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보따리/기사 52

[기사]나그네 쌈짓돈 뜯던 사또 민담 뒤로하고 사근행궁으로

나그네 쌈짓돈 뜯던 사또 민담 뒤로하고 사근행궁으로 [통영로 옛길을 되살린다] (36) 통영별로(統營別路) 2일차 출처: 2013.01.31일자 경남도민일보에서(http://www.idomin.com/news/articleView.html?idxno=404003) 최헌섭 두류문화연구원 원장 | webmaster@idomin.com 오늘은 과천과 경계를 이루는 남태령에서 길을 잡습니다. 이곳이 지경(地境) 고개임을 알 수 있는 현대적 증거는 고개의 서쪽에 자리한 수도방위사령부라 할 것입니다. 대한민국의 수도를 지키는 부대가 이곳에 있음은 이 고개가 지경으로서의 성격을 잘 드러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노정을 〈과천시지〉에는 남태령(南泰嶺)-과천현행궁(果川縣行宮)-읍내전천교(邑內前川橋)-냉정점(冷井店)-..

[안양광역]안양7동 덕천마을의 옛 지명은 ‘벌터(坪村)’

안양7동 덕천마을의 옛 지명은 ‘벌터(坪村)’ 2015-04-13 오후 5:32:00 12 ‘벌터’자연마을 지명석 이전설치 행사에 참석한 안양7동 박창배 동장, 정하길 주민자치위원장, 민정기 (사)대한노인회 안양7동 경로당 회장(통친회장) 및 경로당회원 등 지역주민들이 마을의 발전을 염원하며 ‘파이팅!!’을 외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사람들이 거주하지 않았고 대부분 농경지였던 지역에 일제강점기 초 시흥시 정왕동에 살던 원정상(元貞常)씨가 분가하면서 정착 이래 자연마을이 형성되면서 ‘벌터’라 불리었다. 1978년 마을의 유지들에 의해 ‘덕천마을’로 개칭되었고, 이듬해 5월 1일 안양 6동에서 분리되어 안양7동으로 분동(分洞)된 이래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리적, 인문적 특성을 간직한 자연마을 지명은 지역의..

[옛신문]삼막사 청기와 훔쳐갔던 일본인 교장(매일신보 1934.09.15)

삼막사 청기와 훔쳐갔던 일본인 교장 이야기 삼막사(三幕寺)의 청와(靑瓦), 교장(校長)에 치의(致疑) 절에서는 도적 맞았다 하고 본전씨(本田氏) 주장(主張)은 달라 1934년 9월 5일자 [영등포(永登浦)] 교육자의 인격향상을 절규하는 이때 주임대우의 학교장이 절도피의자로 취조를 받는 기괴한 사실이 있다. 영등포공립고등학교(영등포공립고등학교) 본전항조(本田恒助)시와 영등포읍 고려자기제조업 황인춘(黃仁春)씨, 산업기수 임구남(林久男) 3씨는 지난 7월 하순경에 고려자기 원료점토를 구하려 관악에를 갔다가 삼막사(삼막사)에 가서 점심을 먹을 때 그 절 망해루(望海樓) 지붕에 있는 청개와(靑瓦, 청기와)를 보고 그 절에 있는 9세 된 지어성(池○成)이라는 어린이를 시켜 그 절 기와를 벗겨내려 잠시 가져갔다가 다..

[기사]선생님이 들려주는 우리고장 역사/ 반월저수지와 운크라

선생님이 들려주는 우리고장 역사/ 반월저수지와 운크라 국제구호 손길 닿은 논밭의 젖줄 본오뜰 포함 안산 지역 가뭄해갈 6·25 전쟁후 '유엔한국재건단' 맹활약 농업용저수지등 경제기반시설 투자도 안산 반월지역에는 개교한 지 90년이 넘는 반월초등학교가 있습니다. 그 학교를 지나 북쪽으로 올라가면 남산 뜰이 나오고 그 위로 더 올라가면 호수같이 넓고 예쁘게 단장이 된 반월저수지가 나옵니다. 그리고 넓은 저수지와 함께 어울려 우뚝 솟은 터미산성은 예전에 쌓았던 작은 산성이 있던 곳으로 역사적인 유래가 깊은 곳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저수지 제방 동쪽 끝에 가면 돌판이 하나 있는데, 거기에는 '半月水利組合 운크라 韓美合同事業地區 竣功 4290年 12月 15日'라고 적혀있습니다. 이것은 반월저수지가 1957년 ..

[기사]선생님이 들려주는 우리고장 역사/ 반월의 근대교육1- 둔대리

선생님이 들려주는 우리고장 역사/ 반월의 근대교육1- 둔대리 지역유지 손주사랑이 낳은 '교육의 산실' 배재학당 출신 황삼봉 가정교사로 초빙 마을학생 가르칠수 있는 둔대교회 설립 안산의 가장 동쪽에 위치한 반월은 지리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떨어져 있는 느낌이다. '반월'이라는 이름은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 개편으로 광주군 소속이었던 3개 면이 수원으로 통합되면서 처음 불리게 됐다. 그러니 올해는 '반월'이라는 이름을 가진 지 102년이 된다. 반월은 본디 광주군 소속의 성곶면·북방면·월곡면이 1906년 안산군으로 이속됐다가 1914년에 반월면으로 통합돼 수원군으로 넘어갔다. 따라서 3개 면은 1906년까지는 광주군에, 이후 1914년까지는 안산군에, 그리고 그 이후에는 수원군에 속하게 됐고, 시기마..

[기사]서울에도 경기에도 있는 시흥, 왜?

[기사]서울에도 경기에도 있는 시흥, 왜? [2015.10.07]경인일보 창간70기획 그때 [경인일보 창간70기획 그때]서울에도 경기에도 있는 시흥, 왜? 조선시대 영등포까지 거느린 거대도시 행정구역 개편으로 땅 일부 서울 편입 김범수 기자 발행일 2015-10-07 제37면 광명·안산 등 독립으로 해체 위기도 현재 42만 산업도시 제2 중흥기 맞아 ‘서울의 시흥동과 경기도 시흥시, 어느 지역이 먼저일까’. 서울을 오가는 경기도민은 한 번씩 의문이 생기는 지역이 있다. 서울시 금천구 시흥동과 경기도 시흥시다. 심지어 한자어 역시 시흥(始興)으로 같다. 이처럼 다른 지자체에서 같은 지명을 사용하는 이유는 쪼개지고 축소된 ‘시흥군’ 행정구역 변천사에 있다. 조선시대에만 해도 경기도 시흥군은 오늘날의 서울 영..

[기사]길에서 뿌리를 찾다· 안양 시흥로(현 만안로)

[기사]길에서 뿌리를 찾다·15·끝 안양 시흥로(현 만안로) 경인일보 [길에서 뿌리를 찾다·15·끝]안양 시흥로(현 만안로) 애민정신 다져진 능행 안양상권 '탄탄대로' 정조, 사도세자 6차 원행부터 시흥로 이용 조선시대 교육·과학·예술 '통신사 역할' 1930년대 섬유관련 공업지역 자리매김 행정구역·경계 변경 거듭 교통요충지로 ▲ 조선 후기만 해도 왕의 행차시에 이용되는 다리는 행차시에만 임의로 길을 닦고 나무로 된 다리를 놓았다가 행렬이 지난 이후에 다시 철거하는 관례가 있었다. 그러나 정조는 돌로 만안교를 건립하면서 이같은 관례를 과감히 철폐했다. 조선 22대 정조(正祖·1776~1800년 재위)는 역대 누구보다도 궁궐 밖 행차가 많은 임금이었다. 이 가운데 아버지 사도세자가 모셔진 현륭원(顯隆園) ..

[기사]길, 그곳으로 가다·30 제주로-국도 1번의 모태

[기사]길, 그곳으로 가다· 제주로-국도 1번의 모태 [경인일보] 30. 제주로 >1< -국도 1번의 모태 조선후기 6대로(大路) 가운데 서울에서 제주까지 잇는 서부의 간선도로가 '제주로'이다. 이 길은 해남에서 바닷길을 통해 제주까지 닿았으므로 육지부의 종착점 지명을 따 '해남로'라고도 하고, 동래로의 별칭이 영남대로이듯 이 길은 '호남대로'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제주로는 경기도에서 과천~수원~진위~평택 등을 경유하며, 영화역·장족역·동화역·청호역·가천역 등이 본 도로를 관리했다. 제주로는 문헌에 따라 통영로의 분기로로 취급된 적도 있지만, 지금은 수원로와 더불어 1번 국도의 모태가 되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국도이다. 1번 국도는 일제시기에 신작로로 정비된 제주로를 근간으로 한 것이었으나, 산업화 과정..

[기사]사라지는 전통문화 ‘안양의 산신제’

[기사]사라지는 전통문화 ‘안양의 산신제’ [2008/11/07 안양시민신문] 사라지는 전통문화 ‘안양의 산신제’ 문헌, 유래 등 기초자료도 사라져 일 년에 한 번. 마을 주민들이 모여 마을의 안녕과 복을 비는 마을의식인 마을제가 거의 자취를 감췄다. 마을제는 수목이나 비석을 대상으로 하는 방식과 산신을 대상으로 하는 산신제 등 다양한 형태로 이뤄져 있다. 도시개발이나 생활의 변화 등으로 점차 사라지고 있는 마을제는 마을의 유대감과 친목을 도모하고, 마을의 어른들이 주민간의 갈등이나 민원을 조정하는 중요한 자리이기도 했다. 안양시의 경우 현재 4개 정도의 마을제만이 몇 몇 주민들에 의해 간신히 명맥을 잇고 있다. 이중 지난해부터 산신제추진위원회가 구성된 ‘임곡, 매곡, 운곡마을(비산동 지역)’을 찾아 마..

[기사]박찬응의 ‘이미지로 세상읽기’①

[기사]박찬응의 ‘이미지로 세상읽기’① [01/20 안양시민신문]安養通學生一同 16.2.11 박찬응의 ‘이미지로 세상읽기’① 安養通學生一同 16.2.11 이 사진이 내 손에 들어온 건 지난 99년이었다. 이 사진 속에 엄청난 양의 정보가 숨어있는 것만은 확실한데 해가 바뀌도록 특별한 정보를 알아내지는 못했다. 게으른 탓이다. 지금까지 읽어낸 몇몇 정보를 기술해보면 다음과 같다. 이 사진의 해석에 가장 중요한 단서는 사진 아래 부분에 선명히 새겨진 ‘安養通學生一同 16.2.11’이다. 직역 하자면 ‘소화 16년 2월10일 기차를 타고 통학하던 중고생 29명이 안양역전에 모여 단체로 사진촬영을 하다’이다. 소화 16년이라면 서기 1941년이고 그해 12월7일 일본군은 진주만을 공격했다. 앞줄엔 8명이 의자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