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안양시 만안구 석수동 212-1번지 옛 유유 안양공장이 세워진 중초사(中初寺) 터가 고려 태조 왕건(877~943)이 세운'안양사'(安養寺) 였다는 사실이 안양사 명문기와 발굴에 어어 문헌속 안양사 7층 전탑 터가 1100년 만에 발굴됨으로써 확인됐다.
재단법인 (재)한울문화재연구원(원장 김홍식, 이하 한문연)이 2010년 8월 유유 안양공장 부지에 대한 1, 2차 발굴조사를 통해 고대가람 안양사 흔적을 찾고 문화재청이2020년 8월 4일 현장에서 지도위원회를 열고 실체를 확인함으로써 안양이란 지명이 고려시대 안양사에서 유래했다는 사실까지 알게 됐다.
'안양(安養)' 지명의 유래가 된 '안양사(安養寺)'는 '동국여지승람' 금천불우조(衿川佛宇條)에 삼성산에 '안양사(安養寺)가 있어 남쪽에 고려태조가 세운 7층 전탑(벽돌탑)이 있다'고 기록돼 있다. 또 '신증 동국여지승람'에는 '승려 천명이 불사를 올렸다'고 기록돼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세운 안양사 실체 1100년 만에 확인
안양사 터는 역사적으로 중초사지로 불리우며 유유 안양공장이 자리했던 곳으로 안양시가 2007년 매입했으며 한문연이 지난 2009년 6월부터 발굴을 실시하여 왔다.
2009년 6월-10월까지 4개월간 통일신라부터 조선시대까지 존속했던 대사찰 중초사지 및 안양사지에 대한 1차 발굴조사를 통해 정면 9칸(41.4m) 측면 3칸(14m)의 대형 강당지와 승방지, 동.서 회랑지 등이 발굴되고 강당지 북쪽에 위치한 승방지에서 '안양사명문와편'(安養寺銘文瓦)을 발견했다.
향토사학자들은 '중초사'와 문헌속 '안양사'의 의문을 제기해왔다. 이는 발굴 현장에서 약 700미터 정도 떨어진 인근에 현재 '안양사'라는 자그마한 사찰이 존재하고 있으며, 유유 공장 부지인 같은 절터에 통일신라시대의 중초사와 고려시대의 안양사가 각각 존재했다는 역사적 사실에서 비롯했다.
이곳에는 국내 현존하는 당간지주 중 유일하게 조성연대를 확인시키는 명문이 새겨진 중초사지당간지주(보물 제4호)와 중초사지삼층석탑(지방문화화재 격하)이 존재해 중초사지로 인식돼 왔으나 향토사학자들은 문헌속 '안양사' 일 것이라고 주장해 왔다.
이후 2010년 6월-8월까지 33일간 진행된 2차 발굴 조사에서 '신증동국여지승람'등 기록속의 안양사 7층 전탑(塼塔)의 터와 흔적들이 1100년만에 그 실체를 드러냄으로 고려시대 태조 왕건이 세운 '안양사' 였음을 확인시키며 역사문화의 보고임을 증명했다.
2차 발굴조사에 발견한 안양사 7층 전탑지는 공장 사무동과 공장동 건물 중간으로, 남쪽 방향으로 쓰러진 형태로 벽돌-기와-벽돌 순으로 쌓여있어 옥개석(屋蓋石·지붕처럼 덮는 돌) 위에 기와를 얹었던 것으로 추정돼 전탑의 구조와 축조방식도 어느 정도 파악됐다.
전탑지에서 출토된 전(塼)은 28×28×4.5cm의 방형, 28×14×4.5cm의 장방형, 38×14×4.5cm의 오각형 등 세 가지 형태로, 전의 크기는 안동 동부동 5층 전탑에 사용된 장방형 전의 크기와 거의 같아 통일신라 당시 전의 크기가 규격화 됐을 것으로 추정됐다.
한문연 조사 관계자는 “전탑지 남쪽으로 다수의 전돌과 기와 폐기층이 확인돼 수습조사를 진행하던 중 전탑이 폐기될 당시 전탑의 옥개석을 중심으로 측면부가 일괄로 무너져 내린 모습이 확인됐다”며 “탑신으로 추정되는 부분이 폐기 당시 그대로 무너져 내려 답보 위로 깔리면서 탑신 외면이 그대로 폐기된 것으로 판단된다”고 설명했다.
안양사지 전탑은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의 역사서에 기록되어 있었으나, 실체는 오랫동안 확인되지 않았다. 기록에 의하면
안양사지 전탑은 벽돌을 포개서 칠층을 쌓고 기와로 덮은 탑으로 제1층 밑에는 12칸의 공간이 있었고, 벽마다 부처와 보살 등의 화상이 그려져 있었다. 또 고려말 최영장군이 '안양사칠층전탑'을 보수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2차 발굴조사를 통해 금당지와 전탑지, 답도, 중문지 등을 추가로 발굴함에 따라 승방-강당-금당-전탑-중문으로 이어지는 고려시대 가람배치와 관련 중심사역의 건물배치를 추정할 수 중요한 단서를 얻었으며, 전, 막새류, 청자연봉, 청자상감 뚜껑편 청자 접시편, 청자 저부편 등을 무수히 발굴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특히 중문지의 전반적인 모습을 밝혀낸 것은 큰 성과로 꼽힌다. 중문지 규모는 현재 정면 3칸 측면 2칸까지 확인됐으며, 동쪽으로 옛 유유산업 건물이 자리하고 있어 확인이 어렵지만 기단 규모로 볼 때 정면 5칸 측면 2칸의 건물지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드러났다. 이같은 규모는 경주 황룡사지 발굴조사에서 확인된 중문지와 같은 것으로 당시 안양사의 사세가 상당했음을 반증한다. 또 강당지 남쪽 금당지는 초석이나 기단이 확인되지는 않지만 적심의 크기나 주칸 거리로 볼 때 상당한 규모의 건물지로 추정되며, 금당지의 정확한 규모를 확인하기 위해선 동쪽과 서쪽으로의 확장조사가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문헌에 언급된 석교의 부자재가 확인됨에 따라 석교 역시 주변에 위치했었음을 추정케 했다. 또 현재 확인되는 안양사의 사역범위가 옛 유유산업 부지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주변지역으로 확대될 가능성이 높으며, 조사대상 지역 내부 역시 통일신라, 고려, 조선 등 여러 시기의 문화층이 존재했음도 밝혀졌다.
"안양사 가람 경주 황룡사와 같은 규모로 상당했다"
한문연은 "이번 2차 발굴을 통해 안양사는 황룡사에 버금가는 대규모 사찰로, 경기서남부에 이 같은 규모의 사찰이 발굴되기는 처음이다"고 강조하며 "150미터 떨어진 안양예술공원 주차장옆에 있는 마애종도 안양사와 연관된 것으로 보여 안양사 경내가 옛 유유산업 부지 경계를 넘어 인근 지역까지 포함되는 대규모 사찰임을 보여준다"고 밝혔다.
또한 "고려시대인 900년에 창건된 것으로 기록된 안양사와 통일신라시대인 제42대 흥덕왕(興德王) 2년인 827년 세워진 것으로 알려진 중초사(中初寺)와의 관계를 알아내는 것도 과제로 정확한 규모를 확인하기 위해 추가 발굴조사를 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안양사 터 인근에 있는 마애종은 국내에 유일하게 현존(경기도 유형문화재 제92호)하는 것으로 암벽(535×505cm)을 다듬어 '승려가 범종을 치는 장면'을 음각과 양각을 활용하여 새긴 암각화로 당시 사찰 경내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돼 그 규모를 짐작케 한다.
한문연은 "1100년 만에 실체가 확인된 안양사의 존재는 안양시 정체성과 직결되는 역사적 사안으로 문화재 발굴 자체를 장기적 과제로 인식하고 교육체험의 장으로 활용하는 등 새로운 접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날 지도위원회에 참석한 전문가들은 현장에서 안양사가 경주 황룡사에 버금가는 대규모 사찰임을 확인하면서 "금당지의 정확한 규모를 확인하기 위해 동쪽과 서쪽으로의 확장 등 발굴지역 확대 조사가 필요하고, 정밀 발굴조사도 실시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안양의 역사와 정체성 찾기 결국 안양사 찾아냈다
1천여명에 달하는 스님들이 세상평화을 기원하고 수행했던 안양사(安養寺) 흔적이 땅 밑에서 잠자다 1천년만에 새상밖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 한 석공이 암벽에 종을 치는 스님을 새겨 넣으면서 꿈꿨던 마애종에 담겨진 안양세계(安養世界)가 깨어나고 있다.
안양시는 2007년 6월 (주)유유와 240억원 3년 분할로 해당부지를 매입했다. 이후 한국의 손꼽히는 건축가인 김중업(金重業,1922∼1988)씨가 설계해 1959년 5월 준공한 산업건축물인 공장 건물을 복합문화공간으로 조성하기에 앞서 발굴 조사를 벌여왔다.
이는 지역 문화예술계에서 '안양(安養)' 지명의 유래가 된 '안양사(安養寺)'를 재조명하려는 움직임속에 지역원로인 정덕한(67)씨가 안양의 역사를 바로 잡을 수 있을 만한 유물이 매장돼 있을 것이라며 발굴조사를 요청하는 청원을 시에 제출하면서 시작됐다.
결국 문헌속에서만 기록돼 있던 안양사 실체가 사실로 확인되고 그 규모가 예상밖으로 커 현대 산업건축물을 문화유산으로 활용하려던 안양시 계획에 차질이 불가피하며, 유유부지 활용문제도 새로운 변화가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특히 문화재관리법이 없던 1950년대 절터에 공장이 건축되면서 소중한 문화유산이 마구잡이로 훼손된 사실도 발굴과정에서 드러났다. 그나마 문화재적 가치가 높은 청동용두와 사자향로발 등 당시 발굴된 유물들이 현재 (주)유유 서울 본사에 전시돼 있다.
안양 中初寺址와 安養寺址의 유적 유물에 대한 考察
안양 중초사지에는 명문이 새겨진 당간지주와 함께 삼층석탑 등이 남아있어 오래전부터 관심의 대상이 되어 왔다. 그리고 신라시대 창건된 유서 깊은 사찰로 여러 문헌에 고려시대 들어와 이 지역의 중심적인 사찰로서 전탑이 건립된 안양사와는 다른 사찰로 이해되어 왔다.
그동안 중초사지는 공장의 입지와 한국 현대 건축사에서 의미 있는 건물들로 인하여 발굴이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그런데 2008년부터 2011년까지 총 4회에 걸쳐 중초사지에 대한 발굴 조사가 실시되었는데, 그 결과 새로운 사실들이 밝혀지기도 했지만 또 다른 연구 과제가 생성되었다.
먼저 사역 전체에 대한 발굴 조사가 실시되지는 못하였지만 사지의 규모를 비롯한 금당지와 강당지 등의 건물지, 전탑지, 답도 등이 출토되었다. 특히, 그동안 다른 사찰로 이해되었던 중초사와 안양사가 중창 이후 사명을 바꾸었으며, 기록으로만 전하던 안양사 전탑지가 확인되었다.
이처럼 문헌에 전재되어 있는 안양사 7층전탑이 건립된 사찰이 이곳이었고, 마애종도 안양사에 소속되었으며, 현재의 안양사는 암자였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추정되었다. 그래서 유력한 고승의 부도와 탑비가 외곽에 있었던 암자 인근에 건립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추정되었다.
중초사는 신라시대 처음 창건되어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는데, 고려 건국 직후 그 자리에 다시 안양사가 새롭게 중창되었고, 조선전기까지 법등을 이으면서 이 지역 불교 신앙의 중심적인 역할을 하다가 조선후기에 폐사된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중초사와 안양사의 창건 배경과 종파, 사역의 전체 규모, 삼층석탑의 소속 사원과 성격 등은 여전히 미해결의 과제로 남아 있다. 앞으로 지속적인 관심과 연구 등을 통하여 미해결 과제들이 해결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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