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의왕시 고천동 272-2번지 구 고천동주민센터 자리에는 의왕시청 별관이 있는데, 입구에는 눈에 띄는 표석이 하나 있다. 표석의 전면에는 사근행궁 터가 새겨져 있어 이곳이 과거 사근행궁(肆覲行宮)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행궁(行宮)이란 왕이 거동할 때 머무는 임시 궁궐로, 그 목적은 화성행궁(華城行宮)처럼 능행을 목적으로 하거나 온양행궁(溫陽行宮)의 사례처럼 온행, 남한산성행궁(南漢山城行宮)처럼 전쟁 시 피난 등의 다양한 목적이 있었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현륭원으로 옮기면서 수원에 새로운 성을 쌓아 도시를 형성하고, 수원에 이르는 경유지마다 행궁을 설치하였다. 모두 6개소의 행궁이 설치되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현 고천동주민센터 자리에 있던 사근행궁(肆覲行宮)이다.
사근행궁은 사근평행궁 또는 사근참행궁이라고도 불렸는데요. 사근행궁이 정조에 의해 건립된 시기는 1790년이다. 하지만 이미 이곳에는 임금이 쉬어가던 주정소(晝停所)가 설치되어 있었다. 의왕지역은 도성에서 삼남으로 이어지는 주요한 길목으로 교통의 요지였다. 조선시대 임금이 사근현(현 지지대고개)이란 높은 고개를 넘어 수원으로 가기 전에 쉬어가기에는 이곳이 안성맞춤이었다.
의왕문화원 부설 의왕지역문화연구소 박철하 소장이 정리한 자료(https://m.blog.naver.com/yesuw21/140186928030)를 보면 1624년 이괄이 반란군을 이끌고 서울로 들어오자 조선 16대 임금 인조는 이를 피해 남쪽으로 피신중에 이곳을 거쳐 사근현을 넘어 공주까지 이동한 바 있었다. 현종과 숙종은 수원군대의 훈련을 보거나 온양온천을 가는 길에 이곳에서 쉬어갔다. 1760년(영조36) 사도세자도 온양 온천에 가는 도중 ‘사근참 주정소’에 머문 적이 있다.
이후 정조는 당시 사도세자가 머물렀던 주정소의 옛터를 돌아보는가 하면, 인근의 백성들에게 구환곡 1년분을 탕감해주고 요역을 1년간 면제해주는 특혜를 주었다.
1789년 10월 6일 사도세자의 묘역을 천봉할 때 그의 영여(靈轝)는 과천을 출발하여 이곳을 지나 현륭원에 도착했다. ‘의왕시민의 날’은 바로 이에 기원을 두고 있다.
사근행궁을 설치한 정조는 화성에 거둥할 때마다 주필소로 이용했어요. 백운산의 끝자락에 위치해 오봉산을 바라보며 자리잡은 사근행궁은 정당을 중심으로 하여 앞쪽 남북(南北)로 각각 창고가 하나씩 배치되었고, 이외에 별당이 존재했다. 조선정부에서는 관리를 위해 감관 1명과 창고지기 1명을 두었다. 정당은 응란헌 이라 했는데, 그래서 사근행궁은 응란헌 주정소라고도 불렸다.
정조는 어머니 혜경궁 홍씨와 돌아가신 아버지 사도세자의 회갑연을 맞이하여 1795년(을묘) 대규모 원행을 했는데요. 김홍도의 지휘를 받아 당시의 상황을 그린「반차도(班次圖)」를 보면, 1,700여 명의 인물과 800필의 말들이 행진하였다. 이에 즈음하여 응란헌을 단장하고, 임금과 수행원들의 음식을 준비하기 위해 기존의 창고 건물을 각각 5칸짜리로 건물로 보수 확장하였다.
을묘원행 당시 정조와 혜경궁 홍씨는 새단장 된 사근행궁에 잠시 머물며 점심을 들었디. 정조는 이곳 이름의 한자를 ‘사근(沙斤)’에서 ‘사근평(肆覲坪)’이라 고치고 돌을 세워 표시토록 했다.
정조가 현륭원 원행을 자주 다녀오게 되면서 진창에 말발굽이 빠지던 사근행궁과 그 주변 길은 새 모습을 갖췄다. 이에 당시 좌의정을 지낸 채제공(蔡濟恭)은 “해마다 관리들이 사근행궁을 수리하여 천고의 좋은 이름 성은을 입었다”고 말했다고 한다.
행궁 주변에는 주막과 떡을 파는 가게도 생겼고, 인근의 주민들은 임금의 행차를 기다리곤 했다. 정조가 사근행궁을 지날 때 주민들은 격쟁(擊錚), 즉 직접 임금을 만나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기도 했다. 사근행궁 설치 당시 행궁의 모양과 규모는 자세히 알 수 없다.
박철하 소장은 1937년 3월 현재 의왕면사무소로 이용되던 사근행궁의 매각이 결정될 당시 규모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행궁의 대지면적은 272-2번지 680평과 272-3번지 70평 등 총 750평이었다. 당시까지 남아 있던 건물의 규모는 면사무소로 이용된 건물(응란헌으로 판단됨)이 22평, 창고(1) 8평, 창고(2) 6평, 면사무소 출입구의 좌우 방이 딸린 건물 14평 등이었다. 여러 원로와 고천초등학교 1회 · 2회 졸업생들의 기억에 따르면, 행궁의 입구는 삼문이었고, 정당인 응란헌의 규모는 8~10칸 정도였다고 한다.
일제는 대한제국을 일본에 강제합병한 뒤 1914년 지방행정구역 통폐합을 단행했다. 이때 광주군의 의곡면과 왕륜면을 통합하여 ‘의왕면’이라 했다. 이렇게 하여 ‘의왕’이란 지명이 100년 전에 생겨났다. 의왕면사무소를 설치하면서 과거 왕륜면 지역에 속한 이곳 사근행궁을 면사무소로 이용했다.
이후 1936년 10월 다시 지방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의왕면과 일형면을 합하여 일왕면을 설치하고 의왕면사무소를 폐쇄하였다. 1937년 3월 일왕면장을 의장으로 한 일왕면협의회에서는 회의를 거쳐 일왕면사무소를 새로이 축조할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의왕면사무소의 매각을 결정하였디. 이후 면사무소로 이용되던 사근행궁은 철거되어 그 모습을 영원히 잃고 그 터만이 남게 되었다.
1963년 화성군 일왕면에서 시흥군 의왕면으로 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사근행궁 자리에 면사무소 건물이 들어섰고, 의왕읍사무소, 의왕시청으로서 청사역할 하다가 고천동주민센터로 이용되어 왔다.
사근행궁터는 1919년 3월 31일 밤에 의왕지역의 800여 주민들이 모여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던 3.1독립만세운동의 현장이기도 했다. 현재는 고천동 주민센터 입구에 작은 비석 하나가 그곳을 지키고 있다. 그러나 고천동 재개발계획으로 사근행궁터이자 의왕시의 유일한 독립만세 운동지는 역사에서 사라질 위기에 놓여있다. 다행히 의왕시는 이곳에 공원을 만들어 터를 지킬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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