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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양 민자역사와 역에 얽힌 이야기

안양시와 철도청은 13일 안양민자역사 대합실에서 안양역사 이전 개통식을 가짐에 따라 지난 97년 10월 2일 임시역사로 이전한지 만 4년만에 현대식 시설을 갖춘 민자 안양역 시대의 막이 올랐다. 안양시가 후원하고 안양역과 (주)안양역사가 주최한 이날 행사에는 시장, 시의장 등 각계 인사 8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안양역장의 경과보고속에 민자역사 안양역 개통식 테이프를 끊고 역무시설을 둘러보았다. 안양민자역사는 ㈜안양민자역사와 철도청이 모두 1천100억원을 들여 안양1동 88의1 일대 2만8천47㎡ 부지에 지난 95년 착공해 지하3층 지상9층 규모의 현대식 복합건축물로 LG건설이 시공중이며 이번에 개통된 역무시설은 지하 3층 지상 4층 연면적 8천693㎡ 규모로 시민편의를 위해 대합실과 개찰구.승강장으로 이..

추억의 건물 안양소방서 망루의 연혁

안양소방서 청사신축후 안양지역에서 가장 높은 건물은 소방서 망루였기에 어느 곳에서 든지 볼 수 있었고 따라서 망루는 넓은 지역을 훓터볼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그 당시 화재를 발견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곳이 망루였다. 119화재신고 전화로 화재 접보를 받기도 했지만 전화보유의 대중화등 통신수단이 발달하기 이전 이었다고 볼 수 있다. 망루는 24시간 주·야로 안양시의 파수꾼 역할을 하면서 안양시내의 화재를 감시하고 화재징후가 나타나면 신속한 출동을 할 수 있도록 마련된 곳이며 이곳이야말로 20여년동안 흘러온 안양소방의 산 역사로서, 시민들의 애환과 노 소방관의 정감이 서려 있는 상징물인 것이다. 망루 높이는 25M 8층 층고로서 망루 정상 외벽에는 아지도 붉은 글씨로 「불조심」이라는 글귀가 적혀있다. ..

시흥군 - 안양소방서의 변천사

[시흥,안양 의용소방대의 역사] 가. 최초 의용소방대(시흥군 안양의용소방대) 시흥·안양 의용소방대의 역사는 정부수립 당시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사회적 여건과 상황은 행정공백 상태를 맞이하게 되어 지도자나 민중이 급격한 변화에 방향감각을 상실하고 우왕좌왕 하고 있던 어수선한 정국이었다. 이러한 배경으로 이러지는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국가적인 기간산업 및 중요업무는 피폐되고 국민들은 고통의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따라서 소방의 업무는 사회적 분위기에 편승하여 전후복구와 수방 및 화재진압과 예방에 힘을 쓰는 중요한 업무를 하게 되었다. 그러나 행정공백 상태로 인해 소방서의 업무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는 실정이었는데, 이러한 소방의 업무를 대신할 만한 민간조직이 바로 의용소방대였던 것이다. 1948년 3월 ..

[최승원]역사성이 풍부하게 누적되어 있는 안양유원지

한국 박물관학회 평의원/ 건축사 삼성천 좌측 유유산업에서 안양사 주변 거북골에는 5000년의 한국문화가 누적되어 숨쉬고 있다. 고대 신앙생활의 유적으로서 그 문화적 가치가 두드러지게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장수바위, 미륵장군등 세계적 관심거리가 되어 있는 거석문화의 흔적들이 이 주변에 널려 있다. 이것은 염불암에서 삼막사까지 연결되는 대장정이다. 만안교(거북다리)에서 시작하여 거북바위(광석바위)→안양사귀부(거북형상)→거북골→삼귀자바위는 거북이의 행렬이다. 중초사당간지주주변 우물은 하단이 4각형이고 상단이 원형으로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사상으로 조성되어 있다. 안양유원지 주변에는 99개의 절들이 배치되어 있었다고 전해지고 전설에는 이 절들을 다 볼려면 짚신을 등에 메고 들어가 다 닳아서 나간다는 이야기가 ..

[문원식]'안양면사무소' 복원에 대하여

성결대학교 교수, 안양학연구소 소장 석수동과 박달동을 제외한 대부분의 현재 안양지역은 일제시대 초기까지 안양천을 경계로 상서면과 하서면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이 두 개의 면이 합쳐서 서이면(西二面)으로 행정명칭이 변화된 시기는 1914년 3월 1일에 시행된 조선총독부령 제 111호에 의해서 인데이 때의 서이면사무소는 호계 2동 방죽말에 있는 구 교육청 자리 앞쪽에 있었다. 서이면사무소는 1917년 7월 6일 자로 현재의 안양 1동 사무소 옆 안양옥 자리로 옮겨오게 된다. 면사무소의 이전은 서이면의 중심지가 호계리에서 안양리로 바뀐 것을 의미하는데, 1905년의 안양역사 개설로 인하여 인구와 물자이동의 중심축이 안양리로 이동하였기 때문이다. 이 곳은 1941년 10월 1일 서이면이 안양면으로 개칭된 이후에..

[문원식]우리가 언제부터 '안양사람'이라 했을까?

성결대학교 교수, 안양학연구소 소장 99년 봄 100여명의 민방위교육생을 대상으로 정신교육을 할 때, 안양이란 말만 들어도 코끝이 찡해지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조사해본 적이 있다. 이 물음에 손을 든 사람은 모두 여섯 명이었는데, 20세 이상 안양 시민 중 토박이의 비율과 일치하여 묘한 느낌을 받은 것이 기억에 난다. 이처럼 코끝이 찡해진다는 느낌을 다른 말로 표현해보면 지역주민들이 현재 살고 있는 지역에 뿌리를 내리고 대를 이어 살고자 하는 것을 이르는 정주의식(定住意識)이란 말로 바꿔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정주의식이 지역사회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지역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높은 주민들이 많아질 때 지역사회의 여러 가지 일에 참여하고 활동하는 사람들의 비율이 높아지게 될 것이고, ..

[문원식]21세기 안양의 과제와 비전

성결대학교 교수, 안양학연구소 소장 과천 공로변에 위치한 촌락에 불과하던 안양지역을 산업사회로 이끈 일대 사건은 1905년 1월 1일 자로 개통된 경부선 철도와 그로 인한 안양역사의 개설이었다. 안양역사의 개설은 그때까지 불과 10여 호에 불과하던 안양리 일대의 인구를 30년만에 역전을 중심으로 3,000명 이상이 모여 사는 도시로 만들었고, 이후 안양리가 인근지역의 정치·행정 및 산업의 중심지가 되어 지속적인 발전을 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다. 안양의 산업화시대를 이끈 또 하나의 커다란 사건은 1932년 현 대농단지에 '조선직물주식회사'가 설립된 일이다. 일본인 자본에 의해 조선직물주식회사가 설립되면서 시작된 안양의 산업화는 섬유와 제지산업을 중심으로 하여 안양이 수도권의 대표적인 공업도시로 순탄하게..

[문원식]산업화과정을 통해 본 안양시의 도시성장

성결대학교 교수, 안양학연구소 소장 경기 남부지역의 대표적인 명산들인 수리산, 관악산, 청계산, 모락산 등에 둘러싸인 안온한 분지 속에 자리잡은 안양시가 선사시대부터 우리 조상들의 삶의 터전이었다는 것은 발굴된 유적이나 역사적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역대로 과천에 속한 하부 행정단위였던 안양시의 행정구역 변천과정을 살펴보면, 본래 마한과 백제의 영토였으나 고구려 장수왕의 남정(南征)으로 고구려의 영토가 되어 율목군(栗木郡)이라 칭했다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자 율진군(栗津郡)이 되었다. 이어 고려조로 넘어오면 다시 과주(果州)로 고쳐지고,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금천현(衿川縣)과 통합하여 잠시 금과현(衿果縣)이라 불린 적도 있었다. 그러나 대체로 과천현(果川縣)으로 부르다가 고종 32년(1895)의 행..

[문원식]안양의 산업화 과정

안양학연구소장/ 성결대교수 1932년 서이면 안양리, 현 대농단지 약 1만평의 부지 위에 일본인 자본에 의해 ‘조선직물주식회사’라는 최초의 근대적 방직공장이 설립되었다. 섬유공업에 적합한 공업용수를 찾아 전국의 물을 조사해 본 바, 박달동 일대에서 채집한 안양천의 수질이 최상이라는 판정을 얻은 결과였다. 덧붙여 안양리 일대의 풍부한 노동력과 서울에 인접한 교통상의 강점이 고려된 결정이었다. 8.15 광복 직전, 4개에 불과하던 제조업체 수는 6.25사변 직전까지 약 14개 업체에 종업원 수 1,068명에 이를 정도로 안양은 순탄한 도시화 및 산업화의 길을 걸어 왔다. 여기서 초기 안양의 산업화에 기여한 업종을 조사해 보면 양질의 공업용수가 있어야 가능한 산업 즉, 방직공업과 제지산업이 주축을 이루고 있었..

[문원식]탈공업화시대의 안양

성결대학교 교수, 안양학연구소 소장 1932년 현 대농단지에 일본인 자본에 의해 조선직물주식회사가 들어서면서 시작된 안양의 산업화는 90년대 초 수도 서울의 배후 침상도시로 평촌 신도시가 건설되자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평촌 신도시가 건설되기 이전까지의 안양의 산업화과정은 세 단계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 1단계는 경부선 철도가 개통되고 안양역사가 개설된 1905년부터 조선직물주식회사가 들어선 1932년까지로 불과 십여 호에 불과하던 안양리에 3천명 이상의 사람들이 모여들어 마을을 형성하고, 학교와 시장 및 교회 등 도시 기본시설들이 만들어지던 시기로 '도시형성기'라 부를 수 있다. 2단계는 1932년부터 1961년까지의 기간으로 '전기산업화단계'로 분류할 수 있다. 이 당시 안양을 대표했던 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