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지역얘기/담론

[박철하]의왕시 이동 오봉산 청동기 마을 유적과 고인돌

안양똑딱이 2025. 3. 24. 00:34

 

의왕시 이동 오봉산 청동기 마을 유적은 오봉산 남쪽 봉우리에서 서쪽으로 내려오는 능선 끝자락 구릉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중심 유적은 청동기시대 집터인데, 토기와 석기 등의 유물도 발견되었다. 청동기시대 주거지 13동을 비롯하여 통일신라시대 이후 조성된 돌널무덤(석관묘) 4개도 확인되었다. 돌널무덤은 고인돌보다 앞선 청동기시대의 무덤양식이다. 뿐만 아니라 이곳 집터에서 오봉산 정산으로 오르는 중턱에 고인돌이 온전히 놓여 있다. 이것으로 보아 청동기시대에 사람들이 이곳 이동 지역에 작은 마을을 이루며 생활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집터

 

이동 청동기시대 유적지에서 발견된 집터의 형태로 보면, 오봉산 서쪽 끝자락 능선 구릉지역에 위치하고 있으며, 주변을 둘러보기 좋고 관리와 통제가 쉬운 곳에 있는 가장 큰 집터를 중심으로 다른 집터들이 둘러싸여 있다. 마을의 지도자 또는 유력자와 그의 가족공동체가 살고 있는 가장 큰 집터를 중심으로 작은 마을공동체가 형성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청동기시대에는 계급이 발생하여 지배하는 자와 지배를 받는 사람들 관계가 형성되고 있었다.

 

청동기시대의 집터들은 대체로 앞쪽에 시냇물이 흐르고 뒤쪽에는 바람을 막아주는 야산이 있는 곳에 자리하고 있다. 사람들이 이곳 이동 오봉산 구릉에 모여 생활한 이유는 넓게 펼쳐진 들판과 그곳을 가로지르는 맑은 하천이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석기시대를 거쳐 청동기시대로 오면서 둥근 반지하 형태의 움집은 직사각형이 되고. 점차 땅위 움집으로 변화되어갔다. 이곳 집터에서는 불을 피우던 화덕, 냉장고와 같은 역할을 하는 토기 저장구덩이, 집의 벽체, 지붕을 지탱하는 기둥 구멍의 흔적도 확인되었다.

 

생활도구

 

청동기시대라고 해서 농기구를 청동으로 만들지는 않았다. 청동이 매우 귀하기 때문이다. 이 시기의 농기구는 돌로 만든 석기를 사용했다. 철기시대가 되어야 비로소 철제 농기구를 사용하게 된다. 돌을 갈아서 만든 간석기는 신석기시대 초기부터 사용해 왔다. 하지만 청동기시대에 들어와 보다 많이 사용되고 종류도 다양해진다. 청동기시대에 간석기는 일상생활도구로써 삶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나무를 베거나 다듬는데 이용된 돌도끼와 돌끌, 무기와 사냥도구로 쓰인 간돌검과 간돌화살촉 등이 발견되었다. 간석기들의 모양이 매우 완전한 형태를 띠고 있다.

 

간석기를 사용한 이유는 사람들이 한 곳에 정착하고 농경생활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농경지를 얻기 위해 나무를 베거나 집을 짓기 위해 목재를 다듬는 데에는 뗀석기보다는 간석기가 훨씬 효과적이다. 간석기는 날이 날카롭고 크기와 모양이 비슷한 도구를 여러 개 만들 수도 있다. 다양한 모양으로도 만들 수 있고, 여러 번 사용해서 무디어지면 다시 숫돌에 갈아 날을 세우기도 쉽다.

 

이동 청동기 집터에서는 토기도 발견되었다. 농사를 짓기 시작하면서 발달한 것이 바로 토기이다. 토기는 물과 불에 강해서 먹을 것을 저장하거나 조리할 수 있다. 농사를 지어 거두어들인 곡식이나 열매를 보관하기도 하고, 음식을 만들고 물을 운반하는 데 사용했다. 토기를 발명함으로써 음식을 끓여 먹는 등 가공하는 방법이 발전했고, 음식물의 종류도 많아졌다.

 

오봉산 이동 고인돌

 

우리나라에는 고인돌이 3만 여기에 이르는데 세계적으로 가장 조밀한 분포권을 보여주는 고인돌 전시장, 고인돌의 나라와 같다. 형식도 다양하면서 북쪽에는 북방식, 남쪽에는 남방식이 많다. 고인돌은 단순한 돌이 아니다. 생활용품이나 의례용 장신구 물품, 무기류와 농기구 등이 쏟아져 나오는 고인돌은 당시의 생활상을 알 수 있게 해주고, 그곳에서 발굴된 토기와 청동기 시대 동검 등은 우리 조상의 사회 경제 문화를 밝히는데 중요한 역사의 문을 여는 열쇠 역할을 한다.

 

고인돌이란 순수한 우리말이다. 큰 돌의 아래를 3~4개의 보다 작은 돌로 괴어 받치고 있다고 해서 고인돌이라고 한다. 고인돌은 대부분 무덤으로 쓰이고 있지만 공동무덤을 상징하는 묘표석 또는 종족이나 집단의 모임 장소, 의식을 행하는 제단으로 사용되었다.

 

오봉산 남쪽 정상에서 남서쪽 능선 중턱에 위치한 고인돌은(이동 산 45-1번지 일대) 의왕 이동 청동기시대 집터와 관련되어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오봉산 고인돌에 대한 구체적인 발굴 보고는 아직 없다. 덮개돌의 크기는 238×195×40로 대형은 아니지만 화강암을 정교하게 다듬어 만들었고, 지름 2~3의 성혈(性穴, cupmark)도 있다. 성혈이란 다산과 풍년 등을 기원하며 바위에 돌로 문질러 생긴 작고 얕은 구멍을 말한다.

 

굄돌은 4개가 있는데 서북쪽 굄돌은 덮개돌과 같은 재질의 돌이고, 나머지 3개의 굄돌은 근래에 다른 곳에서 옮겨온 것으로 보인다. 굄돌은 약 40×50크기로 지상에 노출된 상태로 덮개돌을 받치고 있다. 이동 고인돌은 산 정상 가까이에 위치하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오봉산은 높지 않은 산으로 고인돌과 같은 석질의 바위들이 주변에 많이 널려있어 덮개돌을 구하는데 힘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제단의 기능으로 이용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자세한 내용은 더 조사해 보아야 한다. 이외에도 청계동, 왕곡동, 오전동, 삼동 지역에서도 굄돌이 없는 고인돌 유적이 발견되고 있다.

 

[박철하]의왕의 어제와 오늘: 지역 정체성을 조명하다

내고장 역사 바로 알기 글에서

 

편집자주: 박철하 선생은 의왕시 오전동 전주나미마을 345번지에서 태어난 의왕 토박이로 고천초, 안양중, 유신고를 거쳐 고려대 사학과와 숭실대 대학원 사학과를 졸업했으며 '1920년대 사회주의 사상단체. 전국 군 이상 지방에서 활동했던 계급의식이 있는 청년들의 반일운동과 사회혁명운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대통령소속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 전문위원과 경기도교육청 역사교육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냈으며 현재는 참여와 자치를 위한 의왕풀뿌리희망연대 공동대표, 의왕문화원 부설 향토문화연구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