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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원]안양의 옛 마을 지명 이야기

[정진원]안양의 옛 마을 지명 이야기 우리나라 지명, 특별히 마을이름의 역사에서 볼 때 1914년은 마을이름의 ‘창촌개명(創村改名)’의 해였다. 일제에 의한 이른바 ‘창씨개명(創氏改名)’이 우리네 선조들을 모욕한 것이라면, 창촌개명은 우리네 땅을 더럽힌 하나의 큰 사건이었다. 일제는 당시 7만여 개 정도의 우리나라 마을(구동리)을 2만여 개 정도의 신동리로 통폐합하였다. 세 개 정도의 마을을 합쳐서 하나의 신동리를 만들고, 거기에 어김없이 한자 이름을 붙였다. 그때 순수소박한 우리말 마을이름이 잡종생경한 한자 동리 이름으로 바뀌었다. □수푸르지 [숲골>숲울>수푸르지, 임곡(林谷)] 지금 안양역 동쪽 지역 안양1동 주민센터를 중심으로 한 아파트 자리에 일찍이 정기시장이 형성되었다. 안양에서는 유일한 시장이..

[정진원]의왕의 옛 마을 지명 이야기

[정진원]의왕의 옛 마을 지명 이야기 우리나라 지명, 특별히 마을이름의 역사에서 볼 때 1914년은 마을이름의 ‘창촌개명(創村改名)’의 해였다. 일제에 의한 이른바 ‘창씨개명(創氏改名)’이 우리네 선조들을 모욕한 것이라면, 창촌개명은 우리네 땅을 더럽힌 하나의 큰 사건이었다. 일제는 당시 7만여 개 정도의 우리나라 마을(구동리)을 2만여 개 정도의 신동리로 통폐합하였다. 세 개 정도의 마을을 합쳐서 하나의 신동리를 만들고, 거기에 어김없이 한자 이름을 붙였다. 그때 순수소박한 우리말 마을이름이 잡종생경한 한자 동리 이름으로 바뀌었다. *사그내 [사근천(沙斤川), 사천, 모래내] 지금 의왕시 고천동이 그때 이름 붙여진 신동리이다. 그 신동리 안에 가장 큰 마을이 ‘사그내’였다. 지금 고천초등학교, 전 의왕..

[정진원]과천의 옛 마을 지명 이야기

[정진원]과천의 옛 마을 지명 이야기 우리나라 지명, 특별히 마을이름의 역사에서 볼 때 1914년은 마을이름의 ‘창촌개명(創村改名)’의 해였다. 일제에 의한 이른바 ‘창씨개명(創氏改名)’이 우리네 선조들을 모욕한 것이라면, 창촌개명은 우리네 땅을 더럽힌 하나의 큰 사건이었다. 일제는 당시 7만여 개 정도의 우리나라 마을(구동리)을 2만여 개 정도의 신동리로 통폐합하였다. 세 개 정도의 마을을 합쳐서 하나의 신동리를 만들고, 거기에 어김없이 한자 이름을 붙였다. 그때 순수소박한 우리말 마을이름이 잡종생경한 한자 동리 이름으로 바뀌었다. □제비울 [참새울, 까치울, 노루울, 가래울, 가재울] 제비, 참새, 까치가 많은 마을이라서 제비울, 참새울, 까치울이 되었을 것이다. 제비는 착한 마음씨의 사람을 좋아해서..

[최태술]안양과 設農湯(설농탕)

안양과 설렁탕 안양에는 유명한 설렁탕집이 있었다. 이름하여 경민식당이다. 70~80세 정도의 어르신 좀더 내려온다면 60대의 안양토박이들은 거의 안다. 안양역 구 도로변에 있는 식당에서 가마솥을 걸고 24시간 끓여 진하고 뒷맛까지 깔끔한 그 맛을 잊지 못하는 분들이 지금도 경민식당 설렁탕 이야기를 한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그 유래는 이러하다.안양 동안구 평촌에는 귀인동이 있다. 이 동 이름이 글자 그대로 귀인(貴人)들이 살던 곳이어서 귀인동이다. 이곳에 살던 귀인이란 宮中에서 宮人으로 생활하다 퇴역하신 분들이다. 또 지금의 수촌 뒤 내씨들이 살았다. 두 곳 다 퇴역한 궁인들이 생활하면서 궁중에서 하던 설렁탕을 끓여 당시 한양으로 오가는 길손에게 팔기 시작한 것이 안양 설렁탕이 유명해진 발단이라 한다.궁인..

[조성현]고려최영(崔瑩)장군과 ‘안양사칠층전탑’

고려최영(崔瑩)장군과 ‘안양사칠층전탑’ 기록 속 태조왕건이 세우고 고려말 최영장군이 ‘안양사칠층전탑’을 보수했다고 등장하는 고려안양사. 좌측상단 사진은 전탑지의 전탑이 주저앉아 무너져 폐기된 전과 기와편들의 양상으로 전탑을 장식했던 것으로 보이는 고려백자 연봉(연꽃봉우리 장식, 우측상단 사진) 등 다량의 매장문화재가 노출되어 고려 안양사의 실존을 증거하고 있다. 고려안양사에는 삼층석탑과 전탑이 사찰의 중심공간인 금당지 앞에 나란히 자리했던 것으로 분석된다. 고려안양사의 석탑과 전탑지는 김중업박물관(구,유유부지, 문화누리관인근)에서 만나볼 수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옛시문 속에서 고려 명종때 문신 김극기(金克己, 1150~1204)는 고려안양사를 방문하고 “걸어서 아름다운 다리를 지나 감색으로 붉게 ..

[조성현]고려시대 안양사지(安養寺址)출토 용도미상의 철제동물장식(鐵馬)에 대한 고찰

고려시대 안양사지(安養寺址)출토 용도미상의 철제동물장식(鐵馬)에 대한 고찰 안양시문화해설사 조성현 □들어가는 말 2014년 갑오년(甲午年) 말(馬)의 해를 맞아 안양시 석수동 안양예술공원 초입 고려안양사지(구,유유부지/ 현,‘김중업박물관’복합문화단지)발굴 및 출토된 용도미상의 철제동물장식인 ‘철마(鐵馬, 철제말장식)’를 타도시의 사례를 고찰하여 그 성격과 (추정)용도를 규명하고자 한다. 철마는 말의 형태를 본 따 용해된 철을 부어 주조한 것을 말한다. 타 지역의 출토 고려시대 철마의 사례분석결과 철마는 신령스런 기운을 가진 신마(神馬)로서 호랑이 출연이 잦은 지역에서 호랑이로부터 화를 당하는 것(虎患)을 회피하는 등 교통의 안전을 확보하는 기능과 함께 민간신앙의 양상을 보이고 있다. 철마는 철제로 만든 ..

[의왕]100년 역사의 흔적이 있는 하우현성당

100년 역사의 흔적이 있는 하우현성당 하우현(下牛峴)성당은 본당 설립 100년이 넘는 역사에 안양지역 천주교 전파의 첫 머리를 차지하는 의미 있는 곳이다. 신도수 200여명에 성당 규모는 전국 본당 성당 중 가장 작은 성당이지만 이 곳은 한국천주교뿐 아니라 근대역사의 흔적뿐 아니라 한국과 프랑스 건축양식을 절충한 한옥 사제관을 통해 근대사적 건축양식까지 만날 수 있는 역사 깊은 성당이다. 하우현(下牛峴)은 1884년에 공소 공동체의 모습을 갖추고, 프랑스 파리외방전교회에서 파견된 프랑스인 귀스타브 샤를 마리 뮈텔 신부 등이 정기적으로 순방하였다. 이때까지도 한국 천주교는 박해하에 있었기 때문에, 뮈텔 신부는 상복으로 변장하고 은밀히 하우현을 방문하였다. 조불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된 1886년 이후, 한국에..

[의왕]청계사 '조정숙공사당기비' 알아본다

청계사 '조정숙공사당기비' 알아본다 고려 충렬왕의 문신으로 청계사 중창주인 정숙공(貞肅公) 조인규(1237-1308)와 청계사와의 관련을 기록한 청계사 조정숙공사당기비(종중 신청/ 청계사 동의)가 경기도 문화재 자료로 지정됐다. 경기도는 2014년 5월 9일 1899년 봉은사(서울)로 옮겨졌다가 100여년이 지난 2013년 5월 원래 자리인 장경사로 돌아온 남한산성 장경사 동종 등 13점을 ‘경기도 문화재’로 지정했다. 경기도는 경기도문화재위원회 유형분과에서 장경사 동종(강희 21년명 장경사 동종), 의왕 청계사 사적기비, 남양주 흥국사 영산전 등 13점을 경기도 지정문화재로 의결하고, 수원시 화성박물관 소장 홍재전서 등 7점을 예비 지정했다고 밝혔다. 경기도가 이번에 지정한 도 문화재는 ▲강희 21년명..

[최병렬]안양 수푸루지 마을과 옛 다운타운 이야기

안양 수푸루지 마을과 옛 다운타운 이야기 ● 안양 수푸루지 마을의 이야기 임곡마을은 안양8경중 제1경인 '망해암 일몰'을 볼 수 있는 비봉산이 품고 있는 곳이다. 대다수(임곡 1.2지구) 지역이 주거환경개선으로 아파트가 들어섰지만, 임곡3지구에는 아직 사람이 한명 지나갈 정도로 아주 좁은 골목길과 기와집, 철지붕집, 판잣집, 양옥집, 다세대, 다가구 등 마치 건축물의 변천사를 한 공간에서 볼 수 있다. '수푸루지'(林谷洞)는 마을은 깊은 골짜기에 나무와 숲으로 둘러싸인 고을이라 하여 칭하였다고 한다. 또 마을 앞으로 큰 하천(안양천, 임곡천)이 흐른다 하여 ‘수풀내(林川)’라 부르기도 하였다. 예전에는 수푸루지 내에서도 동쪽지역을‘건너말’, 서쪽지역을 ‘아랫말’, 북쪽지역을 ‘웃말’이라 칭했다. 또 마을..

[조기찬]1970년대 초 안양읍내 이야기

[조기찬]1970년대 초 안양읍내 이야기 지금이야 전국 어느 곳의 어떤 도로라도 잘 포장되어 있고 저 시골구석의 차량은 물론이고 리어커도 잘 다니지 않는 길도 모두들 잘 포장이 되어있어 마음만 먹으면 하루종일 발에 흙을 묻히지 않고 돌아 다닐 수 있지만 60년대 말 70년대의 초 우리나라 도로포장 상태는 서울의 사대문 안과 중요한 국도와 간선도로만이 포장 되어있을 정도라서 그밖의 도로는 도로상태가 엉망이어서 차량이 지나가면 맑은 날에는 흙먼지가 날리고 비가 오는 날이면 웅덩이에 고인 물로 지나가는 차량에 의해 흙탕물을 뒤집어 쓰는 것이 예사인 그런 시절이었다.70년대 초반시절 서울과 수원을 이어 연결하고 서울의 외곽을 형성하며 폭발적인 발전을 앞두고 있던 안양은 아직까지는 시로 승격을 하지는 못했지만 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