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지역시민연대/안양지역정보뱅크

[20191123]독립.민주.인권을 만나는 지역역사탐방(의왕.과천)

도시사진기록/동네탐사


2019 독립.민주.인권을 만나는 지역역사탐방

** 의왕-과천코스 **

2019.11.23/ #의왕 #과천 #역사탐방 #동네 #골목 / 안양군포의왕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주최 독립.민주.인권을 만나는 2019 역사탐방 2차-의왕과천지역/ 13:00 고천초교 집결-(도보)-만세길-의왕면사무소&사근행궁터-(차량이동)-오매기마을-임영대군묘-(차량이동)-도깨비도로-하우현성당-(차량이동)-온온사-(차량이동)-종료-뒷풀이(호계동 한패-구군포사거리)

자료 정리 및 안내 해설(박철하 의왕문화원 前의왕향토문화연구소장)


1. 고천초등학교


의왕 최초의 공립학교. 1930년대에 들어와 조선총독부는 ‘일면일교제(一面一校制)’ 정책을 펼쳤다. 의왕면 주민들은 1935년부터 공립보통학교를 설치하고자 보통학교기성회를 조직하고 기부금을 모집하였다. 조선총독부(경기도)는 1936년 10월 30일자로 고천공립보통학교 설립을 인가했다. 1936년 11월 15일 개교 예정이었으나 실제로는 12월 1일 개교되었다. 일제강점기 의왕지역 초등교육기관 가운데 유일한 정규학교였다. 처음에는 4년제로 출발하여 1939년에 제1회 졸업, 1942년 6년제로 변경되어 1944년에 제5회 졸업생(6년제 1회)을 배출한 이후 2019년 현재 80회가 졸업했다. 고천공립보통학교(1936)→고천공립심상(尋常)소학교(1938)→고천공립국민학교(1941)→고천국민학교(1945.9)→고천초등학교(1996.3.1)로 명칭 변경의 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2. 고천경찰관주재소터


1917년 2월 8일자로 수원군 의왕면 고천리에 수원경찰서 관할의 고천순사주재소(古川巡査駐在所)가 설치되었다. 고천약국 앞 10m 지점으로 경수산업도로에 편입되었다. 1919년 3월 31일 독립만세운동 당시 일제의 정보기록과 󰡔매일신보󰡕에는 ‘고천경찰관주재소(古川警察官駐在所)’로 표기되어 있다. 의왕면사무소에서 출발한 만세시위대는 태극기를 흔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주재소 앞에까지 진출하였다. 이때 조선인 순사는 시위대에게 “저는 (총독부)에서 주는 제복을 입고 녹을 먹는 공인이므로 몸은 여러분들과 함께 할 수 는 없으나 마음은 함께 하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만세’를 외치세요. 그래서 우리가 독립을 쟁취하기를 고대합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세 사람의 헌병[or보병]이 갑자기 나타나 총을 쏘기 시작했고, 시위대 두 사람이 부상을 입고 쓰러졌다. 도망가던 시위대 가운데 일부가 쓰러진 동료를 구하기 위해 돌아왔다가 46명이 체포되었다. 그들은 일본군의 위협 속에 모두 손을 묶인 채 수원경찰서로 압송되었다. 그들은 이틀을 경찰서에서 지내며 조사와 신문을 받았고, 4월 1일 60~90대의 매[태형]를 맞고 풀려났다. 부상자 두 명도 이때 집으로 돌아갔는데, 이복영[=이봉근]은 4월 4일 세브란스 병원으로 후송되어 치료받았다. 해방 후에는 파출소라 불렀고, 6.25전쟁 때에 인민군이 장악하면서 내무서로 불렸다고 한다. 이후 고천파출소는 위치를 현재의 왕곡로1번지(고천동 259-1) 청소년경찰학교 자리로 이전되었다.

3. 의왕면사무소터


1914년 4월 1일부로 경기도 수원군 의왕면[광주군 의곡면과 왕륜면 통폐합]이 새로 설치되었다. 면사무소가 정식 출범한 시기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대한제국 고종황제 시기까지 현륭원을 방문할 때 머물렀던 사근행궁[사근평 응란헌]을 의왕면사무소로 사용하였다. 이때 내부를 2층으로 구조 변경하여 사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1919년 3월 31일 밤 의왕면 주민 800여 명이 의왕면사무소 앞에 모여 횃불을 들고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 시위를 벌였다. 면장도 독립만세 시위대에 참여했으며 100여 미터 떨어진 고천경찰관주재소까지 나아갔다.

1936년 10월 1일 수원군 의왕면과 수원군 일형면이 통합되어 일왕면이 설치되면서 면사무소의 기능이 멈췄다. 고천공립보통학교가 1936년 10월 30일자로 설립인가 되고 12월 1일 개교하였는데 교사(校舍) 완공되지 않아 1,2학년 입학생들이 한동안 의왕면사무소 일부를 교실로 사용했다고 한다. 그러나 1937년 3월 10일 일왕면협의회에서 의왕면사무소 건물에 대한 부동산매각처분이 만장일치로 통과됨에 따라 이후 철거되었다. 매각 철거이유는 건물 유지관리가 곤란하고 일왕면사무소를 새로 신축함에 따른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된 뒤에도 수원군 일왕면이었다가 1949년 8월 15일 수원읍이 수원시로 승격 분리됨에 따라 화성군에 편입되었다. 1963년 1월 1일 시흥군 의왕면으로 편입되면서 옛 의왕면사무소 자리에 다시 면사무소를 신축하였다. 이때 사근행궁 옛 기단으로 쓰였던 돌들이 많이 나왔으나 관리가 되지 않아 모두 소실되었다. 이후 1980년 의왕읍사무소, 1989년 의왕시청 청사로 쓰이다가 1993년 시청이 현재의 자리로 신축이전되면서 고천동사무소[고천동주민센터]로 이용되었다. 2016년 7월 고천동주민센터가 신축 이전되면서 현재는 의왕시청 별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4. 사근행궁터


사근천주정소는 삼남로에 속하는 길에 연해 있는 곳으로 광주부 소속이었다. 사근천 지역은 중요한 도로에 해당되는 곳으로 둔전을 설치하여 군사훈련이 이뤄지기도 했다. 1624년(인조2) ‘이괄의 난’이 일어났을 때는 인조가 궁궐을 떠나 피해 수원부를 지나 공주로 향할 때 사근현에 잠시 쉬어간 적도 있다.

사근천주정소(沙斤川晝停所)와 관련하여 1665년(현종6) 현종이 병 치료를 위해 온양온천으로 가던 중 과천을 출발하여 사근천주정소에 머물렀다는 󰡔현종실록󰡕에서 처음 확인할 수 있다. 이후 숙종이 사근천주정소에 머문 기록도 확인된다.

사근천주정소를 가장 많이 찾은 임금은 정조이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를 화산의 현륭원에 모시면서 모두 13차례 행차를 했는데, 오갈 때마다 사근천주정소에 들러 쉬어갔다. 이때 정조는 사근행궁(肆覲行宮)으로 명명하고 한자 표기도 변경했다. 1795년 을묘원행 때에는 어머니 혜경궁홍씨를 모시고 사근행궁에 머물러 점심수라를 들기도 했다. 특히 을묘원행을 준비하면서 사근행궁을 보수하고 규모를 확대하였다. 정당 건물에는 응난헌(凝鑾軒)이라는 편액이 걸려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근행궁은 응난헌의 정당 외에도 별당이 있었고, 좌우에 창고가 하나씩 있었으며, 입구는 삼문(三門)으로 문 좌우에는 문지기들이 기거할 수 있는 시설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헌종과 철종에 이어 고종 집권시기인 1870년까지 현륭원을 방문하기 위해 오갈 때 ‘사근평 응란헌’에 머문 기록이 󰡔승정원일기󰡕를 통해서 확인된다. 이후 고종과 순종이 사근행궁에 머물렀다는 기록은 확인되지 않는다. 1914년 이후 사근행궁은 의왕면사무소로 이용되어 1919년 3.1독립만세운동 현장이 되었고, 1937년 3월 이후 철거되어 터만 남아오다가 1963년 의왕면사무소가 다시 설치되면서 그 자리에 새로운 청사가 축조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5. 의왕면사무소앞 독립만세운동(1919년 3월 31일)


1919년 3월 31일 저녁 의왕면 주민 800여 명이 의왕면사무소 앞에 집결하여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했다. 시위대에는 일반 주민들은 물론 천도교인과 기독교인들도 다수 참가했다. 시위대는 횃불을 밝히고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의왕면장도 시위대열에 함께 했으며, 100여 미터 떨어진 고천경찰관주재소 앞에까지 나아가 만세를 불렀다.

수원에서 무장한 보병 2~3명이 출병, 시위대에게 발포하여 2~3명이 부상자가 발생했다. 부상자들을 구출하기 위해 달려온 시위대 46명이 체포되어 수원경찰서로 붙잡혀 갔다. 이틀간의 조사와 신문을 받고 이튿날 60~90대의 태형을 받고 41명은 풀려났으나, 5명의 행방은 알 수 없다. 독립만세 현장에는 「고천리 3.1운동 만세 시위지」라고 쓰인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현재 이곳은 재개발지역으로 확정되어 도로개설로 3.1운동 역사현장이 사라질 위기에 놓여 있다.

* 고천경찰관주재소터, 의왕면사무소터, 이봉근, 성주복 참조 *



6. 오전리마을회관터


오전리마을회관터는 오매기 가운데말 입구에 위치해 있다. 1961년 12월 4일 국가재건최고회의 총무처와 화성군 일왕면 오전1리의 자매결연이 맺어졌다. 당시 기념식장에는 “모범농촌 건설” “일하자, 재건이다”라는 슬로건이 내걸렸다. 이때 오전1리사무소와 부녀회관으로 이용될 재건회관 현판식도 함께 거행되었다.

국가재건최고회의는 5.1군사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 소장 중심의 중심세력은 쿠데타 당시의 군사혁명위원회를 1961년 5월 19일 국가재건최고회의로 개명하고 5월 20일 ‘혁명내각’을 발표하여 군사정부를 수립하였다. 즉 국가재건최고회의는 군사정부의 실질적인 최고통치의결기구였다. 국가재건최고회의는 혁명검찰부, 혁명재판소를 직속으로 두고 군사정권에 대한 비판과 반대를 억압하는 한편, 부정축재처리, 정치활동정화, 헌법심의원회 등 특별위원회와 중앙정보부 등을 통해 제3공화국의 출범과 군사쿠데타 주체세력의 민간정부 집권을 위한 모든 정치적 조치와 법적, 제도적 절차를 마련했다. 제3공화국이 출범하기 하루 전인 1963년 12월 16일까지 존속되었다. 



7. 오전리교회터


오매기마을에 기독교가 정착하는 데는 ‘문화류씨 가정에 외롭게 숨어 핀’ 전도부인 홍길순(洪吉淳) 여사가 그 중심에 있다. 홍길순 여사는 마을에서 20여리나 떨어진 수원읍성결교회까지 걸어다녔다. 오전리교회 기독교 역사에서 홍길순 여사는 여성 전도사로서 “오전리교회의 첫 번째 믿음의 꽃”이었다. 신도수가 늘어나면서 1937년 6월 10일 유근풍(柳根風)의 집에 예배소가 설치되었는데 이것이 오전리교회의 시작이었다.

1938년 유창희의 헌금을 기반으로 교회를 짓기 시작하여 4개월 만에 신축을 마치고 1939년 6월 5일 오전리교회 헌당식을 가지면서 독립교회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당시 교회의 정식 명칭은 “조선(朝鮮) 야소교(耶蘇敎) 동양선교회(東洋宣敎會) 오전리교회(五全里敎會)”였다. 신도는 여성들이 많았으며, 오매기 마을의 류씨 문중 사람들을 비롯한 오전리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고, 일부 인근의 고천리와 학의리 사람들도 있었다. 신도수가 너무 많아 첫 교회 바로 위에 교회를 새로 짓고 원 교회는 목사의 사택으로 사용하였다. 현재 첫 교회 건물은 개인주택으로 이용되고 있으나 새로 확장한 교회는 없어지고 터만 남아있다.

1941년 부임한 유택윤(兪澤潤) 목사는 일제의 황민화정책에 따른 신사참배 강요를 거부하여 같은 해 5월 24일 수원경찰서에 구금되었다. 유목사가 구류되었던 중에도 류춘희(柳春羲) 집사가 중심이 되어 가정예배를 16개월간 지속하였고, 신도들은 목사가족의 생활을 돌보았다. 일제의 탄압으로 교단이 해체됨에 따라 1943년 11월 19일 경성구세단에서 신경산 목사가 부임하였는데, 해방이 되자 성결교단이 부활하면서 1946년 3월 성결교회로 회복되었다.

이후 오전리교회는 1962년 7월 오전리 391번지로 이전하였고, 1974년 고천교회로 명칭을 바꾸고, 1978년 고천리 305-10번지로 다시 이전하면서 고천성결교회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8. 임영대군 묘와 사당


  임영대군 이구(臨瀛大君 李璆, 1418~1469)는 세종대왕과 어머니 소헌왕후 심씨(昭憲王后 沈氏) 사이에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수양대군, 곧 세조가 그의 둘째 형이다. 임영대군은 성격이 매우 활달하고, 문학과 역사를 두루 섭렵해서 논리가 뛰어나며 무예도 훌륭했다고 한다. 세조는 임영대군이 어질고 학식이 높은 선비와 같다고 칭찬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항상 검소하고 재산에 욕심을 부리지 않았으며, 사람을 대할 때 정성을 다하고, 거짓과 꾸밈이 없었다고 한다. 이러한 성품을 갖추었음에 예종은 임영대군에게 ‘정간(貞簡)’이란 시호를 내렸다.

  임영대군은 형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른 뒤 그의 통치를 보좌했다. 세종과 문종 시기에 무기를 연구하여 총통을 새롭게 고쳐 만들고 화차를 제작한 경험을 살려 세조의 명을 받아 군기감의 잘못을 바로잡고 신기전을 개량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신숙주와 함께 효령대군을 위한 원각사 창건에 힘쓰기도 했다.

  임영대군은 비록 궁중에서 자라고 생활하였지만 민간의 생활을 잘 알고 백성들의 어려움을 헤아려 정책에 반영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면, 군사들에게 개인적으로 갑옷을 만들어 입도록 하자는 논의가 있을 때, 먹고 입는 것도 힘든 군사들에게 갑옷까지 만들어 입도록 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고 세조에게 건의했다. 당시 이와 같은 제도가 시행되면서 백성들은 농경에 중요한 소를 잡아서 갑옷 비용으로 다 써버리게 됨으로써 원망이 많다는 사실을 임영대군은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임영대군은 세조를 도와 백성들의 이로움과 해로움을 조정에 전하는 등 백성들을 보살피고 사랑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임영대군이 세조를 적극 지지했는지는 알 수 없다. 왕자들 사이에 골육상쟁을 경험한 그는 동기간의 우애회복에 노력하며 여러 조카들 가운데 인재를 찾아내어 관리로 등용하기도 했다고 한다. 임영대군은 예종이 즉위한 직후 5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예종은 그의 죽음을 매우 슬퍼하며 5일 동안 조정에서 하는 회의를 폐지하고 장례에 필요한 물품을 충분히 제공했다. 

  후손들에게 따르면, 수양대군이 조카 단종을 몰아내고 임금이 되자 임영대군은 이곳 능안마을에 내려와 숨어지냈다고 한다. 이때 세조가 함께 조정을 돌보자고 찾아왔지만 눈 뜬 장님[청맹과니] 행세를 하며 끝내 거절하였으며, 모락산 큰 바위에 올라 망궐례(望闕禮)를 올리면서 한양을 걱정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임영대군 묘역은 모락산 동편 자락 백운호수를 만나는 지점인 내손동 능안마을 초입 오른쪽에 위치하고 있다. 종손 집을 중심으로 우측에 임영대군묘역, 집 뒤에 제안부부인 최씨묘역, 좌측에 사당이 있다. 임영대군 묘역은 일반 묘와 달리 상계, 중계, 하계의 3단으로 구분하여 조선전기 왕릉 묘역의 형식을 갖추고 있다. 상계에는 묘비, 중계에는 상석과 장명등 및 망주석, 하계에는 문인석이 차례로 배치되어 있다. 장명등과 문인석은 조선시기의 것이 그대로 보존되어 왔고, 묘비는 1924년에 다시 중건되었다. 1981년 묘역을 새로 정비하면서 봉분을 비롯해 상석과 망주석 등도 새로이 만들었다. 임영대군 묘역은 광해군과 인조, 현종 때에 거듭 왕릉 후보지로 선정되기도 했을 만큼 명당으로 알려진 곳이다.

  임영대군 사당은 원래 종가 뒤편에 있었으나 몇 차례 이전을 거쳐 현재의 자리에 위치하게 되었다. 사당의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한 가운데에 임영대군의 신주가 모셔져 있다. 현재의 사당은 2000년에 기존 사당을 완전히 해체한 뒤 쓸 만한 재목을 간추려 다시 원형대로 복원한 것이라고 한다. 사당 건물은 맞배지붕 형식을 갖추고 있으며, 비바람을 막을 수 있도록 방풍널을 달았다. 사당 정면에는 1칸 규모의 삼문이 세워져 있고, 좌우로 기와지붕을 얹은 담장이 빙 둘러서 사당을 보호하고 있다. 사당에서는 매년 음력 1월 21일에 전국의 후손들이 한자리에 모여 임영대군 기신제를 올린다. 모락산 정상 바로 아래에는 임영대군을 기리는 불당이 있었다. 경일암(擎日庵)이라 불린 이 암자는 한국전쟁 때 모락산전투 중에 불타 없어져 지금은 그 터만 남아있다. 임영대군 묘역과 사당은 2000년 3월 24일자로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98호로 지정되어 보존, 관리되고 있다.

  모락산의 지명유래. 임영대군의 후손들에 따르면, 수양대군이 조카 단종을 폐위하고 왕위에 오르고 형인 안평대군과 동생 금성대군마저 참형을 당하자 임영대군은 모락산 자락에 내려와 숨어지냈다고 한다. 특히 「정간공자손보행장(貞簡公子孫譜行狀)」(1769년)에 따르면, 산 아래 초막을 짓고 매일 높은 산봉우리 큰 바위에 올라 한양을 걱정하고 그리워하며 망궐례를 올렸다 하여 ‘慕洛山(모락산)’이라 했다는 것이다. 이후 임영대군의 묘역을 중심으로 후손들이 모여 살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임영대군의 묘역은 후대 조선 왕의 능 후보지에 오르곤 했는데, 특히 현종 때는 효종의 능 후보지로 적극 검토되기도 했다. 이후 사람들은 이 마을이 임금의 능 후보지였다 하여 ‘능안말[陵內洞]’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9. 하우현성당과 사제관


  천주교가 우리나라에 전래된 때는 1700년대 후반이다. 200년이 훌쩍 넘었다. 정조 이후 천주교 교세가 확장되는 가운데 순조 때에 이르러 금지와 탄압이 강화되었다. 1800년대에 네 차례의 천주교 대탄압으로 1만 명 이상의 신자가 희생됐다. 이때 의왕지역에서도 순교자가 발생했다.

  언제부터 의왕지역에 천주교 신자들이 살았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기록상으로는 충청도 홍주에 살던 한덕운(韓德運, 1751~1801)이라고 하는 천주교 신자가 광주 의일리(현 백운호수 주변 학의동지역)로 이주하여 살다가 1801년 신유박해 때 체포되어 순교했음을 알 수 있다. 1845년에는 하우현에 살던 신자 김준원이 광주 포교에 체포되어 12월에 남한산성에서 순교했다는 다는 증언도 전한다. 이와 같은 내용을 보아 이미 1800년을 전후한 시기 이래 하우현 지역을 중심으로 천주교 신자들이 거주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하우현은 주변은 청계산 깊은 골이 있고 수풀이 우거져 있어 박해를 피해 살던 천주교인들에게는 숨어살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곳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이곳 하우현은 인천-시흥-광주-이천-여주를 잇는 도로 상에 동양원(東陽院)이란 역원이 설치될 만큼 비교적 사람의 왕래가 많은 곳으로 포교를 위해 유리한 곳이기도 했다.

  1865년 프랑스의 루도비꼬 볼리외 신부(1840~1866. 한국이름 서몰례)가 인근 묘론리(현 성남시 운중동)에 와서 동굴 속에 숨어 지내며 우리말을 배우고 천주교 교리를 가르치다가 그 이듬해 병인박해 때 순교하였다. 천주교인들이 인근에 땅을 파고 굴속에서 살았다 하여 생겨난 토굴이라는 지명이 지금도 전하고 있다.

  하우현 성당은 100년이 넘는 유서깊은 역사를 가진 성당이다. 1884년에 공소 공동체를 갖추었고, 갓등이본당 알릭스 신부의 도움과 하우현 공소 신자들의 모금으로 1894년 5월 초가 목조 10간의 강당이 건축되었다. 1900년에는 신자가 160명에 달했으며, 샤플랭 신부가 부임하면서 정식으로 하우현 본당이 되었다. 한강이남 경기지역에서는 세 번째였다. 일제 강점 초기 신자는 200여 명에 달했으나 1920년대에 들어와 점차 감소현상을 보였다. 조선총독부의 조치로 일반의 연초재배가 금지되면서 생활수단을 찾아 다른 곳으로 이주하는 신자들이 생겨나는가 하면, 도시에 대한 동경으로 시골 본당의 교세가 감소되고 있던 당시의 시대상황과도 관련이 있다. 이후 공소와 본당을 거듭하다가 광복 이후 1965년 김영근 신부 재임 시절에 성당 건물을 새로 지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하우현성당에서는 1903~1904년경부터 학교를 설립하여 운영하였다. 1920년 윤예원(尹禮源, 1889~1869) 신부가 하우현으로 오면서 학교의 성격에 변화가 생겼다. 학교 이름은 ‘경애강습소(敬愛講習所)’라 했으며, 체계를 갖춘 4년제 초등교육 기관이었다. 이전의 학교가 종교교육이 목적이었다면, 윤예원 신부 부임 이후는 선교와 함께 봉사, 애국심 함양 등을 교육의 중점으로 하면서 문맹퇴치와 더불어 근대교육의 중심적 역할을 했다. 윤예원 신부는 부임하기 전 황해도 은율본당에 있을 때 신자들에게 독립의식을 심어주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지원하기도 했다. 경애강습소는 윤예원 신부가 전임한 이후 운영상의 어려움을 겪다가 1929~1930년 경 폐쇄되었고, 당시 주변 청계지역의 서당들과 모두 합하여 정준모(鄭俊謨, 1893~1958) 선생이 이끄는 성현서당(星峴書堂)으로 이어졌다. 

  하우현성당 우측에는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사제관이 자리하고 있다. 부임한 신부가 생활할 수 있도록 1906년에 건축된 것으로, 처음에는 벽체를 거의 벽돌로 쌓고 서양식 지붕틀에 함석지붕을 올리고, 외부에 초석을 갖춘 기둥을 세워 회랑을 마련하였다. 이후 개보수를 거치면서 돌로 만든 벽체에 팔작 기와지붕을 올렸다. 우리나라와 서양식을 절충한 근대 건축양식의 하나로서, 2001년 사제관의 문화재적 가치를 인정하여 경기도 기념물 제176호로 지정 보호하고 있다. 사제관 앞뜰에는 프랑스 볼리외 신부와 김영근 신부의 기념비가 각각 세워져 있다. 2004년 사제관 건물을 복원하고 주변을 새롭게 단장하였다. 


10. 동양원터


의왕지역에는 두 개의 원(院)이 있다. 동양원(東陽院)은 인덕원 및 광주로 연결되고, 사근내원(沙斤乃院)은 수원부지역과 연결되었다. 역제가 완전한 관용(官用)으로 운용되었던 것과 달리 원(院)은 토지만을 관에서 지급하고 가옥의 시설이나 사무는 민간에서 담당했는데, 해당 지방의 유지를 원주(院主)로 정하고 원의 관리를 일임했다. 이러한 원은 대체로 도로에 30리마다 설치하였고, 인가가 희박하여 교통이 불편한 곳에도 설치되었다.

임진왜란,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원은 거의 폐허화 되고, 여행하는 사람들은 민간에서 사사로이 개설한 점(店)을 이용하게 되었다. 점은 대개 원터에 설치되어 원(院)에서 점(店)으로 이름이 바뀐 곳이 많다. 조선후기 사회경제적 변화와 더불어 교통이 빈번해지면서 점차 주막(酒幕)으로 발전하였다.


11. 의왕면사무소앞 독립만세운동 지도자 이봉근(이복영) 집터


이봉근(李鳳根, 1893~1938). 경기도 시흥군 의왕면 청계리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서당에 다녔는데 총명하고 그 성격이 활달하여 주위에 부러움을 샀다고 한다. 15세를 전후하여 사서삼경을 이해하였으며, 한학은 물론 신학문을 습득하는데도 남다른 노력을 보였다. 나라를 빼앗긴 상항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문맹을 퇴치해야 한다고 믿고 야학활동을 전개했다.

1919년 3월 친구 성주복이 서울에서 3.1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다가 일제 경찰에 체포된 소식을 접하고 마을의 청년들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추진하였다. 이봉근은 뜻을 같이 하는 동지들과 사전에 만세운동 계획을 세웠다. 먼저 청계지역을 중심으로 4개 리의 책임자를 결정하고, 집집마다 한 사람씩 동원하여 숲밖에 집결하도록 했다. 만세시위 때 태극기를 사용하기로 하고, 7일간에 걸쳐 매일 밤마다 태극기를 제작하고 각 리에 배포하였다. 이 같은 사실을 통문(通文)으로 각 마을의 이장에게 전달하고, 이장의 책임 아래 각 호당 한 사람은 의무적으로 참가하도록 했다. 만약 이 기밀을 누설하거나 불참하는 가정에 대해서는 만세시위 후 방화하겠다고 경고도 하였다고 한다.

1919년 3월 31일 저녁 무렵 청계지역 4개리의 주민들은 숲밖에 집결, 시위대를 형성하고 오매기고개를 넘어 의왕면사무소로 향했다. 의왕면사무소 앞에는 800여 명의 시위대가 형성되었다. 면사무소 앞 시위대열에는 의왕면장도 함께 했다고 한다. 시위대는 횃불을 밝히고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고천경찰관주재소로 향했다. 이때 이봉근을 중심으로 한 시위대는 대형 태극기를 들고 선두에서 시위대를 지휘하였다고 한다.

당시 고천경찰관주재소에 근무하던 조선인 순사는 시위대에게 ‘자신도 조선의 독립을 원한다. 자신은 제복을 입고 있어서 참여하지는 못하지만 계속 만세를 불러 독립을 쟁취하기 바란다’는 취지의 얘기를 했다고 한다. 독립만세위대를 탄압하기 위해 수원에서 무장한 보병 4~5명이 파견되었다. 일본군은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였고 2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이때 이봉근은 다리에 관통상을 입고 수원경찰서에서 조사와 신문을 받았는데 함께 잡혀간 46명 가운데 41명은 태형 60~90대를 맞고 풀려났다. 이봉근은 서울 세브란스병원으로 후송되어 치료를 받았다.

이후 민족의 주권회복을 위해 “배우는 것이 나라를 찾는 것이다”라면서 문맹퇴치를 위한 야학을 개설하였다고 한다. 1920년대 후반부터 성주복과 함께 고향에서 계명강습소[계명야학원]를 설립하여 글을 가르키고 애국심을 고취시켰다고 한다. 하우현성당 아래 가족과 거주하면서 집에 ‘서당’을 열어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는 한편 성당의 일을 도우며 생활하였다. 부상으로 지팡이를 집고 다녔는데, 마을 사람들은 이봉근 선생을 가리켜 ‘만세나리’라고 불렀다고 한다. 


12. 독립운동가 성주복 묘역


성주복(成周復, 1894~1971). 경기도 수원군 의왕면 청계리 361번지 출생. 고향에서 한학을 배운 뒤 1915년경 서울의 청년학관에 있는 학교에 입학, 1917년 동교가 폐교되자 그 이듬해에 배재고등보통학교 3학년에 편입하였다.

1919년 3월 5일 서울지역 학생들이 중심이 된 제2차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했다. 군중들과 함께 ‘조선독립(朝鮮獨立)’이라 적힌 깃발이 펄럭이고,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는 시위대와 함께 남대문에서 종로 보신각 방향으로 진출하다가 일제 경찰에 의해 체포당했다. 성주복은 3월 10일과 6월 1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신문조서와 예심조서를 받았다. 1919년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6월(미결구류 90일 통산)을 언도받고 복역하였다. 징역은 1919년 11월 10일 시작되어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룬 후 1920년 2월 10일 풀려났다.

석방 이후 상청계 지역에서 계명강습소를 개소하여 신교육을 가르치며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고 전한다. 유족에 의하면 출감 이후 근화여학교(槿花女學校)에서 한학을 가르쳤으며, 학교 이름 “근화(槿花)”는 애국 동지들과 함께 성주복 선생이 주도하여 지은 이름이라고 전한다. 근화여학교는 1938년 이후 교명이 “덕성(德成)”으로 변경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편 1920년대 중반 이후 해방 때까지 직접 양봉사업을 하면서 󰡔동아일보󰡕에 양봉 보급 글을 연재하는 등 양봉기술 보급에 노력하였다.

우니나라 정부에서는 선생의 3.1운동에서의 공훈을 기려 2005년 8월 15일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묘역은 의왕시 청계동에 위치해 있다. 유족들은 2011년 12월 10일 선생의 행적을 새겨놓은 기념비를 세우고 묘역을 새롭게 단장하였다. 의왕문화원 의왕향토문화연구소에서는 성주복 선생의 3.1정신을 기리고 의왕시민에게 널리 알리고자 2012년 1월 18일 [3.1독립만세운동 독립유공자 성주복선생 기념비 제막식]을 주최한 바 있다.

13. 역대 과천현감 비석군


역대 과천현감 비석군은 온온사(穩穩舍) 입구에 위치해 있다. 비석군은 관문리 홍천말 249-5의 도로변[비석거리]에 있었던 것을 옮겨온 것이다. 병자호란 때인 1636년 12월 관악산 바위굴에 은거하면서 청나라 군대와 싸운 과천현감 김염조(金念祖)의 비, 정조6년(1782)에 건립된 현감 정동준(鄭東浚)의 비, 명성황후의 친정아버지 민치록(민치록)의 비 등 과천현감을 비롯하여 1928년 변성환(邊星煥) 구장의 비석까지 15명의 선정비를 모아 놓은 것이다.

비석의 명칭은 다양한데 그 중 7기는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에 해당한다.

2009년 11월 9일 과천시 향토유적 제5호로 지정되었다.

비석군 바로 옆에는 수령이 600여 년이나 되는 은행나무가 있다. 5명이 손잡고 에워쌀 수 있는데, 둘레가 6.5미터라고 한다.


14. 온온사


온온사(穩穩舍)는 과천현의 객사이다. 과천현의 치소(治所)가 이곳에 자리잡은 것은 조선초기이다. 이 객사는 1649년(인조27)에 건립되었다. 객사는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셔놓은 곳으로 수령이 초하루와 보름에 이 전패를 향해 절을 올렸다. 공무로 벼슬아치들이 이 고을에 들렀을 때 숙소로 이용되기도 했다.

‘온온(穩穩)’은 경관이 아름답고 몸이 편안하다는 뜻을 담고 있다. 1790년(정조14) 현륭원을 참배하고 돌아오던 길에 이곳에 머물러 과천 동헌을 ‘부림헌(富林軒)’이라 하고, 객사를 ‘온온사(穩穩舍)’라 이름짓고 두 편액을 썼다. 정청(政廳) 3칸이 중앙에 있고, 좌오 동.서헌이 각각 3칸으로 구성되어 있다. 정청부분 지붕이 동.서헌보다 약간 높아 전형적인 객사 건물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 건물 내부 중앙은 마루로 되어있고, 양쪽은 온돌방이다.

일제강점기에 온온사를 과천면 청사로 사용하다가 1932년 기존 건물을 헐고 원형을 변형하여 새로 지었다. 원래는 현재의 중앙동사무소 자리에 있었는데 1986년 12월 12일 전라남도 승주군 낙안 객사의 형태를 참고하여 완전히 해체 복원하였다고 한다.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00호로 지정되었다.


15. 과천향교


과천향교는 1398년(태조7)에 성현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창건되었다. 1407년(태종7), 1601년(선조34), 1639년(인조17) 몇 차례에 걸쳐 중건되었다. 현존하는 건물은 정면2칸, 측면2칸의 맞배지붕의 겹처마로 된 대성전을 비롯해 명륜당, 내삼문, 외삼문 등으로 되어 있다. 대성전에는 오성(五聖, 공자.안자.자사.증자.맹자), 송조이현(宋朝二賢, 정호.주이), 우리나라 십팔현(十八賢, 설총.최치원.안유.정몽주.김굉필.정여창.조광조.이언적.이황.김인후.이이.성혼.김장생.조헌.김집.송시열.송준길.박세채) 등 스물다섯 분의 성현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조선말기까지 지역 유림의 대표적인 교육공간으로 사용되었다. 과천향교의 명륜당은 조선시대 교육기관으로 조선 태조7년(1398)에 창건되었다. 그러나 터가 좋지 않아 등과 유생이 없다는 이유로 숙종16년(1690)에 과천 서이면에서 현재의 터로 옮겨지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와 전적, 노비 등을 지급받아 교관이 교생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 이후 신학제 실시에 따라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봄, 가을에 석전(釋奠)을 봉행하며 초하루, 보름에 분향을 하고 있다.

1944년에 시흥향교.안산향교가 폐지되고 과천향교로 통합되었다. 다시 1959년에 시흥향교로 개창되었다가 1996년 과천향교로 복원되었다. 현재까지도 과천시, 광명시, 군포시, 안산시, 안양시, 의왕시, 시흥시 등 7개시 유림들이 모여 성현을 추모하고 학문의 연구 및 교육 활동을 하고 있다. 과천향교는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9호로 지정되어 있다.

향교 앞으로는 관악산 자하동 계곡이 아름답게 펼쳐져 있다. 자하동 계곡에는 마애명문들이 있는데 ‘단하시경(丹霞詩境)’은 ‘시흥을 불러일으키는 자하동의 빼어난 경치’를 뜻한다고 한다.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의 글씨와 유사한 필체로 평가된다. 이 외에도 자하 신위(紫霞 申緯 1769~1847)의 글씨인 ‘백운산인 자하동천(白雲山人 紫霞洞天)’과 ‘자하동문(紫霞洞門)’, 그리고 고운 최치원(孤雲 崔致遠)이 지은 것을 송시열이 새겼다는 ‘광분첩석(狂奔疊石)’ 등 모두 4기의 바위글씨가 있는데 ‘단하시경’만이 유일하게 과천시 향토유적 제6호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