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9428

[자료]마애종/문화유산에 대한 올곧은 이해의 자리가 되기를

[자료]마애종/문화유산에 대한 올곧은 이해의 자리가 되기를 [2008/11/14 안양민예총]이필운 안양시장 문화유산에 대한 올곧은 이해의 자리가 되기를 이 필 운 안양시장 금년에 벌써 3회째를 맞게 된 「安養世界 마애종 문화포럼」을 개최하게 된 것을 매우 뜻 깊게 생각합니다. 또한 우리 안양의 문화유산 보존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이 자리를 마련 해 주신 (사)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안양지부 임종순 지부장님과 회원 여러분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문화재는 우리 선조들의 삶의 예지와 숨결이 깃들여 있는 소중한 보배이며, 자산입니다. 이러한 문화유산을 잘 보존하여 후손에게 전승하는 것이야말로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안양의 문화재를 대표하는 ‘마애종’은 암벽에 승려가 종을 치는 모습을 조각한 것으로 현..

[자료]마애종/민족의 가슴에 아름다운 울림으로!

[자료]마애종/민족의 가슴에 아름다운 울림으로! [2008/11/14 안양민예총]김용태 (사)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회장 민족의 가슴에 아름다운 울림으로! 김 용 태 (사)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회장 청명한 하늘만큼 가을의 풍성한 기운이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하루가 다르게 급변하는 상황에서 오늘 [안양세계 마애종 포럼]이 참으로 진취적이고 뜻 깊은 자리로 여겨집니다. 우리 민예총은 자유와 평화를 꿈꾸며 군사독재에 저항하고 민주화에 앞장서며 시대의 고통을 함께 한 예술인 단체입니다.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 얼마나 어려운 시기가 많았습니까? 하지만 선조들께서는 그때마다 새로운 희망으로 온 몸을 던져 등불이 되셨고, 그렇게 시대를 밝히셨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옛 것을 익히고 본 받아 새로움을 창조한다”는 ..

[자료]마애종/천년의 세월을 깨고

[자료]마애종/천년의 세월을 깨고 [2008/11/14 안양민예총]임 종 순 (사)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안양지부장 천년의 세월을 깨고 임 종 순 (사)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안양지부장 천년 전, 안양 관악산 골짜기에 화려한 사찰이 있었다. 신라와 고려의 정신적 토대를 이어가기 위해 수백의 수도승들과 최영 장군을 비롯해 젊은 인재들이 수양하던 곳. 그 사찰을 벗어난 외진 곳에 하천을 내려다보며 묵묵히 큰 바위가 서 있다. 그곳에 어느 이름 없는 석공이 바위를 쪼아 종을 그리며 자신을 새긴다. 천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그 화려한 사찰과 탑들은 흔적도 없고, 바위에 스님과 종(鍾)만이 마주하고 있다. 천년의 세월을 침묵한 종(鍾)이여! 세상에 함몰된 중생들을 깨우치기 위해 안양과 한민족의 안녕을 위해 어찌할 수 ..

[김준혁]백성을 위한 화성행차 그 길을 찾아서

[수원시자료]수원시 학예연구사 길에서 찾는 역사, 왕의 능행차 사람들은 그렇게 이야기한다. 정조는 길 위의 군주라고…. 길에서 사람을 만나고 인생을 깨우치듯 정조는 길에서 백성을 만나고 조선을 생각했다. 정조에게 길이란 단순히 걷기 위한 도로가 아닌 억조창생의 시작이었다. 우리는 현재 ‘이산’이라는 드라마를 통해 세손의 길 떠남을 보았고 길 위에서의 흐느낌을 보았다. 그러나 진정 정조의 길 떠남은 사랑하는 연인 송연이를 만나기 위해서도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그것은 억울하게 돌아가신 아버님을 만나기 위한 것이었고, 길 위에서 만난 여리고 슬픈 질곡의 백성들을 보듬기 위함이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정조는 능행차를 통해 국왕의 지위를 강화하고 백성들의 현실을 직접 눈으로 보았다. 조선 ..

[자료]안양역앞에 미륵 부처 있던 제13 당마소 이야기

[자료]안양 미륵은 어디로 갔나?안양 미륵의 기록은 문헌적 기록은 거의 없고 다만 구전으로 전해 오는 설에 의지하고 있다. 안양미륵당 이란 말은 정조가 아버지능이 있는 화성(수원)을 가기 위해 기획한 園幸乙卯整理儀軌에 궁에서 수원(화성)까지 거둥의 안전을 위해 척후소로 24 곳의 塘馬를 설치하는 중에 제13 당마소가 安養彌勒堂站 이란 말이 있고 口傳에는 정조가 안양을 지날 때 번번이 말이 발길을 떼지 못 하자 그 연유가 미륵부처에게 불공을 드리지 않는 탓이라 하여 불공을 드리니 비로소 말이 움직였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이 미륵을 언제 누가 어떻게 만들었는지는 알 수 없고 다만 그 위치는 지금의 안양역 자리에 있었다는 것이다. 또 다른 구전에는 언제 형성된 이야기인지는 모르지만 원래 여기가 미나리밭 이었..

[기사]사라지는 전통문화 ‘안양의 산신제’

[기사]사라지는 전통문화 ‘안양의 산신제’ [2008/11/07 안양시민신문] 사라지는 전통문화 ‘안양의 산신제’ 문헌, 유래 등 기초자료도 사라져 일 년에 한 번. 마을 주민들이 모여 마을의 안녕과 복을 비는 마을의식인 마을제가 거의 자취를 감췄다. 마을제는 수목이나 비석을 대상으로 하는 방식과 산신을 대상으로 하는 산신제 등 다양한 형태로 이뤄져 있다. 도시개발이나 생활의 변화 등으로 점차 사라지고 있는 마을제는 마을의 유대감과 친목을 도모하고, 마을의 어른들이 주민간의 갈등이나 민원을 조정하는 중요한 자리이기도 했다. 안양시의 경우 현재 4개 정도의 마을제만이 몇 몇 주민들에 의해 간신히 명맥을 잇고 있다. 이중 지난해부터 산신제추진위원회가 구성된 ‘임곡, 매곡, 운곡마을(비산동 지역)’을 찾아 마..

안양권에서 가장 오래된 군포장 얘기

안양권에서 가장 오래된 군포장 얘기 [2007/08/13 군포시티뉴스]리포터 - 장병연 추억에나 남아 있음직한 오일장, 지금은 개발로 인해 수도권주변의 오일장이 성남의 모란 시장을 제외하고는 거의 사라졌지만, 우리 군포에도 인근 사람들을 불러 모아 신나게 장을 벌렸던 유명한 이 있었다. 당시 군포장은 인근 충청도에까지 입소문이 흘러 장돌뱅이들과 장꾼들을 불러 모아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한다. 웬만한 장꾼들이라면 을 모르는 사람들이 없을 정도였다고 하니 그 규모가 얼마나 컸던지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겠다. 어린 시절, 장날은 명절 다음으로 기다려지는 설렘이었다. 장에 가신 아버지의 손에 들려 있을 자반고등어와 총천연색이 어우러진 사탕, 그 사탕가운데 가장 인기가 있었던 것은 줄무늬가 들어간 왕눈깔사탕이었..

안양은 한국 블록버스터 영화의 효시

우리나라 영화 중 블록버스터의 효시는 어떤 작품일까. 영화진흥위가 지난 1월 발행한 연구보고서 ‘한국영화산업 구조분석’에 따르면 ‘쉬리’를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시초 작품이라 했다. 하지만 ‘쉬리’가 우리나라 블록버스터의 효시는 아니다. ‘쉬리 ’가 31억원의 제작비(마케팅비 포함)와 초특급흥행(전국관객 약 580만명)이라는 기록을 남긴데다 강제규 감독이 이 영화로 100억원이나 벌었으니 한국형 블록버스터 하면 팬들이 제일 먼저 ‘ 쉬리’를 떠올리는 것 같다. 하지만 영화연구가 정종화씨의 주장은 다르다. “1960년대는 우리나라 영화의 전성기였어요. 그 당시에 지금의 블록버스터에 해당하는 영화가 여러 편 있었는데 권영순 감독의 ‘진시황제와 만리장성’은 초대형작품이죠. 한양영화사가 3500 만원을 들여 만든..

[전설]안양 망해암(望海庵)과 미륵불

[전설]안양 망해암(望海庵)과 미륵불 망해암(望海庵)은 안양시 만안구 석수1동 241-54번지 관악산 동남기슭에 위치하는 조계종 사찰이다. 서울에서 출발하면 1번 국도를 타고 평촌에 이르기 직전 대림대학 방향으로 좌회전 한다. 대림대학 정문을 지나 마을길을 따라 계속 가다가 마을이 끝 날 때 쯤 부터 산길로 약 2㎞정도 오르면 된다. 소형차는 망해암까지 들어갈 수 있지만 산행삼아 관악산의 수려한 경관을 즐기며 2㎞ 정도 걷는 것도 좋을 것이다. 망해암에 오르면 구 안양시가지가 한 눈에 들어온다. 탁 트인 시야 때문에 시원함을 느낄 수 있으며 절은 기암괴석들 사이로 건물들이 옹기종기 놓여있다. 최근에는 앞에 대형 누각건물을 지어 마당공간을 확보했다. 1986년에 새워진 에 따르면 망해암은 신라문무왕5년(6..

[문원식]안양을 뒤흔든 폭발사고 셋

[문원식]안양을 뒤흔든 폭발사고 셋 [2006/09/22 안양시민신문]논설위원·성결대학교 교수·안양학연구소 소장 안양을 뒤흔든 폭발사고 셋 일제시대 말기인 1941년 천혜의 요새인 박달동 수리산 깊은 골짜기에 일제가 육군성 소속 탄약 저장시설을 설치하면서 안양과 폭발물과의 인연은 시작됐다. 일제의 패망으로 탄약저장 시설과 탄약을 인수한 미군은 일본군 탄약을 안산 넘어가는 본드레미 고개 아래 굴을 파서 그 안에서 폭발시켜 폐기처리했다. 당시의 목격자 중의 한 분인 변원신씨는 주민대피령이 내린 가운데 지축을 울리는 폭발소리에 구도심의 창문이란 창문은 모조리 떨어졌고, 파편은 자신이 살고 있던 양짓말까지 날아왔다고 증언하고 있다. 두번째 폭발사고는 1·4후퇴 중인 1951년 초 대량의 폭발물을 수송하던 탄약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