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보따리/자료

[20240116]의왕 하우현성당 톺아보기(2009.07.17)

안양똑딱이 2024. 1. 16. 06:41

 

경기문화재단/ 경기그레이트북스 20

경기도 근현대 생활문화 III

양훈도 

 

의왕 하우현성당과 사제관 답사일 : 2009717

 

경기도 내 세 번째 본당

 

하우현성당은 경기도에 세 번째로 들어선 본당이다. 가장 먼저 설립된 성당은 갓등이본당(현 왕림본당, 성시 봉담읍 왕림리 252)으로서 18887월 지어졌고, 그 다음은 18964월 지어진 미리내본당(안성시 양성면 미산리 141)이다. 갓등이본당의 공소였던 하우현성당은 19009월 샤플랭(Chapelain, 한국명 채시걸) 신부가 부임하면서 정식 본당이 되었다.

 

그러므로 하우현성당은 본당 승격 110주년을 1년여 앞두고 있다. 현재 성당 자리에 교회당 건물이 지어진 것은 이보다도 6~7년 더 거슬러 올라간다. 189310월 갓등이본당의 주임신부(알릭스Alix, 한국명 한약슬(韓若瑟))가 공소를 순방하고서 건축비 150냥을 건축비로 내놓았다. 이에 신도들1,500냥을 모금하여 18945월 초가 목조 강당 10칸을 완공하였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하우현성당의 현재 지번은 의왕시 청계동 210번지, 의왕에서 성남으로 넘어가는 하우고개 밑이다. 청계산 자락에 둘러싸인 오지라 할 수 있다. 그렇다, 어째서 이런 외진 곳에 그렇게 일찍이 성당이 들어설 수 있었을까. 그 기원1800년대 초반까지 소급된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순교한 한덕운韓德運이 홍주에서 여기서 멀지 않은 현 의왕시 학의동으로 이주하여 살다가 체포되었고1845년엔 이곳 하우현에 살던 김준원金俊遠이 광주 포졸에게 붙잡혀 남한산성에서 순교하였다고 한다. 물론 정확히 언제부터 이곳에 천주교인이 얼마나 정착했는지는 알 수 없. 하지만 위 두 사례는 하우현 일대와 고개 너머 묘론리(묘루니· 현 성남시 분당구 운중동) 등지에 천주교인들이 박해를 피해 숨어 살았음을 짐작케 한다. (지금이야 하우고개를 경계로 이쪽은 의왕, 저쪽은 성남으로 나뉘었지만 원래 양쪽 다 광주(廣州) 땅이었다. 계동이 속한 광주군 의곡면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광주군 왕륜면과 통합되어 수원군 의왕면으로 바뀌었다.)

천주교인들이 이 일대로 몰려든 까닭은 이곳이 교통의 요충지이자 오지라는 얼핏 모순된 지리적 여건 때문으로 추정된다. 교통 요충지라 함은 하우현성당이 자리 잡은 원터마을이라는 지명이 말해준다. 원터는 동양원東陽院이 있었던 자리라는 의미다. 동양원은 제물포--여주를 잇는 간선로에 설치되었던 조선시대 역원 가운데 하나다. 따라서 내왕이 쉬운 곳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지세는 험하다. 청계산 골짜기에 들어가 숨으면 좀처럼 찾아내기 어려웠을 것이다. 실제로 하우현성당에서 1.5가량 떨어진 곳에 토구라는 지명이 지금도 남아있다. ‘토구리는 신자들이 토굴을 파고 많이 살았다 해서

토굴리라 한 것이 현지발음화한 흔적이다.

하지만, 하우현 공소를 본당으로 승격시킨 결정적인 계기는 베르나르-루이 볼리(Bernard-Louis Beaulieu) 신부의 순교다. 1840년생인 볼리외 신부는 프랑스 랑공 지역 출신으로서, 1865년 사제 서품을 받은 후 조선으로 자원해서 부임했다.

25살 젊은 신부는 세계에서 가장 어려운 곳으로 가겠다는 사명감에 충만해 있었다고 한다. 1866년 우리말을 배우며 광주 일대에서 포교활동을 하던 볼리외신부는 그해 발생한 병인박해를 피해 묘룬리 쪽 바위굴에 숨었으나 체포되었으며, 새남터에서 순교했다. 조선에 온 지 9개월 만이다.

볼리외 신부는 1984년 성 루드비코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루드비코 성인은 병인박해로 순교한 103위 성인에 포함된 외국인 선교사 12인 가운데 한 분이며, 그중에서도 가장 나이가 어린 분이었다. 이후 조선과 프랑스가 국교를 맺, 천주교 박해도 사라진 후 프랑스 선교사들이 이곳 하우현 일대에 성당을 세우기로 결정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갓등이본당 소속 공소 가운데는 이곳 하우현공소의 신자 수가 가장 많았다는 점도 본당 승격 결정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된다.

 

루드비코 성인이 잡힌 곳은 저 고개 너머 국사봉 8부 능선에 있습니다. 기서는 약 5쯤 가면 됩니다. 이 일대를 하우현 성지라고 합니다. 하우현성당은 성지의 중심점에 해당하지요. 그러니까 하우현성당은 프랑스 선교사들이 세

운 기념성당인 셈이지요.”

 

20069월 하우현성당 주임신부로 부임한 정광해 시몬 신부는 죽음을 각오하고 이 땅에 온 루드비코 성인이야말로 한민족을 사랑한 선교사라고 강조했다. 하우현성당의 첫 본당 신부로 일컬어졌던 루드비코 성인은 순교한 지 116년이 지난 1982정식으로 하우현성당 주보 성인으로 모셔졌다.

 

경기 남동부의 친정성당

하우현본당은 설립 당시부터 관할구역이 넓었다. 묘루니, 둔토리, 하우현 등은 물론이고, 광주와 용인, 과천, 군포, 시흥

지역까지 본당 관할이었다. 소속된 공소16개나 되었고, 1,100명이 넘는 신자를 돌보았다. 숨어 사는 가난한 천주교인들의 영적 고향이었던 하우현본당은 이후 후손들이 서울의 용산, 영등포, 구로, 시흥, 안양, 군포, 성남 등지로 분가하면서, 여러 본당의 모태가 되었다. 그러므로 하우현본당은 여러 본당친정성당이라 할 수 있다.

 

하우현본당은 1900년 본당 승격과 더불어 사제관을 신축하고 교세를 확장하였다.(사제관은 다음 절에서 상술한다.) 1903~1904년에는 본당에 학교를 설립하여 운영하기도 했다. 1914년에는 윤예원 토마스 신부가 주임신부로 부임하여, ‘성신강습소를 개설하고, 성당 초가지붕을 함석으로 교체했다. 그러나 성신강습소는 1923년 폐쇄되었다.

 

하우현본당은 한국인 최초의 주교였던 노기남盧基南 대주교(1902~1984)도 인연이 있다. 노 대주교는 신학생이었던 1923년 하우현성당에 와서 방학을 보내면서 어린이들을 가르쳤다고 한다. 은신하기 좋은 하우현성당의 위치는 6·25 때도 여러 목숨을 살렸다. 당시 10명의 신부와 5명의 수녀, 그리고 많은 신도들이 하우현성당에 숨어 지냈다고 한다.

 

그러나 하우현성당이 지난 110년 동안 본당의 위상을 고수한 것은 아니. 1930년 이후 교세의 부침에 따라 안양이나 군포 본당의 공소로 격하되었다가 복원되기를 반복하였다. 본당으로 다시 승격되어 확고히 자리를 잡은 것은 1978년이다. 이해에 부임한 파 레이몬드 신부는 한국천주교회사에 각별한 관심을 갖고, 하우현본당의 초대 주임신부와 다름없는 성 루드비코 성인의 행적을 정리하기도 하였다.

 

오늘날의 하우현본당이 지어진 해는 이보다 앞1965년이다. 김영근 베드로 신부 주도하에 미군부대가 건축자재를 원조하고, 신도들이 동참하여 지금과 같은 아담한 교회가 세워졌. 본당은 대지면적 3,273에 연면적 388. 교세가 위축된 공소 시절에 지어졌기에 화려한 고딕 성당을 지향하지 않고 소박한 회당의 형식으로 지어진 듯 하다. 하지만 이후 본당으로 승격하고, 천주교 관련 행사가 활발히 이루어지는, 중요한 성당으로 발돋움하였다. 게다가 하우현성당이 교회사에서 차지하는 위상뿐만 아니라 지역의 근현대사를 증언해주는 건물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본당 건물 자체도 근대문화유산으로서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된다.

 

우리는 교세를 크게 성장시키기를 원치 않습니다. 지역에 한 세기 넘게 뿌리박은 성당으로서, 한국천주교의 중요한 성지 가운데 하나를 지키는 성당으로서 그 사명을 다하는 데 주력하고자 합니다.”

 

정광해 신부에 따르면 120명쯤 되는 하우현성당 신도는 현재 3개 마을(원터마을, 학현마을, 청계마을) 주민이 대부분이다. 성당이 자리한 원터마을은 주민 90%가 신자이고, 청계사 주변 마을을 지칭하는 청계마을은 절반 정도가 신자다. 성당에는 정 신부 외에 2명의 수녀가 있다.

 

하우현성당은 구호중심의 선교 전통으로도 유명합니다. 예를 들어 소작 문제가 심각했던 일제시대에는 프랑스의 후원금을 받아 대지주의 땅을 매입해 낮은 소작료로 인근 농민들에게 도지를 주었다고 해요. 구전으로는 성당 일대 땅이 모두 성당 소유였다는 설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 구전을 입증해 줄 기록이나 구체적 증거는 찾지 못한 상태다.

 

-불 문화의 만남, 하우현성당 사제관

하우현성당 사제관은 본당으로 승격하던 1900년에 지어졌다. 일부 기록에는 1906년으로 되어 있으나 교회사 자료를 종합해 볼 때 1900년이 확실한 듯하다. 정광해 신부도 1900년이라고 단언했다. 성당 오른쪽에 자리 잡은 사제관은 프랑스식 석조 벽체에 한식 기와를 올린 아름다운 건물이다. 한식과 프랑스식을 조화롭게 절충한 사제관은 -불 문화의 만남을 상징한다.

 

사제관의 모습은 프랑스 선교사들의 인식 전환을 보여줍니다. 초창기 조선에 들어온 선교사들은 백인우월주의와 제국주의적 인식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성당들은 그러한 문화적 의식의 소산이지요. 그러나 이 사제관을 설계한 프랑스 신부는 천주교의 토착화를 고심했던 것 같습니다. 그 결과 현지 문화를 재평가해서 받아들인 것이지요.”

 

정광해 신부는 사제관의 건축사적 의미에 앞서 문화사적 의미가 더 크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1900년을 전후한 시기에 지어진 성당과 사제관은 한옥 아니면 서양식이었다. 이 사제관처럼 서양 생활양식과 전통적인 문화를 살려 지은 예를 찾아보기 힘들다. 이 사제관은 우선 정면에 넓은 돌계단을 두었다. 계단을 올라서면 정면 3, 측면 2(연면적 137)이다. 벽체는 면을 다듬은 자연석을 허튼층으로 쌓고 백회줄눈을 넣었다. 기단은 경사를 이용해 전면은 2m 정도로 높지, 후면은 뒷마당과 거의 차이가 나지 않는다. 벽체는 외풍을 이겨낼 수 있도록 두껍게 쌓았다. 그리고 지붕은 골기와 팔작지붕을 얹었다. 건물 사면에는 퇴를 두었다. 사면 퇴에는 원뿔대형의 높은 초석을 놓고 그 위로 각이 진 나무기둥을 세워, 회랑처럼 꾸몄다. 창에는 나무 덧문을 두었다. 왼쪽 측면에는 지하창고로 통하는 입구가 있고, 그 위를 널빤지로 덮었다. 기둥을 놓은 방식은 한옥양식이고, 나무 덧창이나 후면 굴뚝은 서양식이다. 그러나 두 양식은 잘 어우러져, 한옥의 분위기와 프랑스 주택의 분위기를 동시에 풍긴.

 

몇 해 전 프랑스 대사관 초청으로 사제관을 방문한 프랑스 청년들이 고향집에 온 기분이라고 하더군요.” (정광해 신부)

 

내부 공간은 현재 사제관으로 쓰이지 않는다. 예배자 교리실, 회의실, 고백소 등으로 활용된다. 처음부터 공간 가변성을 살릴 수 있도록 설계된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내부 마감과 창호 등은 초창기 모습에서 다소 변형된 것으로 추

정되지만, 전체 구조는 원형을 잘 간직하고 있으며, 부재의 상태도 양호하다. 제관은 2001년 문화재 가치를 인정받아 경기도 기념물 제176호로 지정되었고, 2003년 경기도에서 일부를 보수, 복원하였다.

 

하우현성당의 희망사항

주변 정비와 보완 계획이 필요합니다. 지금은 손대지 말라.’가 전부거든요. 문화재로 지정은 받았지만, 지금은 소방서에서만 관심을 가질 뿐 누구도 돌아보지 않아. 특히 건축학적 의미든, 문화사적 의미든 학술적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게 서운합니다.” 정광해 신부는 문화재로 지정하고 보존만 하는 게 능사가 아니지 않느?”고 반문했다.

 

하우현성당은 사제관이 문화재가 된 후 건축법상 심한 규제를 받았다. 현재 사제관 오른쪽에 지어진 사무실과 쉼터를 만드느라 마음고생이 심했다고 한다. 화장실도 지금은 정비되어 있지만 예전엔 푸세식이어서 불편했다는 것이다. 정 신부는 규제만 할 뿐 더 이상 노력하지 않는 당국을 이해하기 힘들다고 했다.

 

역사를 보존하는 이유는 자신을 알기 위한 것이지요. 근대화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전통문화가 상실되었습니까? 천주교가 들어온 역사가 곧 이 지역 근대사 아닙니까? 그 역사를 정리해야 합니다. 아울러 사제관의 역사적 의미를 알리고 활용하는 프로그램이 아쉽습니다. 그게 문화재를 지정한 근본적 이유 아니겠습니까?”

 

예를 들어, 루드비코 성인의 마지막 행적만 해도 당시 생활상을 잘 보여준. 그 무렵 하우고개 이쪽저쪽에서 신앙공동체를 이루었던 신도들은 화전을 일구고 옹기를 구워 생계를 유지했다. 그들은 나무열매와 보리로 연명하며 포졸을 피해 숨어 살기도 했다. 이 외진 광주의 벽촌에서 그들을 버티게 했던 신앙의 힘은 당시 의지할 곳 없던 백성들의 삶의 한 단면을 드러내 준다.

하우현성당이 겪었던 부침 또한 일제강점기의 수난, 6·25의 참상과 궤를 같이한다. 하우현성당과 사제관이 지역사에서 갖는 의미를 살려내려는 진정한 노력이 이제부터 시작되어야 할 듯하다.

 

| 도움말 주신 분 |

이종훈 의왕문화원 원장

정광해 하우현성당 주임신부

 

| 참고자료 |

의왕시·의왕문화원, 의왕시사, 2007

경기도, 경기도 근대문화유산 조사 및 목록화 보고서, 2004

http://www.paxkorea.kr/ (한국의 성지와 사적지)

의왕문화원 영상자료, 의왕 문화유적지를 찾아서,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