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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봉산 아기장군바위(일명 장군바위)가 사라졌다

오봉산 아기장군바위(일명 장군바위)가 사라졌다 [04/08 의왕향토문화연구소 카페] 아기장군바위(일명 장군바위)가 사라졌다. 오봉산 북서쪽 군포시와의 경계 지점에 있던 아기장군 바위가 도로 확장 공사로 인하여 사라졌다. 명지외고에서 시멘트 야적장 방향으로 이어지던 오솔길 오른쪽(군포시쪽)에 박혀있던 길이 3미터, 폭 2미터, 높이 2미터 정도의 바위가 아파트 단지 공사로 인한 도로확장시에 사라져버린 것이다. 이 바위에는 거인 발자국처럼 보이는 흔적이 남아 있었는데, 이 때문에 장군바위 또는 아기장군바위라는 이름과 함께 전설이 전해지고 있었다. 이 곳에서 30년간 살았다는 최병희 할머니(82세)는 "바위가 워낙 커서 아파트 단지 공사가 거의 끝날 때까지도 그대로 있더니, 어느 날 보니 파 가고 없더라"고 ..

[자료]의왕시 '儀旺'을 '義王으로' 어때요

[기사]의왕시 '儀旺'을 '義王으로' 어때요? [02/23 시민연대]주민의견 수렴 나서 의왕시 지명이 '義王'으로 바뀐다. 시는 '의왕(儀旺)'이라는 시명을 일제강점기 이전 지명인 '의왕(義王)'으로 변경키 위해 3월16일부터 31일까지 관내 5만1천200여가구를 대상으로 주민의견 수렴에 나설 계획임이 3.1절을 앞두고 알려져 관심을 끌고 있다. 시는 지난해 11월 의왕시의회가 시명을 의왕(義王)으로 변경키로 의결한 바 있으며 이번 의견 수렴과정을 통해 주민의 80% 이상이 찬성할 경우 시는 시명 변경에 대해 도(道)지명위원회를 거쳐 경기도와 행정자치부에 시명 변경을 건의할 예정이라는 것이다. 본래 광주군 의곡면(義谷面)과 왕륜면(王倫面)의 앞글자를 따 온 '儀王'이 옛 문헌이나 금석문에 '의왕(義王)'..

[자료]안양지역 옛길 흔적을 함께 걸으실까요

옛길을 걷는다면 한편 역사를 걷는 것이다. 최근 옛길을 따라 걷는 이들이 많아졌다. 대동여지도와 대동지지에 나타나 있는 태평원(太平院)과 석원(石院) 사이의 옛길. 원(院)은 조선시대 정부에서 만든 관용 숙소로 지금으로 말하면 관사와 비슷하다. 대로에는 조선시대 주막과 여인숙 기능을 했던 원(院), 말을 갈아타고 길 관리를 했던 역(驛), 역을 관리했던 찰방(察訪) 터와 각종 비석·장승·서낭당·당산나무 등 길과 관련한 흔적이 길손들을 반기고 여행자에게 또 다른 재미를 던져줄 것이다. 옛길을 도보로 걸어본 사람들은 말한다. 길에 얽힌 역사와 길 위의 사람들, 사라져 가는 문화를 직접 보고 국토를 재발견하고 민족의 숨결을 느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사라져 가는 옛길을 복원하고 이 길에 보행자도로를 만들어 걸..

[자료]신성학원 역사 이렇습니다

[자료]신성학원 역사 이렇습니다 [08/31 안양광역신문] 신성학원 역사 이렇습니다 信聖의 뿌리는 聖林이 眞實이다. 한간에 안양 교육계를 뒤흔들고 있는 신성 문제를 놓고 교육계의 원로이시고 信聖(구 東中)설립의 신파 역할을 하신 분 중 한 분을 만나 말 많은 信聖의 뿌리를 알아 볼 수 있었다. ☆.선생님은 신성과 언제부터 인연이 맺어지게 되었습니까? 나는 1967년 신성의 전 신인 聖林高等公民學校부터 시작해서 1970년 안양동중으로 승격시켜놓고 1974년에 그 학교를 그만 두었습니다. ☆.그럼 지금 하시는 일은? 1999년 교원 정년단축 바람에 명퇴를 당하고 지금은 교육계에서 물러 나와 있습니다. ☆.안양문화원에 관계하고 계시다는데? 예 지금 이곳 저곳 사회에 봉사 좀 하고 있습니다. ☆.지금 안양교육계..

[자료]안양권 상공업 발전과정(관광업)

[자료]안양권 상공업 발전과정(관광업) [01/03 시민연대]안양상공회의소 자료중에서 발췌 관광산업의 여건 및 현황 안양권은 관악산, 수리산과 청계산을 끼고 있어 시민들에게 풍부한 자연 휴식공간을 제공할 수 있는 입지적 잇점을 가지고 있다. 또한, 서울에 인접해 있는 잇점을 활용하여, 서울대공원, 서울랜드 및 서울경마장 등 대규모 레저시설이 입지해있어 주민들의 편의를 도모하고 있다. ............................................ 안양시 관광객 및 관광수입 변화 추이 표 III-5-1 관광객 (명) 관광수입 (백만원) 합계 내국인 외국인 합계 내화 외화 1981 719,605 704,709 14,896 1,846 1,616 230 1986 291,948 264,892 27..

[자료]안양권 상공업 발전과정(운수.통신업)

[자료]안양권 상공업 발전과정(운수.통신업) [01/03 시민연대]안양상공회의소 자료중에서 발췌 운수·창고 및 통신업 안양권의 운수·창고 및 통신업은 산업의 발전과 함께 성장해왔다. 안양권 운수·창고업 종사 사업체수는 1981년 72개 사업체, 종업원 3,403명에서 1998년 6,450개에 23,315명이 종사하는 거대한 산업으로 빠른 성장세를 보였다. 운수업·창고업은 72개 사업체에서 6,324개로 증가하여 연평균 27.7%의 높은 성장률을 보였다. 종업원수도 1981년 3,403명에서 20,560명으로 증가하여 연평균 8.4%의 신장세를 기록하였다. 이와 같은 수치는 안양권이 서울로 진입하는 길목에 입지하고 있어 이 지역의 물류기지로서의 중요성이 높아지고 부곡 복합화물터미널등 대형 물류기지들이 입지..

[자료]안양권 상공업 발전과정(금융업)

[자료]안양권 상공업 발전과정(금융업) [01/03 시민연대]안양상공회의소 자료중에서 발췌 금융의성장 해방 이후 우리나라 금융산업은 사회불안과 높은 물가상승 가운데 혼란을 겪으며 출범하였다. 1950년 중앙은행법과 일반은행법의 제정 등 금융제도를 정비하면서 현대적인 체제를 정비하였다. 그러나, 곧이어 터진 한국전쟁으로 금융제도가 정착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전쟁이후 전쟁복구를 위해 산업은행이 설립되고, 1957년에는 현대적 의미에서 최초의 거시 금융정책이라 할 수 있는 재정금융안정화계획을 수립하면서 안정적인 단계로 진입하기 시작하였다. 정책이 효과를 거두면서 금융기관들이 어느 정도 안정을 찾아갔으나 4·19혁명, 5·16 혁명 등 정치적 혼란으로 금융계가 전체적으로 위축되었다. 開發年代에는 경제개발을 위..

[자료]안양권 상공업 발전과정(유통업)

[자료]안양권 상공업 발전과정(유통업) [01/03 시민연대]안양상공회의소 자료중에서 발췌 시장변천과정 시장이란 물건을 사고 파는 장소로서 자급자족 경제를 탈피한 경제권에서는 물건의 교환을 위해 생활의 필수적인 사회제도의 하나로 존속해 왔다. 우리나라에서 물물교환의 단계를 넘어 물건의 매매가 이루어진 시장의 틀이 잡힌 것은 화폐의 보급이 일반화되기 시작한 조선조 태종 이후로 추정된다. 당시 시장은 한양에 공랑상점인 시전과 6개의 어용상점인 육의전, 그리고 지방에는 정기시장으로 5일장이 대부분이었다. 조선시대의 사농공상 직업관은 시장의 발달에 부정적 영향을 끼쳤으나, 중종, 명종대에 들어서 전라, 충청, 경상 등 삼남 각지에 장시가 형성되기 시작하여 순조 때는 전국적으로 약 1,000여 개의 장이 서고 있..

[자료]안양권 상공업 발전과정(광공업)

[자료]안양권 상공업 발전과정(광공업) [01/03 시민연대]안양상공회의소 자료중에서 발췌 개황 안양권 광공업의 발전은 안양권 지역의 인구증가와 맞물려 있다. 그리고 안양권 지역의 인구변화 및 광공업의 발전은 중앙정부의 경제정책, 그리고 수도권정책 등과 맞물려 궤를 같이 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나라 전반적인 추세이지만 1970년대 국가공업화 정책 이전에는 안양권 지역의 광공업부문에 대한 뚜렷한 신장세는 발견되지 않는다. 일제 초창기 한국에 진출한 일본자본은 주로 일본국내에서 독점에 의해 밀려난 군소자본이었다. 그러나 일본 독점자본은 1930년대에 접어들면서부터는 해외진출이 시작되었고, 특히 한국이 그 주요 대상지였다. 이런 영향으로 안양에도 최초로 1932년에 안양1동 舊 大農터에 朝鮮織物株式會社..

[자료]1980년대 안양지역 문화운동의 주역들

[자료]지난 80년대 안양지역 문화운동의 주역들 [12/29 시민연대]미술문화운동에서 창작 그림책 만들기 2004년 1월 3일부터 한달간 경기문화재단 아트센터에서 열릴 예정인 "창작원화전, 그림책에서 소리난다"전의 작가 대부분이 지난 80년대 안양지역에서 문화운동을 펼쳤던 주역들로 구성되어 있어 시간의 흐름속에 파묻힌 흔적들을 찾아 그들의 발자취를 따라가 본다. 요즘 서점에 가보면 진열대에 그림책들이 가득하다. 10여년 전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그림책이 많다. 대부분 번역그림책들이지만 새롭고 좋은 우리그림책도 많다. ‘창작그림책’이라는 불모지에 발을 내딛고 개척해온 그림책 작가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영화계에서스크린 쿼터제를 통하여 한국영화를 지키고자 한것처럼 번역그림책의 범람으로부터 창작그림책을 지켜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