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원]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누나)
내 어릴 적 우리 집엔 누나가 있었다. 아주 어린 나이에는 친누나인줄 알았는데 초등학교 3학년쯤 그 누나가 따로 나가 살 때쯤 천생 고아라는 걸 알았다. 당시엔 식모라는 게 흔했다. 그 누나는 우리 집에 식모살이하러 온 누나였다. 그 누나는 우리가 학교를 간 사이 집안 허드레 일을 도맡아 하였다. 당시 우리 집은 닭을 많이 키웠다.
부화장에서 들여온 병아리들을 겨우내 키워서 실험용 닭으로 납품을 하든지 시장에 내놓았다. 그렇지 않아도 웬만하면 자급자족을 하던 악착같은 시대였기에 집 주변에 빈 터가 그냥 있을 리 없었다. 앞마당엔 고추하고 토마토를 심었고 닭똥이 비료로 좋은 마늘밭은 닭 마당 바로 옆에 두었다. 집 앞 벚나무 아래 텃밭에는 감자를 다섯 고랑 심고 그 사이로 콩하고 깨를 많이 심었다.
비록 6.25 동란은 끝이 났지만 전쟁은 멀리 있지 않은 애옥한 그 무엇이었다. 격전지로 유명했다던 안양은 땅만 파면 잔해가 쏟아졌다. 특히 학교 주변은 탄피나 폭탄 껍데기가 즐비했다. 전쟁 때 우리학교는 군인들이 거주하였던 곳임에 틀림이 없다. 큰 건물이 주변에 없던 때 곳을 사수하느냐 아니냐는 큰 관건이었을 것이다.
반세기를 넘어선 세월이지만 이 땅은 그 아픈 기억을 품고 우리에게 영향을 여전히 미치고 있다. 누나도 그 전쟁으로 고아가 되었으며 전쟁의 상흔을 평생 안고 산다. 누나의 고향은 휴전선 바로건너 장단근처에 고랑포라는데 6 25때 할머니하고 손잡고 내려왔으며 방앗간 근처에 살았다는 기억밖에는 없는 누나다.
누나는 실 나이도 이름도 잘 모른다. 이남으로 내려와서 할머니가 죽자 우리 집에 왔다. 부모의 성씨는커녕 이북에 사는지 안 사는지 조차 모른다. 용신하기도 힘든 너무 어린 나이에 이남으로 나왔기 때문이다. 동생과 내가 연년생인 관계로 엄마는 동생을 돌보고 누나는 나를 업어 키웠다. 그래서인지 누나는 훗날 멀리 시집을 가고서도 유독 나에게는 애틋하였다.
어렴풋하지만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라는 노래를 나지막하게 누나의 포근한 등 뒤에서 들었던 것 같다. 쎄쎄쎄 하며 불러주던 음률하며 엄마 앞에서 짝짜꿍이란 노래 또한 알연하다. 김소월은 왜 아빠와 형들은 아니 찾고 ‘엄마야 누나야’를 불렀을까. 엄마는 늘 마음의 고향이다. 누나는 그 노래로부터 가고 싶은 상상의 고향과 부모님을 만났을 것이다. 누나는 그 노래를 부르고 긴 한숨을 쉬곤 했다.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뜰에는 반짝이는 금 모래 빛
뒷 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뜰에는 반작이는 금 모래 빛
뒷 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비록 누나는 학교는 안다녔지만 산수하고 한글을 다 깨쳤다. 엄마가 가르쳐 주었기 때문이다. 안양은 당시 왜정시대부터 있었던 방직공장이 두 곳이나 있었다. 공장이 거의 없던 시절 그곳은 신산한 처녀들의 선망의 곳이었다. 엄마는 금성방직이란 곳에 국졸로 속여 누나를 취직시켰다. 누나는 친구들하고 자취를 했는데, 꼭 월급날은 집을 찾았다.
엄마는 누나 앞으로 계도 들어 시집갈 목돈을 만들도록 했다. 누나가 시집갈 무렵 혼처자리가 여러 군데서 들어왔지만 문제는 고아라는데 있었다. 꼭 그게 걸림돌이었다. 답답한 우리 집은 누나를 호적에 등재하려 했는데, 나이차이 관계로 잘 안되었다. 때 마침 동네에 양녀를 두고 싶어 하는 분이 있어서 그 집에 양녀로 등재까지 했다.
누나는 자취하는 친구 소개로 연애를 했는데 뒷조사를 한 엄마가 결혼을 무척 반대하였었다. 하지만 누나는 고아라서 너무 외로웠기 때문에 형제 많은 집에 시집가겠다고 버텼다. 매형은 당시 철도청에 다닌다고 하였는데 알고 보니 부곡의 철도기지에서 일하는 임시직이었다. 그래도 시댁이 반월이라 훗날 공단이 들어서서 땅값하며 괜찮겠다 싶었는데 그런 누나는 이날 이때 까지 고생만 엄청 하고 산다.
최근에는 연락조차 안 되서 2년을 수소문해서 겨우 찾았는데, 남편이 그야말로 술에 밥 말아먹는 동네 천덕꾸러기로 있는 가산 다 탕진하고 죽을 날만 받아놓고 산다고 했다. 누나는 그 동네 조그만 공장 청소부로 나가고 있었다. 엄마는 누나를 보고 와서 눈물을 훔치며 언젠가 다시 꼭 같이 살 거라고 했다.
누나는 그 시절 월급을 타면 나를 끌고 극장을 갔었다. 신영균이 나오는 빨간마후라, 서울이여 안녕, 미워도 다시 한 번 등이 그때 본 영화다. 누나는 그 영화를 보며 흘리는 눈물이 더 감칠 나고 여인답고 좋았는데 박복한 우리 누나는 아마 지금도 달 밝은 날 둥근 달을 보며 그 시절처럼 엄마야 누나야를 혼잣말처럼 해대며 눈물을 흘릴 것만 같다. 신작로 길을 따라 나서던 그 유월의 바람이 오늘 그 시절처럼 잔잔히 유리창을 흔든다.
조성원의 수필 '나 어릴적' 초고에서 발췌. 이 글을 쓴 조성원(어릴적 이름 조형곤)씨는 1957년 안양에서 태어난 안양초교 38회, 안양중학교 23회 졸업생으로, 저하고 동창으로 오랜 기간 대덕 모 연구소에 근무하고 있지요. 블랙죠라는 이름을 글을 쓰다가 수필가로 등단해 현재는 한국수필가협회와 수필문학가협회에서 이사직으로 적극적인 문단 활동을 해오며 제2회 문학저널 창작문학상과 수필문학사가 주관한 제1회 소운문학상을 수상도 했는데 첫 번째와 두 번째 수필집인 ‘빈 가슴에 머무는 바람 1&2’이외에도 ‘송사리 떼의 다른 느낌’, ‘작게 사는 행복이지만’, '‘오후 다섯 시 반’ 등 7권의 수필집을 내놓었으며 ‘2천 년 로마 이야기’와 ‘스페인 이야기’ 등 여행 에세이집도 발표했습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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