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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215]안양기독보육원장 오긍선박사 길러낸 존 A. 알렉산더

안양똑딱이 2025. 2. 15. 11:09

 

조선의 醫師 오긍선박사 발굴하고 길러낸 미국인   A.  알렉산더

[출처]https://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nNewsNumb=201409100057

월간조선: 양국주 서빙더네이션스 대표 : [역사발굴] 일제강점기 조선땅에 온 벽안의 선각자들

 

프린스턴·컬럼비아의대 나온 부호의 아들1902來韓했으나 父親喪으로 두 달 만에 귀국

조선에서 사역하는 선교사들과 지속 교제순천에 알렉산더 병원 등 교회당과 병원 건립

배재학당 졸업한 청년 吳兢善을 켄터키 루이빌로 데려가 朝鮮 최고의 의사로 키워

1929년 우드포드에서 향년 53세로 별세吳兢善 키우는 등 선교사 역할 톡톡히 해내

 

1902년 늦가을 11, 그는 여느 선교사처럼 조선에 부임했다. 85일생인 그의 나이가 스물일곱을 갓 넘긴 때였다. 총각의 몸으로 조선 같은 오지에 나가게 되면, 여자친구들마저 손사래를 치며 이별가를 부른다. 그래서인지 선교지에 이미 나와 있는 처녀 선교사들의 몸값이 금보다 귀한 때였다. 사랑하는 이를 찾아 짝을 짓는 일이 그리 녹록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가 조선에 도착하기도 전에 그에 대한 소문이 먼저 퍼졌다. 켄터키주 출신의 수재가 미국 최고의 명문 프린스턴대학을 나와 뉴욕 컬럼비아의과대학을 나왔다. 이만한 스펙이라면 당시 한국에 나와 있던 그 어느 선교사들보다 경력면에서 결코 뒤지지 않았다.

 

거기다 그는 미국에서 손꼽히는 켄터키 목장 재벌 집안의 자손이었다. 그의 할아버지가 일군 우드번 농장(Woodburn Farm)은 자그마치 3000에이커(367만 평)가 넘었다. 여의도 면적의 다섯 배 크기다. 당시 조선에 와 있던 처녀 선교사들에게는 단연 선망의 대상이 아닐 수 없었다.

 

알렉산더 존 A. 알렉산더.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이름자를 그대로 옮겨 오다 보니 알렉산더라는 이름이 앞뒤로 붙었다. 11월에 제물포에서 전주로 부임하던 매쿠첸, 두 딸을 데리고 3년 전에 군산으로 부임한 불(Bull) 선교사의 부인과 함께 배를 탔다. 그가 부임했던 군산은 1895년도부터 선교지부가 들어선 이래 자그마한 학교와 초가집으로 지어진 진료소, 그리고 전킨(W. M. Junkin) 선교사가 돌보던 궁말교회와 지교회가 전부였다.

 

갯벌 군창(群倉·쌀창고)이 군산(群山)으로 이름을 바꾸어 18995월 개항(開港)한 지 3년이 지났을 무렵이다. 그런 한적한 시골에서 그에게 주어진 일은 병약한 환자를 돌보는 일이다. 한 손에 복음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 환자를 돌보는 게 그의 임무였다.

 

미국의 으리으리한 도시 뉴욕에서 살다 문명과는 담을 쌓고 사는 조선에, 그것도 궁벽한 시골에 들어온 그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비슷한 시기에 남장로교의 군산 선교부에는 버지니아 렉싱턴에서 온 전킨 선교사 내외와 버지니아주 노포크에서 온 윌리엄 불 선교사가 있었다.

 

1892년에 호남 최초의 선교사로 입국했던 전킨은 10년 가까운 세월에 돌림병으로 세 자녀를 잃었다. 그는 선교부 가까이에 자리 잡은 자녀들의 묘지를 자주 찾아가 조선에서의 사역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으려 했다.

 

그리고 1899년 군산에 온 불 선교사의 언어를 돕던 청년 오긍선(吳兢善)도 있었다. 오긍선은 알렉산더보다는 두 살 아래였는데, 알렉산더는 우선 오긍선의 성실성에 감복했다. 겨우 스물다섯의 나이에 배움에 대한 열정도, 미개한 조국에 대한 아픔도 깊었다.

 

공주 출신 오긍선은 배재학당에서 학업을 마친 뒤 1897년 독립협회에 가입했고협성회, 만민공동회의 간부로 활동하던 중 척족파(戚族派)와 대한제국 정부에 날조된 만민공동회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령이 내려지자, 군산에 은거하면서 남장로교 선교사 불의 개인교사를 하던 중 알렉산더를 만난 것이다.

 

吳兢善과의 운명적 만남

 

알렉산더가 한국에서 떠나고 1905년 군산 병원에 부임한 토머스 대니얼 의료선교사는 이곳 군산 병원에는 현미경도 없고, 안경을 맞추는 데 반드시 필요한 검안 렌즈조차 없다고 한탄했다. 미국 버지니아의과대학을 졸업한 최고의 인재였지만, 수술과 환자 치료에 필요한 최소한의 시설마저 없는 곳에서 일해야만 했다. 마찬가지로 알렉산더라고 더 나은 환경에서 일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밤낮 없이 밀려드는 환자들, 바다 건너 충청도 부여나 당진에서도 환자들이 몰려왔다.

 

전라도 특히 군산은 김제와 더불어 한국의 곡창지대로 불리는 비옥한 토양을 가졌다. 1892년 조선에 발을 디딘 선발대가 군산을 다녀온 소감에는 이런 표현들이 곧잘 등장한다.

 

내포 반도(The peninsular of Naipo-오늘의 군산과 태안반도를 일컬음)나라의 곳간이라고 불리며, 다량의 곡물··각종 물류를 수도로 송출하는 곳이다. 광활한 녹초지를 바탕으로 코리아에서 최고 품질의 소고기와 각종 고기 종류들을 생산하는 곳이다.”

 

땅이 사람을 만든다고 했던가? 불안한 정치 환경을 제외하고는 군산은 비옥한 곡창과 풍부한 해산물을 조달받기에 최적의 고장이었다. 그리고 온순한 충청도, 전라북도 사람들의 친절이 알렉산더에게 감동을 주었다. 그가 군산에서 일하며 오긍선을 만나 아침저녁으로 함께 일하며 그로부터 조선어를 배우고 앞으로 일하게 될 한국에 대한 정보도 얻고 배움을 익힌다는 것은 그에게는 행운이었다.

 

게다가 오긍선은 선교사들이 공통적으로 공감하는, 사람에 대한 연민이 깊은 사람이었다. 하나님만 잘 믿는 게 아니라 가난한 이웃에 대한 그의 경외심과 긍휼은 이를 바라보는 선교부 내의 다른 선교사들 사이에서 소리 없는 칭찬으로 이어졌다. 그만큼 오긍선은 군산 선교부에서 보배로운 사람이었다.

 

비록 태어난 곳, 자란 곳은 다를지라도 같은 하나님을 경배하고 그분의 뜻을 실행하는 아름다운 사람을 만나는 일은 언제나 유쾌한 일이다. 알렉산더에게 있어 오긍선은 조선에 대한 진지한 물음과 신뢰를 더하는 계기가 되었다. 다만 그에게 한 가지 고민이 있다면, 연로하신 아버지의 건강이었다. 그가 조선으로 떠나올 때 아버지 알렉산더의 연세가 일흔일곱이었다. 아버지와 스무 살 나이 차이가 났던 어머니 루시는 알렉산더 아래로 네 명의 자녀를 더 두었다.

 

문제는 동생 조셉이 알렉산더와 12살 터울로 아버지의 유고시 집안사를 이을 만큼 충분히 성장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알렉산더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군산에서 언제나 한국인들의 영혼과 고통받는 이들을 위해 간절하게 기도했다.

 

아무래도 낯설고 말이 통하지 않던 땅 군산에서 바쁜 나날을 보내던 알렉산더에게 오긍선은 나침반 같은 존재였다. 켄터키에 있는 두 살 아래 여동생과도 나누지 못했을 찐한 애정이 두 사람 사이에 초겨울의 눈송이처럼 쌓여갔다.

 

父親喪으로 두 달 만에 귀국

 

알렉산더에게 아버지의 부음이 전해진 건 1902122일이었다. 아펜젤러(Appenzeller)가 목포 선교부에 있던 레이놀즈 선교사를 만나러 가던 중 군산 앞바다에서 폭풍우를 만나 배가 뒤집히는 바람에 비명횡사를 하고, 영국 성서공회는 아펜젤러의 죽음으로 성경 번역이 늦어질 것을 우려해 언더우드와 게일, 레이놀즈를 서울에서 성경 번역하는 일에만 전념토록 조치한, 당시 남장로교 선교부를 대표하던 선배 선교사 레이놀즈가 서울에 주재하며 호남에 있는 남장로교 선교사들을 관장, 감독하던 시절이었다.

 

그를 통해 아버지의 부음이 들려오자, 알렉산더는 당일 배편을 이용하여 서울로 왔던 듯하다. 그가 선배 선교사 레이놀즈를 증인으로 알렌 전권대사 앞에서 임시 여권을 신청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역만리 타향에 와 있던 선교사들에게 있어 부모의 죽음은 평생을 짊어지고 갈 사모곡(思母曲)이다. 그에게 50년 연상의 아버지는 누구보다 귀한 분이었다. 미국 최고의 명문대학 프린스턴을 졸업한, 부모들의 자존심이었을 알렉산더. 더욱이 아버지가 오십에 얻은 첫 아들이었기에 알렉산더는 아버지의 모든 것이었다. 그런 아들을 이역만리 조선 땅에 보내놓고 눈을 감는 아버지의 마음이 어떠했을까?

 

이듬해 전주에서 발진티푸스에 걸려 죽은 리니 데이비스 역시 1892년 덴버를 거쳐 조선에 올 무렵 버지니아 애빙던에 계신 아버지의 부음을 들었다. 이제 조선 선교를 위해 발걸음을 내디딘 마당에 돌이킬 수 없는 처지가 아니던가? 눈물을 머금고 남장로교 선교사로 18921018, 서울에 첫발을 내디딘 그에게 남대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그는 여자의 몸으로 팔패 시장에서 잠을 잘 처지가 아니었다. 그는 6m 높이의 남대문 석벽을 일정한 거리까지 사다리를 이용해 올라가 나머지 구간은 로프를 이용하여 간단하게 넘었다.

 

조선에 꿈을 갖고 찾아온 리니 데이비스의 무용담은 선교사 사회에서 회자되기 일쑤였다. 선교지에 나와 있는 기간 중 부모를 여의는 일은 살을 에는 고통보다 더한 고통을 안겨준다. 슬픔은 배가 되고 기다려주지 않는 머나먼 거리에 서로를 그리며 애간장만 태울 뿐이다.

 

알렉산더에게는 아버지의 가업을 잇는 숙제가 남았다. 할아버지로 시작된 종마(種馬) 목장이, 동생들에게 맡겨 될 일이 아니었다. 오늘날 켄터키 하면 종마 사업으로 연상될 만큼, 150년의 역사를 지닌 특성 있는 산업이었다. 켄터키는 메릴랜드와 버지니아 벨트라인을 연결하는 종마 산업의 메카이다.

 

소위 귀족 스포츠(The Sport of Kings)의 핵심으로 켄터키에만 종마 면적이 약 10만 에이커(12241만 평)에 달한다. 알렉산더의 할아버지 로버트가 일군 우드번 목장은 켄터키에서도 가장 대표적이면서 전 세계 종마 산업의 수도(The Horse Capital of the World) 역할을 했다. 한 개인의 비즈니스가 켄터키주의 산업의 심벌이 된다는 것은 영광과 함께 무거운 책임도 뒤따르는 법이다. 알렉산더에게는 집안의 가계와 산업에 대한 막중한 책임이 뒤따랐다. 이렇게 알렉산더가 조선에 들어올 때 품었던 하나님에 대한 헌신과 고통받는 이웃에 대한 봉사는 그야말로 두 달 만에 끝이 난다.

 

고향 땅에서 조선 의료선교 감당

알렉산더의 기부로 세운 순천의 알렉산더 병원

 

아버지의 죽음과 가업을 이어야 한다는 책임감 앞에 놓인 알렉산더. 레이놀즈와 선배 동료들은 이러한 알렉산더를 위해 수많은 조언과 격려를 주었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그가 떠나간 이후 수많은 선교사의 보고서와 편지 행간에서 발견된다.

 

그리고 알렉산더와 한국에서 사역하는 선교사들과의 지속적인 교제를 통해 그가 자신이 이루지 못한 조선에서의 꿈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모습을 바라보게 된다.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서라도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자신의 약속을 실천할 것을 다짐한다.

 

우선 그는 조선의 극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병원을 짓고 이를 도왔다. 군산뿐 아니라 1913년 순천에다 새로운 선교 부지를 만들어 학교와 교회당, 병원을 지을 때 병원 건축비용을 전담했다. 남장로교 선교부는 이를 기념하여 알렉산더 병원이라고 이름 지었다. 당시 순천의 알렉산더 기독병원은 가장 역동적인 의료시설로 각광을 받았다. 그가 듀크대학에 세운 간호대학이 오늘날에도 그의 이름을 빌리는 것만 보아도 그의 자선은 헌신 그 이상임을 여실히 알 수 있다.

 

순천 선교부는 이렇듯 알렉산더의 지원에 힘입어 모범적인 선교부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1927년 순천 병원에서 일했던 수간호 선교사 그리어(Anna L. Greer) 양은 병원을 청결하게 유지함으로써 모든 환자를 편안하게 만들었다. 1927년 알렉산더 병원을 방문한 사람이 미국 장로교 회보에 올린 글을 보자.

 

우리는 간호사 그리어 양이 한국의 간호사들과 소년들을 훈련시켜 깨끗한 병원으로서의 자부심을 갖추기 위해 밤잠을 설친다는 사실도 알았다. 이 병원에서 치료 중인 환자들의 면모를 보면 다음과 같다.

 

발뒤꿈치에서 대나무 조각 제거, 5세 아이의 방광 결석, 무릎 관절 결핵, 척추 결핵, 폐농양으로 1쿼터 반의 고름 제거, 한약 오용으로 인한 다리 절단, 얼굴 암, 한국인 의사의 잘못된 무릎 봉합으로 고름이 찬 다리 절단, 디프테리아, 조산으로 인한 합병증, 결핵에 걸린 승려 등환자들 가운데 62%가 무료로 치료받는 절대적 자선 환자였다. 우리는 이 일을 즐기며 사랑으로 섬기는 의사 로저스에게 이 병원의 성공이유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위 글에서 알 수 있듯이 제아무리 심산유곡(深山幽谷)의 승려라 할지라도 병이 들면 전주 예수 병원이나 순천 알렉산더 병원 신세를 져야만 했다.

 

알렉산더의 손길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중국에서 일하는 남장로교 선교부의 병원도 건립해 주었다.

 

吳兢善에게 미국 유학길 터줘

 

19224월 촬영한 목포의 영흥학교 브루스 커밍 교장의 전별 기념사진. 알렉산더가 기부해 세운 건물이다

 

한국에서 알렉산더의 기념비적인 작업은 사람을 기르는 일이었다. 그는 목포와 원근 각처에 학교를 지어주었다. 목포 영흥학교가 전란 전까지 남아 있던 그의 유품 같은 학교였다. 그러나 알렉산더의 진면목은 이런저런 외관에 있지 않다. 그는 진정으로 하나님의 사람을 키우는 일, 이로써 조선을 돕는 일에 알렉산더의 진가가 드러난다.

 

그는 자신이 아버지의 부음으로 미국으로 돌아갈 무렵, 군산에서 자신을 돕던 청년 오긍선을 미국으로 데려간다. 물론 자비를 들여서이다. 일시적이고 충동적인 동기가 아니라 오긍선을 사랑하고 그의 인격을 알아 작은 도움으로 한 인간의 운명을 바꾸고 그를 통해 이 사회에 따스한 온기를 뿌리기 위함이다.

 

알렉산더는 19293, 자신의 고향인 우드포드에서 향년 539개월의 젊은 나이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그가 묻힌 프랭크퍼트(Frankfort) 묘지로부터 40마일 거리에는 그와 교분을 나누며 조선을 위해 함께 기도했던 포사이드(W. H. Forsythe)의 무덤이 있다.

 

그가 1911, 목포에서 철수하여 1918년 장흡수부전증(Sprue)으로 사망하기 전까지 함께 나눈 우정의 기록이 그의 고향에 있는 마틴 슈미트(Martin Schmidt) 컬렉션에 보관돼 있다. 그와 함께 사역했던 전킨 선교사는 1908년 정월에 전주에서 소천했다. 전킨 내외의 고향인 버지니아주의 크리스천버그까지는 몇 시간 남짓에 불과하다.

 

오긍선은 알렉산더 덕분에 학비에 대한 걱정 없이 미국에서 공부에 전념할 수 있었다. 그는 센트럴대학 교양학부에 입학, 물리와 화학을 수학하였다. 1904년 센트럴대학을 졸업하고 루이빌의과대학 대학원으로 진학하였다. 대학원 재학 중 미국 의사면허를 취득한 뒤,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인으로 서재필(徐載弼)에 이은 두 번째 의학박사였다.

 

6개월간에 걸친 인턴 생활을 마무리하던 1907, 오긍선은 남장로회 선교부로부터 한국 파견 선교사 자격을 얻어 귀국하였다. 그해 군산 병원에서 대니얼 선교사의 후임으로 병원 일을 책임졌다. 한편 자신의 사재와 월급 등을 기부하여 1909년 옥구군에 구암교회 예배당을 건립, 헌당하였다. 또한 교육 사업에도 관심을 쏟아 군산의 안락학교와 영명학교에서 가르치기도 했다.

 

1910년 봄, 선교부의 지시로 군산을 떠나 광주로 가서 광주기독병원장에 취임하였고, 1911년에는 목포로 가서 남장로회 설립 선교 병원인 프렌치 병원 일을 맡았다.

1924년 무렵의 경성고아원. 오긍선이 세운 고아원으로, 미국 선교사들이 발행한 기독교연감에 나온다

 

선교 초기부터 세브란스와 연희전문학교는 미국에서 파송된 북장로교와 남장로교, 감리교회의 연합 기관으로 재정과 소요인력의 대부분이 이들의 헌금으로 유지되었다. 그래서 당시 이들 학교의 이름 앞에는 연합이라는 의미의 ‘Union’이라는 타이틀이 있었다.

 

미국 내에서 남과 북이 치열하게 전쟁을 치렀던 1865년 이후, 북군의 승리로 전란이 끝났음에도 미국은 아직까지 남과 북으로 나뉜 두 개, 아니 50개의 나라였다. 그런데 조선에 와서 일하던 남과 북 출신의 장로교, 감리교 선교사들이 전도와 교육, 사회 복지 각 분야에서 괄목할만한 일을 하면서 남과 북의 지역감정과 적대적 모순을 떨쳐버리고 하나로 연합한 모습은 그리 흔치 않은 것이다. 그들은 조선에 단 하나의 장로교만을 세우기로 맹약한 터였다. 그리고 전도의 결과로 얻어진 신자들을 서로 빼앗아가지 않기로 약조했다.

 

정치적 망명기간 중에 미국의 밴더빌트대학에서 공부했던 윤치호(尹致昊)는 언더우드를 비롯해 랜킨과 레이놀즈 등 장로교 목사들이나 선교사를 도와 일했다. 그러나 이들은 윤치호를 장로교 신자로 만들려고 굳이 애쓰지 않았다. 윤치호의 어머니가 감리교 신자인 것을 감안하여 감리교인 신분으로 있으면서 장로교 선교사들과 더불어 일하도록 배려했다.

 

서울에 곤당골 교회를 차려 백정(白丁)에게 전도했던 장로교 목사 새뮤얼 무어(Samuel F. Moore)는 인천이나 수원에 나가 전도를 하고는 인근의 감리교회로 그를 인도해 주곤 했다. 선교사들끼리 교인을 놓고 다투지 않기로 약조한 예양협정(禮讓協定)’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감리교도 황해도 사리원에 감리교회를 세우고 싶었지만, 장로교회에서 이를 완곡히 거절했다. 이미 사리원에는 장로교회가 넷씩이나 세워져 있으므로, 더 이상의 교회가 필요하지 않다고 본 것이다. 이들은 이처럼 지역과 교단의 경계를 넘어 초교파적으로 협력하였다. 선교사들의 에큐메니칼 정신은 이 무렵부터 발휘되고 있었다.

 

조선 최초의 피부의학 개척자 오긍선

 

1913년에 남장로교를 대표하여 오긍선이, 1917년에 셰핑(서서평) 선교사가 각각 의사와 간호원으로 세브란스에 파송된다. 오긍선은 세브란스의학교 교수 겸 진료의사로 일하면서 병원장 에비슨(Avison)의 추천으로 19164월 도쿄제국대학 의학부에서 피부비뇨기과학을 수학한 뒤 1917년에는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에 피부과교실을 신설하고 주임교수로 취임했다. 조선 최초의 피부의학의 개척자가 된 것이다.

 

세브란스에서 일했던 셰핑 선교사의 1917년 기록에 보면 미국에서 온 어느 의료선교사보다 오긍선이 환자를 대하는 진찰 기록이 항상 세 배에 달했다고 적혀 있다. 이 기록 하나만으로도 그가 얼마나 환자를 대할 때 지성을 다했으며, 돈을 목적으로 일하지 않았다는 것을 여실히 알 수 있다.

 

1918년 뜻있는 청년들을 모아 토요구락부를 조직하여 시국문제를 토론하기도 했고1919년에는 경성 고아구제회를 창립하고 경성고아원을 설립했다.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을 위한 오긍선의 긍휼은 끝이 없었다.

 

낮에는 병원에서 일하며 밤에는 자신이 보육하는 40명의 고아와 더불어 삶을 나누었다. 그 당시 서울 권번(券番)에 소속된 기생들조차 가난하고 어려운 이들을 돕기 위해 자신의 수입을 이들 고아들을 위해 나누었다.

 

 

 

1917년 무렵의 오긍선 선교사. 미 루이빌의대 대학원을 졸업한 오긍선은 서재필 박사에 이어 한국인 의학박사 2호였다

 

에비슨의 기록 근대 한국 42(청년의사 발간)에는 고아들을 향한 오긍선의 자비가 잘 드러나 있다. 오긍선과 함께 세브란스가 위치한 남대문 밖을 나서거나 시장 바닥에 가면 구걸하는 어린이들부터 가난한 청년들이 오긍선을 에워싸고 아버지” “삼촌하며 그에게 다가서는 애정 어린 모습을 목격하고는 했다. 에비슨은 이러한 오긍선의 모습에서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여기던 예수의 흔적을 발견하고 그를 진심으로 존경하게 되었다.

 

초기 기독교 선교 병원은 열악한 환경으로 소요인력에 높은 봉급을 줄 수 없었다. 에비슨은 서울에 가설되던 미국인 소유의 전차회사에서 영어 잘하는 조선 청년을 구한다는 연락을 받고 오긍선의 의중을 떠보았다.

 

긍선미국인이 경영하는 회사로 자리를 옮기겠는가?”

선생님그리로 가면 주일 성수(聖守)하고 전도할 수 있습니까?”

아니, 봉급은 몇 배를 받을 수 있겠지만, 일이 많아서 교회의 예배에 참석한다든가 전도하기는 어려울게요.”

 

주일을 지키기도 어렵고 전도도 할 수 없다면 비록 박봉이라도 저는 이 자리에 머물겠습니다.”

 

과연 하나님의 사람만이 하나님의 사람을 알아본다. 이러한 오긍선의 신앙과 삶에 대한 태도는 에비슨을 감복시키기에 충분했다. 그 마음에 에비슨이 갖지 못한 예수의 삶이 투영되면서 비록 연배가 아래였지만 그를 존경하며 기꺼이 친구로 받아들인 것이다.

 

세브란스 교장에 취임

 

오긍선은 남장로회 선교사들에게 고아원과 장애 아동, 소외 계층을 돌보는 일의 필요성을 역설하기도 했다. 이러한 오긍선의 진정 어린 노력은 동료 선교사 엘리자베스 셰핑의 마음을 얻는 데 충분했다. 셰핑이 창설하거나 회장을 맡고 있는 조선 간호부회와 여전도회 모임을 통해 전국적 규모로 강연을 하거나 기독교절제회를 만들어 청소년과 미성년자의 음주와 흡연, 대마초의 유해성을 알리고 이를 금지·자제할 것을 촉구하기도 했다.

 

또한 공창제 폐지기성회에 참여하여 창녀촌과 매춘업 금지와 폐지를 촉구하였다. 한편 조선총독부 학무국을 상대로도 청소년과 미성년자의 흡연과 음주 금지 법안을 제정할 것을 요구하였다. 1925, 셰핑은 선교사로서는 아주 드물게 광주에서 YMCA의 연설을 마치고 평생 동지 최흥종(崔興琮) 목사, 유진 벨(Eugene Bell) 선교사 등과 어울려 어깨에 완장을 두르고 충장로 일대와 홍등가를 돌며 금주·금연·매춘 금지에 대한 캠페인을 벌이기도 했다.

 

1929년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부교장이 된 오긍선은 1931년 경성양로원을 설립, 윤치호를 원장으로 추대하였다. 하지만 선행에 있어서만큼은 보다 나서 의지하지 않고 오긍선 자신이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교수직과 함께 양로원의 실질적인 업무를 총괄하였다.

 

오긍선은 에비슨이 은퇴하면서 그의 뒤를 이어 1934년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교장에 올랐다. 오긍선의 세브란스 교장직 취임에는 수많은 변수가 따랐다. 1923년에 아버지의 뒤를 잇겠다며 의사가 되어 의료선교사로 조선에 온 아들 더글러스가 에비슨의 후임 자리를 원했으며, 지난 27년 동안 에비슨 곁에서 부교장직을 맡았던 반버스커그 또한 오긍선의 교장직 취임을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아버지의 뒤를 잇겠다며 어려운 선교사의 길을 택한 아들의 요구를 냉정하게 뿌리치기도 어려운 게 아버지의 심정 아니던가? 지난 반세기 그를 도와 세브란스를 있게 만든 부교장의 반대 역시 무시할 수 없는 난제였다.

 

에비슨의 결정은 다른 무엇보다 성실과 인애로써 한길을 사는 오긍선의 인격과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그가 보여준 삶, 그리고 그와의 우정과 오긍선에 대한 진심 어린 존경감이 그로 하여금 흔치 않은 용단을 내리게 한 것이다.

 

吳兢善의 성공은 알렉산더의 성공

 

오긍선이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장이 되자, 남장로교는 회지(會誌)에 그의 임직(任職)을 축하하며 남장로교의 명예로운 사건으로 여겼다. 애양원을 평생 가꾼 윌슨 박사는 남장로교가 오긍선에게 투자한 모든 일이 좋은 결실을 맺었다‘Good Investment’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남장로교회도 오긍선의 성장과 기여에 직간접적으로 많은 영향을 주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군산에서 청년 시기에 만났던 동료의사 알렉산더의 공()이었다. 이 영광스러운 면류관은 하나님의 사람 오긍선을 귀히 여기고 군산에서부터 시작하여 켄터키 루이빌로 데려가 그를 지원하여 학업을 계속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말없는 후원을 했던 알렉산더의 몫이었다.

 

이 자리는 사실 오긍선에게 독배(毒盃)가 되었다. 당시 한국의 지도층 인사들이 대동아전쟁으로 치부된 태평양 전쟁에서 전쟁을 미화하고 학도병을 자원토록 독려하도록 일본 정부와 학무 당국으로부터 강요받았기 때문이다.

 

이로써 친일이라는 낙인이 오긍선의 삶에 유일한 오점으로 찍히고 말았다. 60 평생 올곧게 살아왔던 오긍선의 명예가 무너지는 순간도 찰나에 지나지 않았다. 오긍선은 평소 자신에게도 엄격하였고 가족에게도 대단히 엄격하였다. 그는 아들 오한영(吳漢泳) 전 보건부장관이 개인병원을 설립하려 하자 의사는 이익을 취해서는 안 된다며 반대하였다.

 

한편, 당대의 지식인들과 사대부들이 첩을 두고, 기생첩과 내연녀를 두는 것에 대해서도 상당히 비판적이었다. 자신보다 나이가 5세 연상에다가 마마를 앓다가 얼굴이 곰보가 된 아내 박씨와 평생을 해로하였고, 다른 여성들의 유혹을 모두 물리쳤다. 또한 자식들에게도 평생에 이혼이란 있을 수 없다며 이혼을 허락하지 않았다.

 

엄격하였지만 그는 가끔 농담을 즐기기도 하였다. 하루는 그의 한 외손녀가 서양인들은 왜 털이 많으냐고 묻자, 그는 그래서 전()털맨이라 하지 않느냐고 하였다. 젠틀맨을 한국어로 희화한 농담이었다.

 

그는 자신이 독실한 기독교신자였고 미국에서 근본주의적 보수로 치부되는 남장로교 소속이었지만 술도 마시고, 담배도 피웠다. 초기의 장로교 선교사들은 술과 담배를 엄격하게 금지했지만, 그는 주초(酒草)는 하나의 취향이라며 금연·금주를 거부하였다.

 

1945년 광복 직후, 트루먼 미국 대통령이 그에게 친서를 보내 미군정 민정장관을 권하였지만, 사양하였다. 조선인 민정장관을 내세우려다 실패한 미군정은 1946년까지 한동안 군정 체제를 유지하였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관계에 진출하라는 주변의 권유도 뿌리치고 안양기독보육원장으로서만 진력하였다. 오긍선다운 선택이었다. 1공화국 초반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은 사회부장관을 제의했으나 모두 거절하고 거듭된 출사 요구로 구황실 재산관리총국장을 지냈을 뿐이다. 이후 오긍선은 사회사업에만 전념하였다. 한편 그는 운명할 때 여관에 있다가 이제 비로소 내 집으로 돌아간다는 유언을 남겼다.

 

[출처] : 양국주 서빙더네이션스 대표 : [역사발굴] 일제강점기 조선땅에 온 벽안의 선각자들/ 월간 조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