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천신문]3.1운동 100주년 기념 우리동네 역사 찾기
시흥군, 민중운동을 견인하는 에너지원
최석희 ・ 2019. 4. 11. 13:08
'3.1운동 100주년 기념 우리동네 역사 찾기'를 주제로 우리동네 '마을신문 금천in'에 기고한 마지막 기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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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년 1차 시흥농민봉기와 1904년 2차 시흥농민봉기 그리고 1919년 시흥군의 3.1운동을 볼 때 시흥군은 우리나라 근대 민중운동의 중심지 였다. 당시 시흥군은 금천과 구로, 영등포, 동작, 관악, 광명과 안양, 과천, 의왕, 안산을 포괄하는 광활한 지역이었다.
1차 시흥농민봉기는 1894년의 갑오농민전쟁이 미완의 혁명으로 끝난지 4년 만에 일어났다. 당시 위정자들은 갑오개혁을 단행하였지만 토지개혁 등 농민들의 요구는 수렴되지 않았으며, 제국주의의 상품․자본 침투는 농촌경제를 파탄 국면으로 내몰았다. 지배체제 이완에 따른 지방관들의 불법적인 탐학은 극도에 달했다. 시흥군수로 부임한 직후부터 문봉오는 향리와 더불어 가혹한 수탈에만 전념하였다. 주민들은 탐욕스러운 군수에 대해 경멸적으로 ‘백정’이라고 부를 정도로 수탈이 심했다. 문봉오는 면직되고, 신임군수는 부임하지 않는 행정공백이 장기화 되었다. 이는 향리들의 토색질이 더욱 심하게 일어나는 상황으로 귀결되었다. 집강들로 구성된 지도부는 8월 23일을 ‘향회일’로 결정하고 42개 동리에 사발통문을 돌렸다.
동시에 전 군수의 잔인무도한 행위를 독립신문에 투고하여 사회적인 여론에 호소하였다. 이는 ‘새로운’ 방법론을 모색하는 등 농민운동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향회일에 모인 농민들은 관속배의 작폐를 성토하고, 문제의 조속한 해결을 촉구하고 나섰지만, 관속배들은 모두 도망가고 없었다. 농민들은 관속배들의 집물을 파괴하고 의복과 가구를 불태웠다. 서울 인근에서 일어난 농민 봉기에 위정자들은 경악했다.
당시 성우경 등 농민항쟁의 주모자는 구속수감되었으나, 모의에 가담한 집강들은 석방하는 등 사태를 진정시키기 위해 비교적 관대한 처분을 내렸다.
당시 경기관찰사는 ‘전군수의 불법행위는 인정되지만 이미 면관된 상태이므로 그에 대한 처벌은 불가능하다’는 내용으로 법무대신에 보고함으로써 사건은 종결되었다.
이에 시흥군 농민들 수백명이 집단으로 상경하여 군수와 관속배들에 대한 처벌을 요구하고 나섰다. 이들은 고등재판소에서 연좌농성을 하는 한편 만민공동회장을 찾아가 지원을 요청하고 황성신문사에 투고 하였다. 농민들의 지속적인 저항으로 마침내 문봉오 전군수는 태 100에 해당하는 처벌을 받았다.
을사 늑약에 반대한 원태우 지사의 투쟁
일제의 강제역부 모집에 항의해 일어난 1904년 2차 시흥농민봉기는 반외세투쟁의 선봉이었다. 2차 농민봉기가 일제에 의해 강제로 진압되었다. 대한제국 고종황제가 일본과의 조약체결을 반대하자 이토 히로부미가 1905년 11월 17일 어전회의를 열도록 하고, 헌병대장과 일본 헌병 수십 명의 호위를 받으며 궐내로 들어가 8명의 각료들을 위협하고 공갈을 자행해서 이완용등 을사오적의 찬성으로 을사늑약을 불법적으로 체결했다.
서울 종로상인들은 철시 하였으며,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3일이 지난 후에 사학자인 장지연 선생이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을 황성신문에 게제해 2천만 동포의 울분을 토하게 했다.
5일 후 불법적으로 조약 체결을 강제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기 위한 시도가 시흥군에서 일어났다. 시흥군 동면(안양시) 출신의 원태우 지사는 22일 이토 히로부미가 수원에서 사냥을 한다는 정보를 접하고 동료 김장성, 남통봉 등과 함께 거사할 것을 맹세하고 관악 전철역에서 서울방면으로 약 400m 지점인 안양육교 아래 철로 변에 돌을 깔고 열차가 전복되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동료 중 한 명이 두려움에 떨어 돌을 치웠고 이어서 열차가 나타났다. 그래서 원태우 지사는 혼자 이토 히로부미가 탄 기차를 향해 돌을 던졌다. 이때 기차의 유리창이 박살나며 유리 파편이 이토 히로부미의 얼굴 여덟 군데에 박혔다. 원태우 지사의 의거는 바로 다음날 오사카에서 발행한 대한매일신문에 보도되었으며, 일본박물관이 발행한 《일로전쟁화보》제29권(1905.12.8 발행)에는 일본인 화가 기무라 고타로가 그린 「어리석은 조선인의 폭행」이란 제하의 기록화와 함께 게제 했다.
안양시청 홈페이지에 가면 안양의 인물로 원태우 지사의 거사를 소상하게 알리고 있으며, 안양역 역사 벽면에는 원태후 지사의 부조가 제작 전시되 있다. 안양만안시립도서관 광장에는 원태우 지사 의거비가 1992년 11월 22일 세워졌다.
《일로전쟁화보》제29권(1905.12.8 발행)에는 일본인 화가 기무라 고타로가 그린 「어리석은 조선인의 폭행」 그림. 중부일보에서 인용함. 당시 기차의 속도는 시속 20~30km정도임. 원태우 지사가 돌을 던져 기차 창문이 파손 되었고 이토 히로부미는 유리 파편에 얼굴에 8곳의 상처를 입었고, 원태우 지사는 체포되서 모진고문을 받고 철도방해죄로 2개월을 복역하고 1906년 1월 24일 석방되었다.
민중운동의 에너지원
1898년 1차 시흥농민봉기 당시 군수와 향리들의 민중수탈을 독립신문에 투고해 사회적 여론을 조성한 점이나, 농민항쟁의 도화선이 되었던 문봉오 전군수가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자 요즘 표현으로 수백명의 주민이 상경투쟁을 벌여서 고등재판소에서 연좌농성을 벌이고 신문에 투고하고, 만민공동회에 연대투쟁을 호소에서 결국은 문봉오 전군수가 태 100의 처벌을 받게 한 사례는 당시 민중운동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사건의 이면에는 갑오농민전쟁 이후 농민들의 각성과 성장 등 민중운동의 새로운 흐름을 보여주는 것이다. 김형목(독립기념관 책임연구원)은 “시흥농민운동은 당대 모순과 이를 해결하기 위한 시흥인들의 저력이며 민중운동을 견인하는 정신적인 에너지원이나 다름 없었다”고 했다.
1904년 철도부설을 위한 강제역부 모집에 저항한 2차 시흥농민봉기로 당시 시흥군은 초토화 되었다. 항쟁중에 광명리의 민검석이 사망하고, 일본인이 휘두른 칼에 다수 부상자가 발생하는 아비규환이었다. 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일본 헌병과 군인 200여 명이 읍내에 주둔했으며 7~10명씩 조를 편성하여 각 동리를 돌아다니며 검속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마을이 폐허”를 방불케 한다는 표현은 이들이 얼마나 폭압적으로 주민들을 괴롭혔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시흥군 각 동리의 집강 40여명과 봉기 주동자 15명이 심문을 받았고, 김원록은 재판이 끝나고 사형이 집행되었으며, 성우경은 15년, 하주명은 10년형이 선고되었다.
2차 시흥농민봉기로 초토화된 시흥군에서 바로 다음해에 을사늑약이 불법적으로 체결되었고, 늑약이 체결된 지 5일 만에 원태우 지사와 동료들이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기 위한 거사를 벌였다는 점은 우연적인 일로 보기 힘들다. 제국주의 침탈에 반대하는 민중들의 등장과 시흥인들의 기백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 전통은 3.1운동에서도 들어난다. 23회에 걸쳐 연인원 1만여 명이 참여한 시훙군에서의 독립만세운동은 경기도에서 가장 많은 시위횟수로 기록되었고, 홍순칠은 3.1운동을 조직하면서 ‘조선이 독립하면 국유지는 소작인의 소유가 되니, 이때 만세운동을 벌이는 것이 득책이다’며 소작인들을 선동한 점은 시사 하는 바가 크다.
서울에서 일어난 3.1 만세운동에 이후 3월 3일 개성에서 제일 먼저 만세시위가 일어났고, 3월 7일 시흥보통학교(시흥초등학교)에서 동맹휴교와 만세시위를 벌였다.
못다 한 이야기
이제 3.1운동 백주년,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 100주년 행사도 마무리 되고 있다. ‘3.1운동 100주년 기념 우리동네 역사 찾기’의 일환으로 보도한 기사를 통해 우리 지역 선조들은 우리나라의 독립과 해방을 위해 민중운동을 선도하는 다양한 방식의 투쟁을 벌인 것을 확인하였다.
금천구 인근 자치구 홈페이지에 가면 나름대로 향토사에 대한 기록들을 찾을 수 있다. 금천구청 홈페이지에서 금천의 유래를 살펴보면, ‘서울 서남권의 중심지로 발돋움하는 금천구는 예로부터 경기지역의 중심지로 자리 잡아 온 유서 깊은 고장이다. 조선시대의 금천현 관할구역은 동쪽으로는 과천현, 서쪽으로는 부평부 남쪽으로는 안산군, 북쪽으로는 노들나루까지 미치는 매우 광활한 지역’으로만 나와 있고, 이거 이외의 다른 내용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교육문화 분야에 ‘금천관광’을 클릭하면 호암산성터, 한우물, 호압사 등의 정보와 금천관광코스를 볼수 있는 정도이며, 금천의 역사와 문화 관련해서 추가적인 정보를 얻을 수 없다. 군부대 터 개발을 하면서 발굴된 독산동 유적지와 관련해서는 롯데캐슬 아파트에 박물관이 조성되어 있음에도 홈페이지에서는 그 내용을 찾을수 없다.
흔히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고 한다. 3.1운동과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맞이하여, 만세운동을 재현하고 독립운동가를 추모하고 있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터전에서 일어난 역사에 대해서는 별다른 이야기가 없다.
구로구에서 금천구가 분구 된지 이제 24년이 되었다. 올해가 돼서야 금천경찰서도 관내에 세워질 정도로 공공자원이 부족한 것 또한 현실이다. 금천구 문화재단도 2017년에서야 설립되 이제 막 걸음마를 하는 시기이지만, 3.1운동 100주년,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맞이해서 금천구도 향토사에 대한 인식이 개선되고 향후 비전이 수립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또한 탐관오리와 제국주의 침략에 반대한 선조들의 투쟁을 알리는 표지석을 설치해서 오늘에 교훈을 삼을수 있는 계기가 되길 기대해 본다.
최석희 기자 nan7615@gmail.com
위의 기사는 김형목(독립기념관 책임연구원)의 ‘한국근대사의 올바른 이해를 위한 시론과 ‘시흥지역 농민운동 주역들의 올바른 자리매김’ 그리고 안양시청 홈페이지 안양의 인물 원태우를 참조하야 작성하였다. 이런 정도라도 역사를 정리할 수 있도록 가르침을 주신 김형목 선생께 감사드린다.
[출처] 시흥군, 민중운동을 견인하는 에너지원|작성자 최석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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