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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조성원]1960년대 끔찍했던 연탄가스의 기억

안양똑따기 2017. 3. 8. 15:48

[조성원의 기억속 안양]1960년대 끔찍했던 연탄가스의 기억
(연탄 가스)

연탄하면 떠오르는 안도현의 시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삶이란 나 아닌 그 누구에게 기꺼이 연탄 한 장 되는 것' 그 시절 연탄만한 가치도 많지 않았다. 겨울이 되면 소외된 이들에게 여러 경로를 통해 전해지는'사랑의 연탄 나누기' 행사,' 연탄 배달의 봉사 이야기' 돈 몇 푼에 찾는 따스함이 어디 흔하였던가.
하지만 요즘 연탄은 사는게 구차하거나,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을때 연탄을 피워놓고 자신과 가족의 목숨까지 잠재우거나,남에게 치명적인 해를 가할 악의 형태로 연탄이 이용되기도 한다.  생을 연탄으로 마감한다니 정말 가슴 아픈일이다. 스스로가 아니라 생각지도 못한 죽음 , 그 시절은 따스한 품속에서 연탄을 맞이하다 졸지에 불모의 객으로 변한 경우가 흔했다.
어제  밤 늦도록 같이 놀던 아이가 왠일인지 등교를 안했다. 그럴 리  없는 아이다. 부지런하여 선생님은 그애만 같으면 우리나라가 금세 부자나라가 될 거라고 했다. 당번이 아닌데도 칠판정리는 도맡아 하던 아이다. 그 아이는 그렇게 연탄가스로 하루아침에 비명횡사를 하고 만 것이다. 아이들은 소름이 돋았다.
1960년대부터 한국 사회에 본격적으로 나타난 연탄가스중독은 그 규모나 치명률에 있어 세계적으로 유래가 없을 정도로 심각한 문제였다. 전염병이 잘 통제가 되지 않던 시절의 제1종과 제2종 전염병을 모두 합친 발생율과 사망률보다 높았을 뿐 아니라,그 성격이 예측할 수 없이 갑자기 다가오는 허망한 죽음이라는 면에서 충격을 주었다.
평안히 잠자리에 든 네다섯 명의 단란한 식구들이 아침에 갑자기 시체로 발견되거나 혼수상태에 빠진 것을 이웃이 발견하여 병원으로 이송되나 결국 사망하게 되는 일이 빈번하였다. 연탄 에서 발생하는 일산화탄소는 극소량으도 치명적이지만, 냄새도 맛도 색깔도 없으므로 인지하기는 불가능하였다. 겨울이면 찾아오는 공포스러운 죽음의 신, 연탄가스중독은 “사신(死神)”으로 불렸다.
연탄가스중독은 1950년대 한국에서 연탄이 가정용 연료로 쓰이기 시작하면서 문제가 되었다. 연탄이 불완전 연소할 때 발생하는 일산화탄소(carbon monoxide, CO)에 의한 중독인데, 일산화탄소는 산소보다 헤모글로빈과 더 강력하게 결합하여 조직에 산소 공급을 막아서 심하면 사망에 이르게 한다.
1960 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사회문제가 된 연탄가스중독은 1990년대 가정 연료가 대체될 때까지 근 삼십년 동안 한국사회의 심각한 보건의료 문제덩러리였다.연탄가스중독은  무엇보다 해방 이후 서울을 중심으로 한 급격한 도시화 및 산업화와 깊은 연관이 있다. 해방 전 한국의 전통 주거의 난방은 나무를 쪼개어 만든 장작을 연료로 사 용한 온돌이었다.

연탄이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한 것은 한국 전쟁기 부산에서 피난민을 중심으로 연탄이 가정에서 연료로 사용되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1950년대 중반 계속되는 전쟁으로 황폐해진 산림보호를 위해 정부에서는 불법적인 벌목을 규제하여 장작의 사용을 억제 했다. 이 정책을 이어 박통은   산에서의 연료채취를 철저하게 봉쇄하고 대체 연료로 석탄산업의 장려를 통해 연탄을 보급하였다.
당시 농촌에서 연료를 구하기 위해 국유림의 나무를 몰래 채 취하는 도벌은 5대 사회악 중의 하나로 여겨졌다.그 결과 도시에서 장작의 가격이 오르게 되자 상대적으로 값이 싼 연탄의 수요가 증가하였고 해가 갈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연탄을 쓰게 되었다.당시 서울시내에만 150여개의 연탄공장이 있었으며 전국적으로 400여개의 공장이 있었다고 한다.
무명씨에 의해 발명된 토제관으로 된 ‘연탄 바께스’. 연탄은 점화점이 높아 센불이 필요한데 연탄바께스는 바로 그것이 해결되도록한 용품이다. '바께스’ 안에서 불이 붙어 있는 연탄 위에 12시간 단위로 새 연탄을 갈아 넣으면 따로 점화하지 않아도 연탄불을 24시간 유지가 가능하다. 매운 연기를 참아가며 불앞에서 계속 장작을 넣어서 불을 때야 했던 주부들에게는 그야말로 “여성해방”을 가져 온 귀중한 것이었다.
연탄불은 관리하기 편하고 언제든지 불을 쓸 수 있을 뿐 아니라 연탄의 열량이 많기 때문에 취사를 하기에도 좋았다. 온돌 난방 과 취사를 같이 했던 부엌의 아궁이에서 연탄을 땠지만, 온돌이 없는 마루에 는 연탄난로를 놓아 쓰기도 했다. 장마가 지는 여름에는 제습을 위해 연탄불을 때기도 했다.
연탄이 본격적으로 사용되는 1960년대에 연탄은 귀하고 소중한 생필품이었다.월동준비를 위해서 연탄을 수백 장 한꺼번에 들여놓을 수 있는 집들은 부러움의 대상이었다.특히 1966년 연탄파동을 겪은 다음부터는 연탄은 사재기 대상이 되기도 했다.
“쌀뒤주가 비었다거나 연탄이 몇 장 밖에는 남아있지 않으면 <핸드백>에 돈이 아무리 많이 있더라도 불안하기만 한 것이 당시 우리 아낙네들이었다.당시 신문에서는 다섯 장씩 열 장씩 사서 쓸 수밖에 없는 주부들이 어떻게 연탄을 확보할 수 있는지 조언을 해 주고 있다.
동네서도 마음씨가 착할 듯한 사전주인, 연탄배달부를 골라 놓는다. 한달쯤의 기한을 정해서 교섭기간을 삼는다. 무리를 해서라도 구입량을 많게, 그러니까 회수는 적게 한다. 값은 꼬박꼬박 내고 그때마다 세상에 대한 개탄도 하며 수시로 호감을 표시한다. 절친해졌다고 생각할 때에 한번쯤 외상을 하고 곧 갚는다. 이것이 그 당시 연탄을 쟁여놓는 비법이었다.
그러나 연탄을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연탄가스의 살인적인 위험이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이에 대해 1960년대 초의 신문기사는 “아름다운 장미 꽃에 가시가 있는 것처럼 유용한 연탄 속에는 생명을 빼앗는 살인「가스」가 들 어있다”며 “가시가 있는 아름다운 장미꽃”에 연탄을 비유하였다. 어찌됐건 연탄은 도시 사람들이 없으면 살지 못하는 필수품이었다.
연탄은 1960 년대 들어 사용량이 계속 증가하였고, 일인당 연탄의 사용량도 증가하였다. 1961년 “이러다가는 바깥에서는 추위와 대결하고, 방안에서는 구공탄과 대 결해야 하겠으니 걱정”이라며, “죽는 날에는 죽더라도 연탄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서울시민의 당시 상황이었다.
연탄가스중독은 주로 도시에서 일어났다. 특히 도시의 열악한 주거 환경에 서 빈발하였다. 도시의 공지나 산비탈에 불법 무허가 판잣집...당시 달동네, 불량주거지의 모습을 묘사한 소설가 박완서 작품의 주인공은 “똥물로 키우는 콩나물시루 같다”라고 도시빈민촌의 밀집과 불결을 표현하였다. 이렇듯 도시에 널리 퍼져 있었던 열악한 주거 공간은 연탄 가스중독이 유발되기 쉬운 공간이었다.
당시  보도된 가난한 노동자 김씨의 일가족 4명이 연탄가스로 죽은 이야기,김씨는 부인과 아들, 딸과 함께 일 년 전 고향인 전남 진도에 서 상경하여 서울에서 품팔이를 하며 근근이 살았다. 사고 두 달 전부터는 옥수동 산 5번지 해발 7백미터의 산꼭대기에서 움막살이를 한 김씨 가족은 김씨가 품팔이로 돈을 벌지 못하는 날에는 가족들이 끼니를 굶은 일도 자주 있었다.
사고 전날 동회에서 쌀 두되를 구호받아 일가족이 오래간만에 쌀밥을 먹고 온돌방에서 스며든 구공탄가스에 온 가족이 참변을 당하였다. 삼양동 움막집에서도 아버지의 목수 품팔이로 겨우 연명을 하던 일가족 5명이 모두 연탄가스에 중독되어 숨졌다. 성동구 행응동 산꼭대기 움막집에서도 무직인 가장의 일가족 7명이 함께 자다가 모두 연탄가스에 중독되어 두 명이 숨지고 5명이 중태에 빠졌다.
이처럼 서울지역에서 보도된 희생자의 많은 수는 판잣집, 공장, 온실, 부 엌, 가게의 곁방 등 정식 주거지라 할 수 없는 열악한 주거환경에 거주하는 사람들로, 안정된 주거지가 없는 떠돌이, 셋방살이, 자취생, 하숙생 등이었다. 이를  보완하자고 만든 것이 연탄보일러다. 1962년 우리나라 최초로 단지식으로 지어진 아파트인 마포아파트는 연탄보일러를 통한 개별 온수난방 방식을 채택한 아파트였다.
연탄보일러는 연탄가스중독을 막고 열 손실을 줄일 목적으로 이용되었으나, 에너지 효율 문제와 가스배출 문제는 여전하였다. 그런데 도시에서 연탄가스중독을 유발하는 주체는 사람만이 아니었다. 도시의 생태계(urban ecosystem)에 사람의 숫자보다 훨씬 많이 살면서 활발하게 움직이는 쥐가 연탄가스중독을 일으키고 있었다.
당시 한국의 쥐의 총 마리 수는 육천만 마리로 한 집에 14마리에서 63 마리”가 있었다. 도배를 할 때에도 “천장에서 뛰노는 쥐의 서식을 방지하기 위해선 천장의 바탕틀 위에 겨를 한겹 깔도록” 충고할 만큼, 쥐는 사람의 주거 공간에서 함께 사는 존재였다. 흙으로 만들어진 전통 가옥의 방바닥, 마 루 틈을 쥐들이 구멍을 뚫는 일이 종종 있었다.
이렇게 해서 “예고 없이 찾아 드는 죽음의 손길”이 오는데, “헤벌어진 연탄아궁이를 벗어난 일산화탄소는 쥐가 쏜 굽도리 한구석 틈새로 또는 부엌쪽의 문틈으로 쥐도 새도 모르게” 스며드는 것이다. 당시 신문 보도에는 “쥐구멍”을 막지 않아서 그 구멍에서 새어든 연탄가스로 사망했다는 기사가 줄을 이었다.
그러나 한번 쥐구멍을 찾아 때웠다고 방심하면 크게 위험할 수 있었다. “여름 동안 연탄을 피우지 않기 때문에 쥐가 마음대로 아궁이와 구들을 들락거려 구멍을 뚫어” 놓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연탄을 피우지 않다가 연탄을 피울 때는 꼭 다시 쥐구멍을 확인하도록 권고하였다.
실제로 여름 장마 철에 습기를 없애려고 연탄을 피우다가 새로 생긴 쥐구멍에 의해 가스중독사고가 발생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쥐는 또한 굴뚝을 막기도 해서, “굴뚝이 쥐의 장난으로 막혀서 배기가 안되어” 그 가스가 부엌으로 밀려나고 그것이 다시 안방으로 들어와 중독되는 경우도 있었다.
전 양곡 생산의 20%가 쥐에게 먹히고 있었던 1960년대에 쥐는 식량을 빼앗 아 먹을 뿐 아니라, 전염병의 원인이 되고 연탄가스중독의 원인으로서 직접적 인 인명 피해를 주는 존재였다. 연탄가스예방의 제일 첫 번째로 쥐를 철저히 잡는 것이 꼽히기도 했으며, “중독사의 가장 많은 원인이 되는 쥐구멍” 등을 각 가정에서 철저히 살피고 막는 것이 중요했다.
그러니까 그  시절 연탄가스가 새어 나오는 구멍을 막기위해 쥐를  박멸하여야 했으며 이 놈의 쥐를 박멸하기 위한 구서작업을 위해 필요한 예산을 확보하여 훈련된 구서작업 요원을 동네마다 배치하는 안이 제시되기도 했으니 그 시절의 안타까운 세상 풍경을  요즘의 아이들이 믿기나 하려나 모르겠다.
당시 범국민적인 쥐잡기 운동을 벌려 학생들은 쥐를 잡은 증거물로 학교에 '쥐꼬리'를 제출하기도 했다. 물론 쥐를 전국적으로 잡으려 한 것은 가난과 밀접한 또 다른 이유가 우선 하기도 했지만....그 시절 나는  리어카에  이불을 뒤집어 쓴 사람을 싣고 달리던 풍경을 몇 번인가 보았고 지금도 그 아찔함을 잊지 못한다.  나는 복어하고 연탄가스보다 독한 존재를  평생 통털어 만나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정말 졸지에 라는 말이 실감이 나는 끔찍한 게 연탄가스다.  

이 글을 쓴 조성원(어릴적 이름 조형곤)씨는 1957년 안양에서 태어난 안양초교 38회, 안양중학교 23회 졸업생으로, 저하고 동창으로 오랜 기간 대덕 모 연구소에 근무하고 있지요. 블랙죠라는 이름을 글을 쓰다가 수필가로 등단해 현재는 한국수필가협회와 수필문학가협회에서 이사직으로 적극적인 문단 활동을 해오며 제2회 문학저널 창작문학상과 수필문학사가 주관한 제1회 소운문학상을 수상도 했는데 첫 번째와 두 번째 수필집인 ‘빈 가슴에 머무는 바람 1&2’이외에도 ‘송사리 떼의 다른 느낌’, ‘작게 사는 행복이지만’, '‘오후 다섯 시 반’ 등 7권의 수필집을 내놓었으며 ‘2천 년 로마 이야기’와 ‘스페인 이야기’ 등 여행 에세이집도 발표했고 최근에는 역사에세이 '고구려 9백년의 자취소리'를 펴냈는데 인기몰이를 하고 있지요. -편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