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보따리 506

[기억-정진원]덕장초등학교의 추억, 분유와 디디티

초등학교의 추억, 분유와 디디티 모두가 6ㆍ25 전쟁 이후에 시골 초등학교에서 벌어졌던 일들이었다. 요즘하고 달라서 당시 시골의 초등학교는 새로운 변화와 놀라운 쇄신의 중심점이었다. 우선 책상과 걸상이 있는 교실이 얼마나 기이한 공간이었던가. 언제 의자라는 것에 앉아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유리창이 있는 교실, 기다란 복도, 잃어버리면 어쩌나하면서 고무신을 얹어놓곤 했었던 복도 끝에 있었던 신발장, 분필과 흑판, 처음에 낯설었던 동무들 등이 모두 예사로운 것들이 아니었다. 바야흐로 배워서 알게 되는 신학문의 깊은 맛을 무엇에 비견할 것인가. 양주동이 영어 문법 공부의 처음에 나오는 3인칭의 의미를 알기 위해서 눈길 얼마를 걸어가서 그 뜻을 배워 알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지 않은가. 너와 나를 뺀 우수마발..

[기억-정진원]학의천은 알몸일 때까지만 벌모루 개울이었다

알몸일 때까지만 벌모루 개울이었다 청계산 청계사 옆 골짜기에서 시작된 작은 실개울 물은 상청계ㆍ중청계ㆍ하청계를 거치면서 물이 조금씩 불어나 한직골 옆에 이른다. 하우고개, 원터, 독쟁이 쪽에서 내려온 물도 한직골 조금 아래쪽에서 그 물과 합쳐졌다. 광교산 바라산 골짜기에서 흘러내린 물과 능안 쪽 모락산에서 내려온 물이 백운호수에 고여 있다가 무넘기를 넘쳐 내려서 삼벌내에서 다른 두 물줄기와 합해서 아래로 흘러내렸다. ‘삼벌내’라니, 세 갈래의 물이 합쳐져서 된 시내라는 뜻인가 보다. 이 물줄기가 양지편 앞, 벌모루 앞을 지나 흐르는데, 안양 쪽으로 흘러가므로 안양천이라 부르다가 지금은 학의천이라 한다. 덕장골 안의 두 실개울, 우리 집 옆을 흘러내린 물과 동편 사당골에서 흘러내린 물이 벌모루에서 학의천과..

[기억-정진원]1912년 안양에 전기 처음 들어온 기억

등잔불에서 전등불까지 등잔불. 그것은 따듯하고, 푸근했다. 그 불빛은 지나칠 것도 없고, 그렇다고 못 미칠 것도 아니었다. 디테일한 것은 과감히 소거해 버리고, 아주 대국적으로 사물을 보게 했다. 대서특필(大書特筆)만 돋보기 없이 볼 수 있을 정도의 어스름이었다. 등잔불에서는 할머니와 어머니와 사랑방 머슴의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등잔은 대개 백색 자기였다. 뚜껑에는 창호지를 말아서 심지를 박는다. 밖으로 조금 잡아 빼서 끝을 조금 남기고 가위로 잘라낸다. 등잔은 등잔걸이 위에 놓는다. 가늘고 약한 불이어서 콧숨만 조금 크게 내어도 꺼졌다. 켜 있을 때는 있는 둥 마는 둥 했었지만 막상 꺼지고 나면 갑자기 칠흑 같은 어둠이 방안에 가득했었다. 그러면 됫박 성냥 알을 찾고, 화로에 남은 불씨를 찾다보면 ..

[자료]1919년 3월 군포에서도 3.1만세운동 있었다

1919년 3월 군포에서도 3.1만세운동 있었다 독립기념관 기록(https://search.i815.or.kr/Degae/DegaeView.jsp?nid=2056)에 의하면 1919년 3월 31일 군포.안양.의왕 경계지점이며 상업적 요충지였던 군포장(軍浦場, 현재 안양시 호계동 구군포사거리 인근)의 장터길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당시 군포장은 시흥군 일대에서 꽤 큰 장(5일장)이 열리던 곳으로 당시 군포장에 모인 2000여명의 시민들은 독립만세를 외치며 일본경찰관 주재소(현재 군포역앞)까지 약 1.8㎞를 행진했으며 4월 1일에도 군포장에서는 주민들이 모여 만세를 했다. 만세시위지인 군포장 경찰관주재소 터 현 주소는 군포시 군포 1동 750-8(옛주소: 시흥군 남면 당리)로 당시 일본경찰은 군에 보병 출..

[자료]1963년 남한강에서 숨진 안양 흥안초교생들 이야기

50년전 남한강에서 숨진 안양 흥안초교생들 안양과 여주는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인연이 있다. 교명이 바뀌었지만 현재의 안양 남초등학교는 1960년대 흥안국민학교로 불리웠다. 특히 노년의 졸업생들에게 여주하면 슬픈 추억이 서려 있다. 신륵사로 소풍갔다가 남한강에서 익사한 선후배들이 있기 때문이다. 타임머신을 타고 50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1963년 10월 23일 안양시 흥안초등학교 5·6학년 학생과 교사, 학부모 총 158명이 여주 신룩사로 수학여행을 왔다가 귀가하던 오후 2시 50분 무렵 여주읍 연양리에서 북내면 천송리 신륵사를 건너다니던 조포나루에서 일행을 태운 나룻배가 침몰하여 학생을 포함한 교사·학부모 등 49명(남학생 15명, 여학생 22명, 교장을 포함한 학부모 12명)이 익사하는 대형사고가..

[자료]국립수의과학검역원(구 가축위생검사소)

국립수의과학검역원(구 가축위생검사소) 이 건물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건물의 앞마당 화단에 꾸며져 있는“열 목숨 얻기 위해 한 목숨 바친 그대 희생 빛내리. 넋이여 고히 잠드소서. 1969년 10월 20일”이라고 씌여진 충혼비를 우선 살펴보아야 한다. 인간의 안전한 식생활을 보장하기 위하여 동물을 대상으로 갖가지 실험을 하게 되는데 결국 이 동물들의 생명을 끊는 것으로 끝나게 된다. 이 시설에서 희생된 동물들의 넋을 기리는 관계자들의 마음 씀씀이가 얼마나 가상한지 알 수 있다. 꽃 피는 철에는 붉은꽃으로 에워싸이는 화단은 어찌 보면 이 연구소 구내의 중심지라고 할 수 있다. 가축의 전염병 및 기타 질병의 예방 연구 기능을 하는 국립수의과학검역원은 지상 3층 건물로 T자 모양의 평면으로 되어 있는데, 내부에는..

[자료]안양지역 행정구역 변천과정

[자료]안양지역 행정구역 변천과정 [행정구역의 변천] 안양지역의 모체인 시흥군은 고구려시대에 잉벌노현에 속했다가 934년 고려태조때 금주로 개칭되면서 衿川으로 불려왔다. 조선세조 원년인 1456년 과천에 병합되었다가 정조19년에 시흥으로 개칭되었으며 1895년 고종32년에 시흥군으로 승격되었고 1914년 3월 1일 시흥, 안산, 과천의 3개군이 통합 시흥군이 되었다. 1949년 8월 14일 안양면이 안양읍으로 승격되면서 안양은 전원도시로 발돋움해 오다가 급격한 도시발달로 1973년 시로 승격됨과 동시에 부천군 소래면이 시흥군에 편입되었다. 1981년 7월 1일 정부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소하읍과 광명출장소가 광명시로 승격되었고 86년 1월 1일 과천지구출장소가 과천시로, 반월지구출장소가 안산시로, 89년 ..

[자료]1919년 3월 의왕에서도 3.1만세운동 있었다

의왕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있었음을 아시나요? "수원군의 의왕면 고천리에서는 삼월 삼십일일 밤에 다수한 군중이 모여 면사무소와 경관주재소에 대하여 폭행을 함으로 수원주둔병대가 출동하여 해산시켰다는데 주모자로 인정할 만한 자 46명을 체포하였다가 그 이튿날 41명만 태형에 처하여 방송하였다더라." 1919년 3월 31일 밤 의왕 주민 800여명(당시 의왕 주민 수는 2천여 명에 불과했다)은 의왕면사무소(현 고천동주민센터)에 모여 고천경찰관 주재소(현 고천약국 부근)와 지지대 고개까지 오가면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당시 만세운동 참가자들은 주민들과 함께 기독교인들과 천도교들이었다. 조선총독부 기관지 와 일본군 육군성에서 1920년 12월 30일 발행한 '조선소요사건관계서류'를 보면 일제 경찰은 군대를 불러 시위..

[기억-조성원]마음의 고향, 기억속의 안양

[조성원]마음의 고향, 기억속의 안양 수필 집 문을 열며/ 마음의 고향 시골에는 폐교가 많다. 가르칠 아이들이 없다는 것인데 정말 시골에는 나이든 사람들이 거의 대부분이다. 게임방에 PC방 노래방 만화방 쯤 갖춘 소읍은 나와야 학원도 보이고 아이들을 볼 수가 있다. 그래서인지 그 시절 그렇게 불러대던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이란 동요를 요즘은 더 이상 찾지들 않는 것도 같다. 내 어릴 적은 응원가가 바닥이 나면 자연스럽게 이 노래를 이어서 부르곤 했다. 고향의 정서는 결국 고향을 아련한 추억으로 간직하였을 때나 가능한 것이 아닐까. 동요의 끝머리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라는 구절이 새삼스럽다. 그래도 내 세대는 떠난 고향에 대한 향수는 그득하지 않은가 한다. 이 나라 산천이 괄목할 ..

[기억-조성원]안양초교 운동장의 추억

[조성원]안양초교 운동장의 추억 ( 늘 푸른 운동장 ) 나는 안양 초등학교 38회 출신이다. 입학하던 해가 1964년이니 우리학교는 일제 때 생긴 안양에선 제일 오래 된 학교다. 그 시절의 안양은 시흥군에 속하는 읍 소재지였으며 인구가 2만 명이 채 안되었다. 그러기에 그 시절의 안양사람을 만나면 모두가 동문인 셈도 된다. 지금의 안양은 과거의 논밭이나 하다못해 냇가마저도 시멘트가 덮이면서 모양을 달리 하였고 평촌과 산본이라 하는 신도시까지 생겨나 인구 50만이 넘는 큰 도시가 된 것이지만 당시 안양은 공설 운동장 하나 없는 여느 가난한 시골의 소읍과도 같았다. 4학년 때 배운 지리책에 안양은 아주 짤막하게 6 25때 격전지로 포도밭이 많은 어령칙한 동네로 표기되어 있으며 실제 우리 집 주변은 모두가 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