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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정조 임금의 사적비 만안교비(萬安橋碑)

이야기보따리/자료

 

[기록]만안교비(萬安橋碑)

만안교비는 정조임금이 화성으로 능 행차시 건너던 다리 '만안교'를 건설한 후 이를 기념하기 위한 사적비(事蹟碑)이다.
만안교비는 귀부와 비신, 가첨석을 갖춘 조선 후기의 전형적인 석비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석비의 전체 높이는 311m이며, 비신의 규모는 165×65×33cm이다. 구부(龜趺)는 한돌로 마련하였는데 판석형 2매의 지대석을 놓고 올려 놓았다. 하부에는 다시 높이 15cm정도의 받침을 귀부의 형태에 따라 마련하였다. 귀부는 발가락이 4조(爪)인 다리를 웅크리고 앉아있는 형태이며, 꼬리는 짧고 오른쪽으로 휘어져 있다. 귀갑은 무늬가 없지만 귀갑 위를 다시 꽃무늬 형태로 돌리고 모서리 부분을 오메가형으로 장식하였다.
특히 주목되는 부분은 구두(龜頭)부분인데, 목에 비늘이 있고 약하게 견갑이 표현되어 있으며 뿔형의 귀를 달았다. 머리 위에는 길게 날개형으로 머리칼을 늘어뜨리고 있으며, 도깨비와 같이 불쑥 튀어나온 눈과 양쪽으로 나온 이빨, 둥글게 과장된 코등은 조선후기가 되면서 다양한 형태로 변화되는 귀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즉, 거북이나 용의 머리가 아닌 상상의 동물을 과장되게 표현하여 비신을 사악한 것으로부터 보호하려는 의미를 강하게 상징화시켜 놓았다.
비신은 전면인 동쪽면에 '만안교(萬安橋)'라고 음각되어 있으며, 각자된 글씨 안에는 붉은색 칠이 되어있다. 후면에는 만안교의 공적과 관련된 내용들이 음각되어있고, 측면에는 만안교 건립연월일과 축조공사에 참여한 사람들의 명단이 기록되어있다.
비신 상단부는 파손이 심하여 판독하기 어려운 상태이다. 비문의 주요 내용은 화성으로 가는 도중에 안양천이 있으므로 석교의 필요성을 느낀 신하가 공사 착수 3개월만에 준공하자 정조가 만안교(萬安橋)라는 이름을 내렸다는 것이다. 비신의 상부는 팔작지붕을 번안한 가첨석을 올려 놓았는데, 마루 부분을 높게 하여 마무리 하였다. 가첨석도 귀부와 같이 조선후기의 전형적인 양식을 보여 주고 있다.  
만안교라고 다리이름을 정한 것에 대해서는 “왕의 어가가 방울을 울리며 편안히 다녀오기를 만년을 한결같이 기원할 때 하천에서 다리에 쓰일 돌들이 나와 경비를 절감하여 신이 도왔으며, 만년을 만안하고 천년만년 편안하기 반석과 같다.”라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갑문(閘門)이 5개라고 적혀 있다. 그러나 갑문이 실제로 7개였던 것으로 보아 오기로 보인다. 비문은 경기도 관찰사 서유방(徐有坊)이 글을 짓고 조윤형(曺允亨)이 썻으며, 전면의 글씨는 유한지(兪漢芝)가 썻음을 알수 있다. 유한지는 김정희에 앞서 전서와 예서를 잘 쓴 인물로 유명하다.
 
萬安橋碑頌 并序
 
南充縣治南二十里有安養川即華城 輦路也惟我 聖上歲謁 園寢由是川以濟今春又奉
慈駕利涉川以是顯于世凡 幸行地方有川必有橋橋以木 駕過輒撤去冰之澌水之涉者
病焉前道臣臣徐龍輔以是橋之有所重也將以石代之未及就賤臣受 命來莅以孟秋啟基三
閱月而功告成延可十五丈袤可四丈高可三丈爲閘者五逮上 聞賞監董人及工匠有差 特
錫名曰萬安臣謹按王者就橋之安始於漢帝之長安而未聞奉 慈駕以行徒杠輿梁作於成周
而亦未聞代之以石傳之萬年也是橋也幸處華城 輦路 聖駕之一年一度 慈駕之十年一
度駕六龍和八鑾安而徃安而還萬萬年如一而推其餘迤及萬姓使遠近行李視以康莊無揭厲
險阻之患而萬萬年戴 聖恩頌 慈德豈不誠盛矣乎哉橋之始也伐石于川之傍有石出焉可
以▨▨▨▨減其半神若有助其亦異矣臣拜手稽首記其事系之以頌曰
王幸于 園一度一歲 天臨虹橋歲以萬計 與福偕至其下有川 時奉 慈駕萬安萬年
恩及萬姓坦履齊歡 於干於萬安如砥磐
正憲大夫知中樞府事兼京畿觀察使兵馬水軍節度使水原府留守開城府留守江華
府留守廣州府留守都巡察使 奎章閣檢校直提學臣徐有防謹撰
嘉善大夫戶曹叅判兼同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副摠管臣曹允亨謹書
學臣俞漢芝(謹書前面)
監董僉使 金天寶 營稗嘉善徐浹修 刻手邊李三興 治匠邊首鄭一成
五衛將張 烻 營校嘉善徐毅麟 石手邊首崔貴得
五衛將金大衍 營吏 李孝錫 朴福乭
五衛將金元爕 虹霓邊崔興瑞
上之十九年九月 日立  
 
남충현의 주치 남쪽 20리에 안양천이 있는데 바로 화성으로 가는 연로이다. 우리 성상께서 해마다 원침을 전알하려면 이 하천을 건너게 된다. 올 봄에도 자가를 모시고 이 내를 건넜으니 이로써 세상에 알려졌다. 무릇 행행지에는 하천이 있기 마련이고 하천마다 다리가 있기 마련인데 이들 다리는 나무로 놓아다가 왕의 행행이 지난 뒤에는 바로 철거하였다. 이로써 얼음 풀릴 때나 장마가 질 때에는 물을 건너는 사람들이 고생을 하였다. 전 도신 서용보가 이 다리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돌로써 대체하려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다가 미천한 신이 명을 받고 취임하여 맹추에 이 일을 착수하여 3개월 만에 준공하니 길이는 15장이요, 폭은 4장이며, 높이는 3장이고, 갑문이 다섯 개이다. 임금께서도 이 일을 아시고는 감독하는 사람과 공장에게 차등있게 상을 내리고 특별히 ‘만안교'란 이름도 내리셨다. 신이 생각건대 왕자가 다리로 편안히 건너게 된 것은 한나라의 장안교에서 비롯하였지만 어머니를 모시고 다녔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으며, 도강과 여량은 성주 때에 이루어졌으나 돌로 만들어 만세에 전하였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다. 이 다리는 다행히도 화성 연로에 있으니 성가는 1년에 한 번, 자가는 1달에 한 번씩 육룡에 멍에를 메이고 팔란을 울리면서 편안히 지나갔다가 편안히 오기를 만년을 한결같이 할 수 있으며, 그 외에도 편의는 만백성에게까지 미쳐 원근의 짐 꾸러미들이 튼튼한 다리로 건너게 되어 이제는 옷을 걷어 올리거나 험한 길로 돌아서 갈 걱정이 없어졌다. 이로써 만년토록 성은을 입게 되고 자덕을 기리게 되었으니 어찌 참으로 성한 일이 아니겠는가? 공사를 처음 시작하였을 때 하천가에서 돌을 채벌하는데 과연 돌이 나와 경비를 반감할 수 있어 마치 신이 도운 것 같았으니 이 또한 기이한 일이다. 신은 배수계수하고 그 일을 기록한다. 송은 다음과 같다. “왕께서는 해마다 한 번씩 원침에 행행하시오니 이 다리 건너시길 만 번을 하시옵소서. 복록과 함께 이르게 되리니 아래에는 내가 있습니다. 때로는 자가를 모시고 만년동안 만안하소서, 은혜가 백성에 미치니 마음 놓고 건넘에 환성 올리도다. 천년만년 편안하기 반석과 같도다” 정헌대부 지중추부사 겸 경기관찰사 병마수군절도사 수원부유수 개성부유수 강화부유수 광주부유수 도순찰사 규장각검교직제학 신 서유방 삼가 지음 가선대부 호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부총관 신 조윤형 삼가 씀 학신 유한지 전면 삼가 씀 감동 첨사 김천보 오위장 장정 오위장 김대연 오위장 김원섭 영패 가선 서협수 영교 가선 서의린 영리 이효석 각수변 이삼흥 석수변수 최귀득 박복돌 홍예변 최흥서 야장변수 정일성 상지 19년(정조 19, 1795년) 9월 일 세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