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예원 신부는 한국인으로서 23번째로 성직자가 된 인물로서 갑신정변이 일어난지 2년후가 되는 1886년(고종 23) 충남 부여군 구룡면 금사리에서 순교자의 후손인 윤정두의 5남 2녀중 3남으로 탄생하였다.
13세가 되는 1898년(광무 2) 기낭 신부의 추천으로 용산 예수성심 신학교에 입학하였으며, 1914년 3월 7일 사제서품을 받았는데, 윤 신부가 사제서품을 받은 1914년은 대한제국이 일제에 의하여 국권을 잃은지 4년후가 되는 시점이다.
신부가 된 이후 최초로 부임한 곳이 황해도 은율 본당신부인데, 이때부터 천주교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 신부로 활동하였던 윤예원 신부의 본격적인 사목활동이 시작된 것이다.
윤 신부가 은율 성당에 부임한 이후로부터 5년후에 3.1운동이 발생하는데, 시위에 직접적으로 가담한 증거는 없으나 윤 신부의 평소 성향으로 미루어 볼 때 간접적으로나마 신자들의 시위를 독려하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한편 윤 신부가 본격적으로 항일운동 대열에 참가하게 된 계기는 상해임정에서 파견된 임 빌리버라는 청년과의 만남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임 빌리버는 상해임정에서 설립을 인가한 대한적십자회(大韓赤十字會)의 회원으로서 조선에 파견된 것으로 짐작되는데, 구체적으로 1919년 10월 황해도 매화동 본당에서 사제회의가 열렸을 때 윤 신부에게 상해임정에서 천주교 신자들에게 적극적인 독립운동 참가를 촉구하는 권고문 500부를 전달하며, 이어서 적십자운동의 동참을 권유한다.
이러한 임 빌리버의 권유를 받아들인 윤 신부는 이제 천주교 성직자로서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의 대열에 동참하는데 구체적으로 상해임정 권고문 500부를 주위에 배포하는 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필자가 권고문 배포보다 더 주목하는 부분이 있으니 바로 적십자운동과 연관된 부분이다.
사실 적십자 운동이 겉으로 보기에 인도적인 차원의 운동으로 생각할 수도 있으나, 이 운동은 상해임정의 산하기관으로서 설립된 대한적십자회(大韓赤十字會) 활동을 의미하는 것이며, 여기에 회원으로 동참한다는 것은 곧 독립운동에 투신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요. 동시에 회비를 낸다는 자체가 상해임정에 군자금을 지원하는 상징적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당시 윤 신부가 임 빌리버로부터 이런 취지에 대하여도 충분히 설명들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이런 것을 알면서도 동참하였다는 사실은 윤 신부가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투신하였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윤 신부는 단지 본인이 40원의 회비를 내었을 뿐만 아니라 신자와 동료 사제들에게 회비를 내라고 적극적인 독려를 하니, 이는 곧 윤 신부가 군자금을 모집하는 활동을 하였다는 것을 입증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윤 신부의 항일운동이 결국 여러경로를 통하여 당시 조선천주교회의 최고 지도자라 할 수 있는 프랑스인 출신 경성교구장(京城敎區長) 뮈텔 주교가 알게 되면서 제약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윤 신부는 성직자로서 주교에게 순명하는 자세를 취하며, 앞으로 이런 활동을 하지 않겠다고 맹세하나, 이런 윤 신부의 의사를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았던 뮈텔 주교가 1920년 6월에 황해도 은율본당에서 경기도 하우현 본당으로 전임시키니 이는 사실상 윤 신부에 대한 문책성 인사라고 볼 수 있다.
한편 하우현 본당 신부로 있던 윤 신부가 뮈텔 주교로 부터 문책성 인사를 당하였지만, 조국을 사랑하고 민족의 고통을 함께 하려는 그 애국심이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었으니, 그 구체적인 예를 세가지 제시한다.
첫째. 1925년 고향인 부여의 땅을 팔아서 성당ㅍ아래에 학교를 지으니 바로 이 학교가 애경강습소인데, 이는 겉으로 보기에 교육기관으로 볼 수 있으나, 윤 신부의 의도는 바로 이런 교육을 통해서 신자들에게 직접적인 독립운동은 하지 못하나, 간접적으로나마 민족의식을 계속 고취하려는 의도가 있었을 것으로 보며, 이는 겉으로 뮈텔 주교의 방침에 순명하면서 도 한편으론 윤 신부의 입장에서 할 수 있는 항일운동의 대안이었다고 볼 수 있다.
둘째. 애경강습소를 설립한 이듬해인 1926년에 한 공소에서 경찰에게 소환되어 강습소와 독립군과의 연관성에 대하여 조사를 받았으며, 당시 윤 신부의 서한을 압수하였다고 하니, 이것으로만 미루어 보아도 애경강습소는 단순한 교육기관이 아니었다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셋째. 광복을 불과 얼마 앞두고, 강원도 대화본당 주임신부로 재임할 당시 미사 강론중에 경찰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히로히토 일왕을 귀머거리,소경이라고 언급한 것이 문제가 되어 1주일간 투옥된 바가 있다.
이러한 세가지를 미루어 보아도 상해임정 군자금 사건이후 은율본당에서 하우현 본당으로 전임된 윤 신부의 항일운동이 예전같이 적극적으로 전개된 것은 아니었지만 그 근본적인 정신은 계속 계승되었다고 볼 수 있다.
윤 신부는 부산 구포 본당신부를 끝으로 1968년 은퇴하여 충남 부여군 외산면 만수리 공소에서 요양중에 병세가 악화되어 결국은 1969년 5월 7일 대전성모병원에서 향년 84세를 일기로 선종(善終)하였다.pgu77@naver.com
*필자/문암 박관우.작가.칼럼니스트.<역사 속에 묻힌 인물들>의 저자.
참고자료 의왕문화 창간호(의왕문화원 2002년 발행)
https://memory.library.kr/files/original/183e50670a80cbd730da1a9e78fd3253.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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