 신부는 이제 천주교 성직자로서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의 대열에 동참하는데 구체적으로 상해임정 권고문 500부를 주위에 배포하는 활동을 하였다.

 

이러한 윤 신부의 항일운동이 결국 여러경로를 통하여 당시 조선천주교회의 최고 지도자라 할 수 있는 프랑스인 출신 경성교구장(京城敎區長) 뮈텔 주교가 알게 되면서 제약을 받게 되었다. 윤 신부는 성직자로서 주교에게 순명하는 자세를 취하며, 앞으로 이런 활동을 하지 않겠다고 맹세하나, 이런 윤 신부의 의사를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았던 뮈텔 주교가 19206월에 황해도 은율본당에서 경기도 하우현 본당으로 전임시키니 이는 사실상 윤 신부에 대한 문책성 인사라고 볼 수 있다.

 

하우현 본당 신부로 있던 윤 신부가 뮈텔 주교로 부터 문책성 인사를 당하였지만, 조국을 사랑하고 민족의 고통을 함께 하려는 그 애국심이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었으니, 그 구체적인 예를 세가지 제시한다.

 

첫째. 1925년 고향인 부여의 땅을 팔아서 성당아래에 학교를 지으니 바로 이 학교가 애경강습소인데, 이는 겉으로 보기에 교육기관으로 볼 수 있으나, 윤 신부의 의도는 바로 이런 교육을 통해서 신자들에게 직접적인 독립운동은 하지 못하나, 간접적으로나마 민족의식을 계속 고취하려는 의도가 있었을 것으로 보며, 이는 겉으로 뮈텔 주교의 방침에 순명하면서 도 한편으론 윤 신부의 입장에서 할 수 있는 항일운동의 대안이었다고 볼 수 있다.

 

둘째. 애경강습소를 설립한 이듬해인 1926년에 한 공소에서 경찰에게 소환되어 강습소와 독립군과의 연관성에 대하여 조사를 받았으며, 당시 윤 신부의 서한을 압수하였다고 하니, 이것으로만 미루어 보아도 애경강습소는 단순한 교육기관이 아니었다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셋째. 광복을 불과 얼마 앞두고, 강원도 대화본당 주임신부로 재임할 당시 미사 강론중에 경찰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히로히토 일왕을 귀머거리,소경이라고 언급한 것이 문제가 되어 1주일간 투옥된 바가 있다.

 

이러한 세가지를 미루어 보아도 상해임정 군자금 사건이후 은율본당에서 하우현 본당으로 전임된 윤 신부의 항일운동이 예전같이 적극적으로 전개된 것은 아니었지만 그 근본적인 정신은 계속 계승되었다고 볼 수 있다.

 

윤 신부는 부산 구포 본당신부를 끝으로 1968년 은퇴하여 충남 부여군 외산면 만수리 공소에서 요양중에 병세가 악화되어 결국은 196957일 대전성모병원에서 향년 84세를 일기로 선종(善終)하였다.

 

[가톨릭일꾼]

일제 잔재 청산을 위한 한국천주교 신앙인의 고백과 다짐 (초안 전문)

함께 걷는 예수의 길 승인 2024.09.06. 16:17

http://www.catholicworker.kr/news/articleView.html?idxno=6352

 

[박철하]1800년 전후 신자들 모였던 의왕 하우현성당 이야기

https://ngoanyang.or.kr/10034

 

[20240116]의왕 하우현성당 톺아보기(2009.07.17.)

https://ngoanyang.or.kr/8640

 

[20230208]1935년 의왕 청계동에 있던 성현서당

https://ngoanyang.or.kr/7428

 

[20230208]의왕 하우현성당 윤예원신부의 독립운동

https://ngoanyang.or.kr/7423

 

[20230208]1894년 초가집 형태의 의왕 하우현본당 초창기 모습

https://ngoanyang.or.kr/7421

 

[20191123]독립.민주.인권을 만나는 지역역사탐방(의왕.과천)

https://ngoanyang.or.kr/5510

 

[의왕]100년 역사의 흔적이 있는 하우현성당

https://ngoanyang.or.kr/2312

 

[브레이크뉴스]잊혀진 독립운동가 윤예원 신부의 항일운동

박관우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15/10/12 [09:26]

https://www.breaknews.com/sub_read.html?uid=400487§ion=sc11

 

[의왕문화 창간호]

윤예원신부와 애경강습소

리진호(시인, 우물지적박물관장)

http://archive.uwcc.or.kr/bbs/board.php?bo_table=0301&wr_id=33&page=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