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시대
모락산 정상에 있는 한성기 백제의 산성
의왕 모락산성(義王 慕洛山城)은 대한민국 경기도 의왕시 내손동, 모락산에 있는 백제 시대의 산성이다. 2007년 9월 7일 경기도 기념물 제216호로 지정되었다.
모락산성은 2002년 및 2005년 세종대학교박물관의 지표조사 결과 자연지형을 최대한으로 이용해 석축 또는 토석 혼축을 병용하여 축조된 길이 878m의 테뫼식 산성으로, 내부시설로는 문지, 망대지, 치성, 건물지, 등이 확인되었다. 유물로는 백제계의 호, 옹, 완 등의 토기편류가 주로 채집되어 한성백제기에 초축된 성으로 확인되었다. 백제 석축성곽 축조의 시원양식을 밝힐 수 있는 중요한 성곽이다.
현지 안내문
의왕모락산성은 해발 385m 모락산 정상에 축조된 백제 한성기 시대 석축산성이다. 산 정상부를 감싸고 있는 태뫼식 산성으로 성벽의 길이는 878m이다.
성벽은 자연·지형을 최대한 이용하여, 경사가 가파른 곳은 자연암반을 이용하였고 경사가 완만한 곳은 안팎으로 석축을 쌓아 올렸다. 북·동·남벽은 비교적 직선을 이루지만, 서벽은 능선과 계곡부를 연결하면서 자연적 지형에 많이 의존하고 있다.
성내의 시설물로는 문지 2개소, 치성 4개소, 망대지 2개소, 건물지 6개소 등이 있다. 성내에서 수습된 토기류는 호, 옹, 심발형 토기, 장란형 토기 등으로 4세기~5세기 무렵 백제 토기이다.
모락산성은 도성인 풍납토성에서 서남부지방으로 통하는 교통로를 통제하고 배후에서 적의 침투로를 견제하는 등 도성방어를 위한 경기 서남부지역 주요 거점 성이었다.
삼국시대에 한성과 한강유역을 가장 먼저 차지한 나라는 백제였다. 백제의 시조 온조왕(?~28)이 기원전 18년에 이 근처를 백제의 수도를 삼은 이후 점차 나라의 기틀을 잡아갔다. 한강유역의 기름진 땅과 편리한 교통의 요충지라는 장점을 살려 주위의 다른 나라와 적극 교류도 할 수 있었다.
백제의 전성시대는 근초고왕(?~375)과 근구수왕(?~384) 부자시절(346~384)이다. 이 시기에 백제는 왕권을 강화하고, 맹렬하게 주위로 영토를 넓혀 나갔다. 특히 북으로는 고구려를 밀어붙여, 371년 평양전투에서는 고구려 고국원왕을 전사시키기도 했다. 남쪽으로 영토를 넓히려는 고구려를 막아내고, 우리나라 서쪽지역을 차지하여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근초고왕 때에는 박사 고흥이 역사책 서기를 편찬하여 백제 사람들의 자긍심을 높였다. 국력이 강해진 백제는 동진과 왜와도 외교관계를 맺으며 국제적으로 지위를 확보했다.
백제는 한성을 수비하기 위해 한강 유역의 구릉에 흙을 쌓아 몇 개의 토성을 만들었다. 3세기를 전후한 시기에 축조된 이 성들을 우리는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이라고 부른다. 이곳은 백제의 수도인 위례성이라고도 하고, 또는 적을 경계하고 방어하거나 공격을 준비하기 위한 방어성이라고도 한다.
백제는 주요 두개 성 주변에 여러 개의 성들을 설치했다. 북쪽으로 고모리산성(경기도 포천)과 월롱산성(경기도 파주), 남쪽으로 설봉산성과 설성산성ㆍ망이산성ㆍ파사성 등, 서쪽으로는 모락산성과 반월산성 등이 있다. 이러한 성들은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을 중심으로 거미줄처럼 뻗어나가는 형태로 배치되어 있는 산성들이다.
한성기 백제의 주요 산성은 산간지대의 자연지형을 최대한 활용하여 정상부를 중심으로 성을 만든 점이 특징이다. 백제 온조왕은 “험한 곳에 의지하여 나라를 지키는 것이 예나 지금이나 세상의 이치이다”라고 했다고 한다. 그러한 예의 하나로 축조된 산성이 바로 우리 의왕시의 ‘모락산성’이다. 현재 모락산성은 경기도 지방기념물 제216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모락산성 북쪽에 해당하는 안양시 귀인동에서는 백제 주거지가 확인되었고, 남쪽의 의왕시 이동과 부곡동에서는 세발토기ㆍ단지ㆍ장군 등의 백제 토기와 생활유적이 발견되었다.
○ 모락산성의 위치와 규모
모락산성은 오전동과 내손동 경계에 위치하는 모락산(해발 385m) 정상부 봉우리를 빙 둘러싸고 조성된 테뫼식 산성이다. 모락산 정상부의 자연지형을 최대한 이용하여 사다리꼴 모양으로 산성을 만들었다. 성벽의 전체 길이는 878m이며, 북ㆍ동ㆍ남벽은 비교적 정연한 직선을 이루고 서벽은 능선과 계곡부의 자연지형을 그대로 살렸어요. 축조방식은 자연지형을 최대한 이용하면서도 부분적으로 바위를 깎아내 수직 경사면을 만들거나 흙을 이용하여 필요한 부분을 성토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어요. 동벽과 서벽 바로 밑으로 각각 우물로 쓰이던 샘터가 한 곳씩 있어요. 모락산성의 성벽 규모와 시설물 현황은 아래의 표와 같습니다.
○ 모락산성 백제유물
아직까지 완전한 발굴조사가 이뤄지지 못했지만 지금까지 채집된 모락산성의 유물 대부분 이 백제시기의 토기류이다. 적갈색의 연질타말문토기와 회청색 격자타날문토기, 회청색 승석문토기와 조족문 토기를 비롯하여 커다란 항아리(대옹)와 오각형의 목 짧은 작은 항아리(단경호)도 발견되었다. 이들은 대부분 음식과 식수를 담아두기 위한 저장용 토기로 추정된다. 특히 발견된 옹과 호의 제작 기법과 조족문 토기 등의 출토로 볼 때 4세기 후반에서 5세기 중후반에 모락산성이 이용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의왕시에서는 모락산성을 복원, 보존하고 박물관을 건립하기 위한 모락산성 종합정비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 모락산성의 역할
모락산성은 한성기 백제 초기에는 백제의 중앙세력이 경기 남부지역으로 진출할 때 중요한 전진기지 역할을 수행하고, 고대 국가의 기틀을 확립한 뒤에는 풍납토성을 방어하는 도성방어체계의 일환으로써 도성의 서남부 지방의 교통로를 통제하고 유사시에 적의 침투로를 배후에서 견제하는 방어의 중심지 역할을 담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박철하]의왕의 어제와 오늘: 지역 정체성을 조명하다
내고장 역사 바로 알기 글에서
편집자주: 박철하 선생은 의왕시 오전동 전주나미마을 345번지에서 태어난 의왕 토박이로 고천초, 안양중, 유신고를 거쳐 고려대 사학과와 숭실대 대학원 사학과를 졸업했으며 '1920년대 사회주의 사상단체. 전국 군 이상 지방에서 활동했던 계급의식이 있는 청년들의 반일운동과 사회혁명운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대통령소속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 전문위원과 경기도교육청 역사교육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냈으며 현재는 참여와 자치를 위한 의왕풀뿌리희망연대 공동대표, 의왕문화원 부설 향토문화연구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안양지역얘기 > 담론'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박철하]1800년 전후 신자들 모였던 의왕 하우현성당 이야기 (0) | 2025.03.24 |
---|---|
[박철하]의왕향토사료관이 번역 배포한 김직연의 연사록과 연행록 (0) | 2025.03.24 |
[빅철하]6명의 정승을 배출한 의왕 왕곡동 청풍김씨 문중 이야기 (0) | 2025.03.24 |
[박철하]의왕 능안마을 임영대군 묘역과 사당 (0) | 2025.03.24 |
[박철하]고려말 의왕 청계사를 중창한 조인규 이야기 (0) | 2025.03.24 |
[박철하]의왕시 이동 오봉산 청동기 마을 유적과 고인돌 (0) | 2025.03.24 |
[박철하]의왕의 어제와 오늘: 역사와 지역정체성 (0) | 2025.03.24 |
[이승언]安養의 由來_안양문화 제4호 글(1985.12.31) (0) | 2025.03.22 |
[최병렬]군포장(軍浦場) 역사와 군포장 지도 변화(2025.03.01) (1) | 2025.02.28 |
[최병렬]안양사(安養寺)와 7층 전탑지 발굴 현장 기록 (0) | 2025.02.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