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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23]경인일보,전쟁과분단의기억 시즌2 '안양기독보육원'(2)

안양똑딱이 2024. 11. 1. 12:26

[경인일보]전쟁과 분단의 기억 시즌2· 

과거와 현재 100역사 잇는 공간 '안양기독보육원'[전쟁과 분단의 기억 시즌2·(15)]

이영지

이영지 기자 bbangzi@kyeongin.com

입력 2024-10-21 20:54

수정 2024-10-21 21:03

 

'타자 할아버지' 오긍선 박사의 '좋은집' 정신 이어받다

유년시절 보낸 이영운씨, 학교 다닌 덕에 무사히 사회 정착

아이들 영농기술 가르치려 힘써 '우장춘 박사' 초빙하기도

재원 마련 위해 손수 편지 써항상 타이프 치던 모습 기억

3천명 거쳐간 곳인데 정신 깃든 공간은 낡아 용도 잃기 직전

 

경인일보 홈페이지 원문보기

http://www.kyeongin.com/main/view.php?key=20241022010002054

 

 

안양기독보육원

지난 4일 찾은 안양 좋은집 부지에 남아있는 안양기독보육원 건물. 현재 아동복지시설 좋은집의 자립체험관으로 쓰이고 있다. 2024.10.4 /이영지기자 bbangzi@kyeongin.com

 

"안양기독보육원에서 다같이 공부도 하고 기술도 배우고사회 나가서도 살 수 있게끔 해주는 곳이었지."

 

6살무렵 안양기독보육원에 들어가 유년시절을 보낸 이영운(74)씨에게 보육원의 의미를 묻자 이렇게 답했다. 그는 중학생과 고등학생이었던 당시 보육원에서 같이 지내던 아이들에게 공부를 가르쳐줬던 기억을 늘어놨다.

 

"나는 학교 다닐 때 줄곧 모범생이어서 더 어린 초등학생들을 앉혀놓고 공부를 가르쳐줬는데, 내가 가르쳐주니까 점수가 안나오던 애들이 시험에서 100점도 맞아오고 그래서 뿌듯했던 기억이 나. 그렇게 큰 방에서 책상 놓고 다같이 공부도 하고, 밥 시간 되면 식탁에 둘러앉아 밥도 먹고 그랬지. 당연히 춥고 배고픈 기억도 나지만 단체생활은 어딜가나 춥고 배고프고 졸린 건 똑같지 않겠어?"

 

이영운씨는 보육원에서 공부도 하고, 기술도 배운 덕분에 성인이 되고 군대에 다녀와서 무사히 사회에 정착할 수 있었다고 했다.

 

그는 보육원에서 받은 도움을 후배들에게 돌려주고자 기우회를 꾸려 아동복지시설 좋은집에 학용품이나 간식 등을 베풀고 있다고 한다. 좋은집은 안양기독보육원의 정신을 이어받아 해당 부지에서 운영 중인 아동복지시설이다.

 

그가 기억하는 오긍선 박사는 학교에 가지 못하는 아이들에게도 꼭 영농기술만큼은 가르쳐주려 노력했었다고 한다. 특히 당시 우장춘 박사까지 보육원으로 초빙해 아이들이 신기해했던 기억도 있다고 말했다. 단순히 보육원에서 아이들에게 숙식만 제공하는 것이 아닌, 언젠가 보육원을 나가서 혼자서도 충분히 살아나갈 수 있는 삶의 기반을 꾸려주고 싶었던 오긍선 박사의 정신이 돋보이는 구절이다.

 

오긍선 박사

지난 4일 찾은 아동복지시설 좋은집 100주년 기념관에 걸려있는 오긍선 박사의 모습. 2024.10.4 /이영지기자 bbangzi@kyeongin.com

 

'보육원 타자 치는 할아버지' 오긍선 박사

 

오긍선 박사는 일제강점기 시절부터 6·25 전쟁 당시 피난길 등 갖가지 이유로 부모를 잃고 길거리를 떠도는 아이들을 보살펴주기 위해 보육원을 설립했다.

 

1922년 경성보육원을 설립하고, 1936년 안양으로 이전하면서 안양기독보육원으로 명칭을 변경하고 더 큰 부지에 더 많은 아이들을 보살피기 시작했다. 오긍선 박사의 별명은 '보육원 타자 치는 할아버지'였다.

 

본격적으로 보육원을 운영하기로 하면서 자신의 의술로 아이들을 보살피는 한편,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손수 타자를 쳐서 작성한 편지를 여러 단체 및 지인에게 보냈기 때문이다.

 

특히 오긍선 박사는 6·25 전쟁이 발발했을 당시 가덕도로 피난을 갔다가 다시 안양기독보육원 부지로 돌아왔는데, 건물 복구를 위해 후원해준 이들에게 일일이 감사를 전하는 편지를 작성했다.

 

보육원을 찾는 사람들은 언제나 타이프를 치고 있는 노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아낀 재원으로 아이들에게 투자하기 위해 생애를 마칠 때까지 보육원과 관련한 사무업무를 손수 처리하고 타자수 노릇까지 자처했던 모습이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오긍선 박사는 1962년 소파상을 수상한다. 그는 수상소감을 통해 "저의 아들로 자라난 아이들이 사회에 나가 떳떳하게 일하고, 또 그들의 자식들이 같은 불행을 겪지 않아도 되는 날을 위해 정성을 들였을 뿐"이라고 전했다.

 

아동복지시설 좋은집 100주년 기념관

지난 4일 찾은 아동복지시설 좋은집 100주년 기념관에 경성보육원, 안양기독보육원부터의 역사, 그리고 오긍선 박사와 관련한 사진과 자료들이 전시돼 있다. 2024.10.4 /이영지기자 bbangzi@kyeongin.com

 

흩어져 있는 안양기독보육원 흔적

 

현재 좋은집 부지에도 한 구석에 안양기독보육원의 흔적이 남아있다. 하단은 석조, 상단은 흙벽돌인 외벽에 지붕은 기와 모양을 한 한옥 건물 두 채다.

 

두 채는 좋은집의 자립체험관과 예절관으로 쓰이고 있는데 모두 내부는 현대식으로 리모델링을 마쳤다. 자립체험관 앞에 붙어있는 정초석은 글씨가 대부분 지워져 알아보기 어렵다.

 

예절관 정초석에는 "IN HONOR OF DR CALVITT CLARKE ㅇㅇㅇㅇㅇ DIRECTOR OF CHILDREN'S HOME"(ㅇㅇㅇㅇㅇ은 명확하지 않은 글자)라고 적혀있는 것으로 보아 외국의 지인들과 인근 미군부대에 도움을 청해 재정을 조달한 것으로 파악된다.

 

안양기독보육원 건물

지난 4일 찾은 현재 아동복지시설 좋은집의 예절관으로 쓰이고 있는 안양기독보육원 건물. 건물 입구 벽면에 정초석이 박혀 있다. 2024.10.4 /이영지기자 bbangzi@kyeongin.com

 

양명고등학교 부지에 두 채의 석축건물이 남아있던 것처럼 이곳에도 두 채의 건물이 개별적으로 남아있는 이유는 보육원이 하나의 기숙사가 아니라 단독주택 여러 채로 조성됐기 때문이다.

 

여러층에 많은 사람들이 한데 모여살던 보통의 기숙사와는 달리 당시로서는 이례적으로 단독주택에 아이들의 공간을 제공해 주거 환경을 향상시켰다는 평이다.

 

이러한 이유로 현재 안양기독보육원의 그나마 남아있는 흔적인 양명고와 좋은집 부지의 건물들은 고가도로를 두고 남북으로 흩어져있는 상황이다.

 

아동복지시설 좋은집 100주년 기념관

지난 4일 찾은 아동복지시설 좋은집 100주년 기념관에 경성보육원, 안양기독보육원부터의 역사, 그리고 오긍선 박사와 관련한 사진과 자료들이 전시돼 있다. 2024.10.4 /이영지기자 bbangzi@kyeongin.com

 

오긍선 박사의 정신을 이어받아

 

아동복지시설 좋은집은 지난 2018년 설립 100주년을 맞아 기념관을 만들었다. 이곳에는 경성보육원, 안양기독보육원을 거쳐 지금의 좋은집으로 이어지기까지의 과정과 오긍선 박사의 업적이 기록돼있다.

 

좋은집은 아이들의 자립에 뜻을 뒀던 오긍선 박사의 정신을 이어받아 자립지원프로그램에 역점을 두고 운영 중이다.

 

100년 동안 이 공간에서 성장해 사회에 진출한 아이들은 약 3천명 정도라고 한다.

 

오긍선 박사의 정신은 무사히 이어지고 있지만 그 정신이 깃들어있는 공간은 하루가 달리 낡고 있어 그 용도를 완전히 잃어버리기 직전이다. 공간이 전달해주는 울림도 있는 법이다. 아이들이 사회로 나가기 위해 기술을 연마하고 마음을 갈고 닦았던 공간의 의미를 부여하기에 늦지 않았다.

 

 

/이영지기자 bbangzi@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