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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216]안양기독보육원 설립과정 및 초창기 운영 기록

안양똑딱이 2025. 2. 15. 18:55

 

네이버 블로그(2008jsl)

2014. 11. 15. 7:45

출처: https://blog.naver.com/2008jsl/220181778497

 

경성보육원(안양기적보귝원-해관육원-좋은집)의 설립과 운영(1919-1945) <1>

 

이 글은 광주대학교 한규무교수가 향토서울 79(2011.10)에 게재한 내용으로 현재 안양에 있는 좋은집(경성보육원-안양기독보육원-해관육원-좋은집)의 총창기 설립과장과 운영실태는 물론 안양기독보육원이 분원 형태로 운영된 이야기. 농장을 운영하게 된 배경 등 귀중한 역사적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기록은  네이버 블로그(2008jsl)에서 발견했으며 소중한 기록을 연구차원에서 함께 나누고 공유한다. 

 

경성보육원의 설립과 운영(1919-1945) <1>

 

1. 머리말

 

경성보육원은 일제강점기 빈약한 조선 사람의 손으로 경영하여가는 경성안의 유일한 고아원이며 192013일 설립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김병찬이 자택에 고아들을 모아 돌본 것(1919.10)을 계기로 이를 후원하기 위한 경성고아구제회가 조직(1920.2)되어 고아원을 운영하였다. 그리고 다시 경성고아원으로 개원(1921.5) 했다가 재단법인 경성보육원으로 전환(1922.5) 되었으며 이어 안양분원이 설치(1936.9) 되는 복잡한 과정을 거쳤다.

 

따라서 경성보육원 이란 명칭은 1922년부터 쓰였지만 이전의 경성고아구제회, 경성고아원의 역사를 이은 것이므로 이들을 통칭해서 그렇게 부를 수 있다. 또 이 보육원은 서울에서 조선인이 경영하는 대표적 고아원이었으나 유일한 것은 아니었다.

 

경성보육원의 대표는 개화운동가로 잘 알려진 윤치호였다. 그는 경성고아구제회의 회장을 맡은 이래 고아원원장과 보육원이사장으로 활동했다. 또 한국인 의학박사 1호인 오긍선이 운영을 맡았다. 그러므로 보육원의 역사에서는 김병찬, 윤치호, 오긍선 등이 중요한 인물이다.

 

경성보육원에 대한 독립된 연구는 없고 몇몇 논저에 간략히 언급되어 있으나 오류가 적지 않다. 따라서 이에 대한 연구의 여지는 크다고 생각하며 이는 윤치호, 오긍선 등에 대한 연구를 보완하는 역할도 할 것이다. 자료로는 황성신문, 동아일보, 조선일보, 시대일보, 중외일보, 중앙일보, 조선중앙일보, 매일신문 등 신문과 조광, 삼천리 등 잡지, 일제측 자료인 조선사회사업요람, 조선사회사업 등을 활용하려한다. 부디 이 연구가 일제강점기 서울의 사회사업 또는 사회복지 역사의 일면을 보여줄 수 있기를 기대한다.

 

<1> 경성보육원의 변천-생략(블로그운영자)

 

2. 경성고아구제회의 조직과 고아원의 개원

 

경성보육원의 역사는 김병찬이 191910월경 남미창정(南米倉町, 현 중구 남창동) 자택(8)에 약 25명의 고아들을 모아 돌본데서 출발한다. 다음은 이에 대한 기사이다.

 

(김병찬)가 고아를 위하여 성의를 다 하기는 지금부터 약 11년 전 즉 대정8(1919) 부터이다. 천성이 인자하고 자애심이 많은 씨는 전부터 고아를 위하여 생각한바 많았으나 당시 넉넉지 못한 가세(家勢)로 다만 기회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 그해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오자 사정없는 북풍이 외로운 그들의 살을 깎고 견디지 못할 어린 생명을 위협할 때 김병찬씨는 더 참을 수 없었든지 드디어 자기가 거주하든 집(남미창정4번지)을 비워 자기의 힘 미치는 데 까지 가련한 그들을 구제하기로 하였다. 처음에는 그저 보이는 대로 데려다 잠을 재우고 밥도 먹였는데 그럭저럭 한 25명 가량이 되었다. -중외일보 1930.5.26.

 

당시 남대문시장의 <물산객주物産客主>였던 김병찬은 상점 앞에 모여든 오갈데 없는 아이들을 자택에서 돌보기 시작하였다. 그는 남대문교회의 교인이었으며 남대문시장의 미곡상 이계욱, 송택수 등이 그를 후원하였다. 하지만 아직은 임시 수용소 정도의 수준이었고 정식 고아원 단계는 아니었다. 그 후 김병찬은 윤치호, 오긍선 등 지인들과 고아원 설립에 대해 상의했고 그 결과 1920.2.7일 중앙기독교청년회관(YMCA) 에서 40여명의 발기인들이 참석한 가운데 경성고아구제회가 창립되었다. 다음은 이에 대한 기사이다.

 

경성고아원이란 것을 뱃속에 넣어가지고 (일어)서지를 못하여 고생이던 경성고아구제회가 지나간 7일 오후 4시부터 경성 중앙청년회관에서 창립총회를 개최하였는데 당일 발기인으로 온 사람의 숫자는 40명 이상이었는데 일동이 착석하매 임시회장 윤치호씨가 등석한 후 김경식씨가 전회(前回)에 대한 회의록 낭독이 있었고 그 다음으로는 오긍선씨의 전 총회 회비의 보고가 있었고 또는 김윤수씨의 설계에 대한 보고가 있었으며 그 다음에야 모금방법위원의 보고가 있은 후 동회의 발기인 김일선씨의 다정 유리한 연설이 있었는데 만장이 모두 씨의 연설에 향하여 감읍하는 바가 있었다.

 

연설의 시작은 감상담으로 시작하여 이전 독지가 또는 의협가의 따뜻한 자선행위를 여러 사례를 들어 말하매 만장의 발기인들이 모두 박수갈채를 하여 동씨의 연설을 기쁘게 부르짖었다. 이 사고무친(四顧無親)의 가련한 고아를 우리가 서로 힘을 합하여 구제하여야 하겠다 하였다. 이에 다음하여 기부금 승낙에 대한 보고가 있었고 그 다음으로는 규칙 제정위원의 보고와 또는 임원의 선정이 있은 이후 폐회되니 때는 정히 오후 7시경이라. 이에 비로소 동회가 무사히 창립되었는데 동원의 임원은 다음과 같더라..

 

회장 윤치호, 부회장 고윤묵. 오긍선 이사 김경식. 김병찬. 이계욱. 송택수 등 30, 감사 김창억 등4-매일신보 1920.2.11. (명단일부생략-블로그 운영자)

 

경성고아구제회의 발기인은 400여인, 수백여인, 500여명 등으로 나온다. 창립총회에 앞서 발기인대회가 열리는 것이 통례인데 그 시기는 1920.1.3로 짐작된다. 여러 자료에서 경성보육원이 이 때 설립되었다고 나오는데 경성고아구제회가 설립된 것은 1920.2.7일이 분명하다. 따라서 13일은 창립총회에 앞서 발기인대회가 열린 날로 짐작되며 뒷날 경성보육원 간사 이윤영도 대정 9(1920) 13일 경성고아구제회를 유지 제씨(諸氏)와 같이 발기했다.” 고 회고했다.

 

위 임원들 중 기독교인들이 여럿인데 윤치호, 오긍선, 김병찬을 비롯하여 김일선, 김필수, 노익형, 박승빈, 사일환, 육정수, 최재학 등이 그렇다. 이는 기독교인 김병찬, 윤치호, 오긍선 등을 중심으로 구제회가 조직되면서 나타난 현상으로 보인다. 또한 1900년대 경성고아원의 설립과 운영에 기독교인들이 많이 참여했던 것처럼 다른 계층보다는 교인들이 상대적으로 이 문제에 많은 관심을 보였을 것이다. 19204월 남대문의 상동교회 청년회에서 구제회를 위한 자선음악연주회를 열고 기부금을 모금한 점도 이 같은 추정에 무게를 더한다.

 

한편 임원 중 윤치호, 고윤묵, 오긍선, 김일선, 김병찬, 김광준, 노익형, 박승빈, 송택수가 대표 인물로 나오므로 이들에 대해 좀 더 살펴보자. 윤치호가 회장을 맡게 된 배경은 알 수 없다. 그는 19197월 서대문밖 겸창(謙倉)보육원 경성지부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이 보육원의 관계자는 사다케(佐竹權太郞)란 일본 기독교인이었으며 25명의 고아들이 수용되어 있었다. 이날 윤치호는 일기에 <정말 좋은 사업>을 하고 있다고 썼는데 그 후 김병찬의 요청을 받아 경성고아구제회 조직에 참여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부회장 오긍선은 세브란스 의전(醫專) 교수로서 당시의 대표적 의료인이었다.

 

부회장 고윤묵은 백만원재산가, 50만원 이상의 자산가, 고양군 부호, 동막유지, 동막부자 등으로 불릴 만큼 거부였다. 경기도 고양군 군참사(郡參事)를 지낸 그는 상업은행, 한일은행, 조선상업은행 등의 임원이자 조선제사(製絲), 동아일보사, 조선곡물사 등의 대주주였다. 그는 거부여서 가끔 협박에 시달리기도 했지만 빈민구호를 위해 매년 1,000원씩을 희사하고 수해를 입은 이재민들에게 음식을 제공했으며 한재(旱災)를 입은 소작인들의 소작료를 감면해 주기도 하였다. 이처럼 평소 선행을 베풀던 그가 경성고아구제회 부회장이 되어 재정 확충에 기여했을 것으로 보인다. 19204월의 기부자 명단에도 그가 가장 많은 1,000원을 희사한 것으로 나온다.

 

김광준은 남대문의 무역상이면서 정미소도 경영했고 경성곡물상조합 부조합장, 남대문금융조합평의원, 경기정미협회장 등을 지냈다. 그 역시 야학에 석탄을 지원하거나 빈민구제를 위해 쌀을 희사하는 등 선행의 사례가 나타난다.

 

노익형은 대동인쇄소와 박문서관을 운영하며 서적계 패자(覇者)로도 불린 출판업계의 거물이었다. 박승빈은 법관, 변호사를 거쳐 보성전문학교 교장을 지냈으며 조선어연구회를 조직하기도 했다. 송택수는 미곡상이었다. 이들 외에 김일선은 기독교 장로로서 삼흥학교 부교장과 인창학교, 흥동학교 교장 등을 지냈다. 따라서 자산가와 교육가 등이 이사로 참여했다고 생각한다.

 

경성고아구제회는 고아들이 수용되어 있는 김병찬의 자택(남미창정4번지)에 사무소를 두고 고아원의 신축, 이전을 위한 준비에 나섰다. 따라서 구제회의 당면과제는 기금조성과 부지매입이었다. 먼저 기금조성을 위해 기부금을 낸 이들의 명단 및 내역을 정리하면 <2>와 같다.

 

 

이는 일부에 지나지 않겠지만 경성고아구제회에 대한 일반인들의 관심이 컸음을 짐작케 한다. 이들 중에는 재산가도 있고 명망가도 있으며 더욱 그 대부분은 청년실업가가 다수를 점령하였으니 이것만 보아도 사회의 공익심이 얼마나 향상된 것을 증명할 수 있을 것이요. 더구나 그 중에는 화류계 여자로도 수백원의 기부금이 있다 하니 어찌 가상할 바가 아니리요라는 기사에서 보듯이 각계 각층의 참여가 있었다. 특히 기생들이 단성사에서 4일 동안 연합자선연주회를 개최하여 적극 후원한 점도 눈길을 끈다.

 

이에 고무된 발기인들은 기본금을 200,000원으로 책정하여 자신들이 150,000원을 부담하고 나머지 50,000원을 모금하기로 계획했다. “이 계획이 진행되는 중에도 재계에 공황이 일어나서 장애가 없지 아니 하였으니 발기인 제씨의 분투로 유감없이 진행하는 중이라든가 요사이같이 전황한 때에도 오직 고아원에 대한 일반의 동정은 오히려 식지를 아니하여 혹 수백원, 수십원의 기부신청은 거의 하루도 빠지지 않는 성황이며란 기사에서 보듯이 모금은 비교적 순조롭게 이루어 진 것 같다. 기사에 나오는 액수를 보면 39,590(1920.4), 40,000(1920.5), 43,000(1920.6), 50,000(1921.5) 등으로 매원 꾸준히 증가했다.

 

부지매입 과정을 보면 경성고아구제회에서 서대문밖 의령원 위에 일 즉 연희전문학교를 짓고자 당국에 매입하기를 교섭하던 4천여평의 장소를 교섭하는 중이란 기사에 이어 시회 모 산지의 불하신청을 당국에 제출하였다는데 당국에서도 상당한 양해가 있는 모양이란 기사가 나온다. 이로 미루어 볼 때 부지매입을 위해 구제회에서는 총독부 및 연희전문측과 교섭을 벌인 것 같다. 또한 원한경씨는 만여원 짜리 부지를 기부하였으며 어비신 박사는 약품을 제공해 주었다는 기사에서 보듯이 연희전문 교수 언더우드와 세브란스 의전 교수 에비슨도 적극 협조했다.

 

그렇다면 정말 언더우드가 만여원짜리 부지를 기부했을까? 이와 관련해서 옥천동126번지의 토지, 가옥 약 3천여평(내건평, 온돌 약 80)15천원에 매수하여 고아원을 설립했다는 기록이 참고 된다. 이에 따르면 구제회에서는 언더우드의 토지, 가옥을 15,000원에 매입하고 가옥을 수리하여 고아원으로 사용한 것이 된다. 따라서 구제회에서는 당초 매입하려했던 연희전문학교를 짓고자 당국에 매입하기를 교섭하든 4천여평의 장소 대신 언더우드의 토지, 가옥을 구입하는 쪽으로 방향을 바꿨다고 짐작된다.

 

경성고아구제회의 조직 이후 고아원은 <경성고아원> 이라 불리기 시작했다. 고아원이 남미창정에서 옥천동으로 이전한 것은 19202월 경성고아구제회 조직 이후이다.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늦어도 19212월 이전인 것은 확실하며 4월 이전부터 2명의 교사가 원아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따라서 경성고아원은 이미 개원 상태였으나 개원식은 192156일 거행되었다. 다음에 그에 대한 기사이다.

 

가련한 고아를 위하여 경향유지 제씨의 열성으로 서대문 밖 옥천동에 설립된 경성고아원에서는 6일 오후 4시에 고아원 앞 넓은 마당에서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윤치호씨의 사회로 개회하여 경성악대의 연주가 있었으며 검은 옷을 일제히 입은 고아 일동이 원가를 불렀는데 고아라면 헌옷을 입고 거리에서 우는 것만 보다가 그같이 일제히 깨끗한 옷을 입고 규율이 정제하게 맑은 노래를 부르는 것을 본 내빈 중에서는 그것들도 가르치니까 별로 다를 것이 없구려.” 하는 고아원을 처음 보는 사람의 감탄의 말이 새어나왔다. 그 다음에 부회장 오긍선씨의 감상담이 있고 내빈 중에서 세브란스 병원 어비신씨, 삼륙활(森六活), 리상재씨 등의 동원(同院)의 무궁한 장래를 비는 축사가 있은 후 주악 속에 식은 마치었다. -동아일보 1921.5.8.

 

**사진 생략

 

경성고아원 원아들의 일과는 오전 6시 기상하여 6시간 공부하고 오후 9시에 취침했으며 개원식 당시에는 교사 2명이 보통학교 1학년 정도의 과정을 가르쳤고 보모 2명이 옷과 밥을 지어주었다. 고아들 중에는 서울, 인천은 물론 전라도, 경상도, 평안도, 인천 등 출신도 있었다. 옥천동으로 이전 한 후 경성고아원의 현황을 정리하면 <3>과 같으며 대략 24-30명의 원아가 있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경성고아원의 운영기금은 경성고아구제회에서 마련했으므로 후원도 대부분 구제회에서 받았다. 그런데 이 시기에는 고아원으로 직접 기부하는 사례도 나타났다. 이를 정리하면 <4>와 같다.

 

손창원은 개원식 직후 매년 백미 30석을 종신토록 기부하겠다고 약속했으며 김세현은 경성고아원을 지정하여 동아일보사에 10원을 기탁했다. 이처럼 경성고아원은 기본 자산 및 기부금으로 운영되었으며 아직 재단법인이 아닌 까닭인지 정부로부터 보조금을 받지는 못했다. 따라서 재단법인 인가가 시급한 문제로 떠올랐다.

 

경성고아원의 1921년 결산을 보면 수입, 지출이 모두 27,222원이었다. 19215월 현재 모금액만 해도 50,000원에 이르렀던 점에 비추어 보면 이해되지 않지만 이는 경성고아구제회와 경성고아원의 재정이 분리된 데서 기인한 것으로 짐작된다.

 

경성보육원의 설립과 운영(1919-1945) <2>

 

3. 경성보육원으로의 전환과 안양분원 설치

 

개원식이 있은 지 약 1년 후인 1922520일 경성고아원은 재단법인 인가를 받으며 경성보육원으로 개칭했다. 이로서 경성고아원을 이은 경성보육원은 새로운 발전의 전기를 맞게 되었다. 다음은 이에 대한 기사이다.

 

윤치호, 김일선씨 등의 발기로 청원 중이던 재단법인 경성보육원의 설치는 520일 부로 인가되었다더라. -동아일보 1922.5.28.

 

이로 미루어 볼 때 1922년 이사진에는 윤치호, 김일선이 포함되었을 것이다. 1920-1930년대 경성보육원의 이사진을 정리한 <5>를 참조하면 오긍선, 김병찬도 처음부터 이사로 참여했으리라 짐작된다.

 

< 표 5>  경성보육원 이사 ,  감사 (1930-1944)

 

윤치호, 오긍선, 김병찬, 김일선 등은 이미 경성고아구제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하였으며 새로 나오는 인물은 정봉현, 조병학, 김성권, 김명선 등이다. 정봉현은 포목상으로 상당한 재산을 모았으며 평소 자선사업에도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그는 보명학당을 인수하여 무산(無産) 아동의 교육기관인 화산 보통학교로 발전시켰다.

 

조병학은 경성 지주로 한성정미소를 운영했으며 이재민 구제의 사례도 보인다. 김성권은 동일은행, 조선은행 임원을 지낸 재계 거두(巨頭)로 역시 이재민구제의 사례가 보인다. 김명선은 미국, 일본에서 유학한 세브란스의전 교수로 적은 선()한 것이라도 하여보라고 결심만은 하였소.” 라는 신조를 갖고 있었다.

 

이처럼 새로 이사진에 참여한 이들은 평소 자선사업에 관심을 갖고 있던 재력가들(정봉현, 조병학, 김성권)이었으며 김명선은 같은 세브란스의전 교수인 오긍선의 추천을 받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사진-경성보육원(옥천정 : 조선사회사업요람 1924) -첨부생략

 

193312월 경성보육원의 이사장은 윤치호였는데 193511월에는 오긍선이 이사장으로 나온다. 아마도 이 사이에 오긍선이 새로운 이사장으로 선출된 것 같다. 오긍선의 이사장 취임으로 경성보육원은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는데 그것은 옥천정의 보육원을 청운정(靑雲町)으로 이전한 것과 안양에 분원(농장)을 설치한 것이다.

 

안양 분원이 정확히 언제 개원했는지는 확인되지 않으나 19369현 위치인 안양으로 이전했다고 한다. 그리고 경성 본원도 옥천정에서 청운정으로 이전했다. 그 정확한 시기는 확인이 어려운데 19376월에는 경성보육원의 소재가 옥천정이라 나오며 19404월에는 이미 청운정으로 이전한 상태였으므로 1938-1940년 사이가 아닐까 짐작된다.

 

사진 -경성보육원(청운정, 동아일보 1940.5.4), 안양분원 아이들- 첨부생략

 

경성보육원의 원아들은 원칙적으로 15세가 넘으면 퇴원했다. 그러나 퇴원한 이들이 사회의 혼탁한 조류에 휩쓸려 대부분 그만 부량소년이 되어버린다고 생각한 이사회에서는 안양에 대규모 농장을 설치하여 15세가 넘은 원아들을 수용하기로 계획했다. 이를 위해 수원의 50,000평과 신촌의 6,000평 토지를 매각하고 안양역 앞의 토지 63,000평을 31,000원에 매입했으며 19363월 개원을 목표로 준비에 착수했다.

 

이로써 경성보육원은 경성본원과 안양분원으로 분리되는 과정을 밟게 되었다.

 

이사장 오긍선은 경성고아원 시절부터 이 같은 구상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안양에 강당, 숙소, 진찰실, 병실, 목욕탕 등을 갖춘 일종의 이상촌인 안양분원을 설치하여 경성보육원을 나서는 16세 이상의 원아들을 수용하고 그들에게 농사, 양돈, 양토, 원예 등 기술과 함께 보통학교 졸업생 정도의 교육을 시키겠다는 것이었다. 또 그는 농업학교에서 공부하고 있는 보육원 출신 학생이 졸업하면 그를 농원(農園)지도자로 고용할 것이라고 밝혔다.

 

각종 자료에 보이는 경성보육원의 현황을 정리하면 <6>과 같다.

하지만 이는 보육원에 수용된 원아 뿐 아니라 타처에 위탁한 유아(乳兒), 아동 까지 포함된 수치이다. 19301(타처에 유아보호) 이던 사례가 193677(유아탁아), 1940133(농촌위탁) 으로 증가했으며 원내 거주자는 193653,3%(88/165, 194042.4%(98/231)에 불과했다. 또한 경성본원 대 안양분원의 원생은 193677(87.5%) : 11(12.5%)에서 194046(46.9%) : 52(53.1%)로 비중이 역전되었다. 이는 19369월 안양분원이 설치되면서 사업의 중심이 서울에서 안양으로 옮겨갔음을 짐작케 한다.

 

원아들의 연령은 시기에 따라 7-16(1923,1924), 6세 이상 12세 미만(1933), 원내 2-17세 원외 1-6(1936) 등으로 나온다. 이는 당시 원아들의 연령이 그랬다는 것이며 원칙은 앞서 언급했듯이 15세 이하였다. 그런데 1940년 안양분원의 유치부 29명은 당초 16세 이상의 고아들을 수용한다는 방침과 맞지 않으며 이들 외에도 15세 미만의 아동들이 여럿이었던 것 같다. 15세 이하 경성본원, 16세 이상 안양분원이란 연령에 따른 구분이 모호해진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며 안양분원의 규모가 경성본원을 능가하게 되었다. 19404월 안양분원의 원생들은 52명이었던 데 비해 청운동 경성본원 원생들은 46명이었다. 이는 옥천동 보육원을 매각하여 청운동으로 이전하고 안양분원을 설치하기 시작한 때부터 예견된 일이었다. 해방 이후의 사례지만 19478월 백범 김구가 경성본원 대신 안양분원을 방문하고 19495월 경성보육원 창립 30주년 기념식이 안양분원에서 거행된 점도 그 같은 상황을 짐작케 한다.

 

개원 이래 실적을 보면 193612월 까지 총 748명이 입원했으며 이 중 친척에게 인계된 경우가 99(13.2%), 취직 133(17.8%), 입양 64(8.6%), 도망 88(11.8%), 사망 199(26.6%), 기타 165(25.6%)이었다. 19396월 까지의 실적은 총 1,009명이 입원하여 258(25.6%)이 친척에게 인계되었고 취직 151(15.0%), 입양103(10.2%), 도망 103(10.2%), 사망 295(29.2%), 기타 99(9.8%) 등이었다. 사망자는 대부분 버려진 유아(乳兒)들이었다.

 

직원은 19299명으로 최다이며 이후 8(1933), 6(1936), 3(1936) 으로 오히려 감소한다. 1936년의 경우는 경성본원만의 현황이므로 안양분원 까지 더하면 이보다 많았을 것이다. 1936년까지 원내에서 담당했던 유아(乳兒) 양육을 같은해 부터 원외에서 <유아탁아> 하는 방식으로 전환한 점도 감안해야 한다. 즉 처음에는 원내에 유아부를 두고 간호사와 보모가 우유를 먹이며 유아들을 돌보았으나 비용이 많이 들어 원외의 유모들에게 8원 정도의 월급을 주고 이들의 양육을 위탁했다. 특히 1940231명 중 133명이 농촌위탁이었고 경성본원의 원아는 46명에 불과했으므로 경성본원에는 많은 직원이 필요치 않았을 것이다.

 

경성보육원은 창립 때부터 기독교인들이 많이 관여했기 때문인지 당국에서는 이를 기독교장로파(1929), 야소교(1933), 기독교(1936)로 파악했다. 하지만 재단법인 설립 이후 교단이나 교회 차원의 후원은 보이지 않으며 기독교 색채도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원아들에게 종교교육을 시켰다는 기록도 찾을 수 없다.

 

원아들은 원내에서 보통학교 저학년 정도의 교육을 받았고 원외의 보통학교, 농업학교로 통학하기도 했다. 예컨대 1930년의 경우 원내 유치과에서 31명이 교육을 받았고 원외 화산보통학교(26), 미동보통학교(2), 경성농업학교(1) 등으로 29명이 통학했다.

 

늦어도 1923년 이후 12세 이상의 원아들은 상점 등에 취직하거나 원내에 설치된 직조부, 수산부에서 작업했다. 그러다 1936년 안양분원 설치 이후에는 농장실습, 농업실습에 참여하며 교육과 노동을 병행했다. 이들이 생산한 직조물이나 농산물을 판매하여 운영비에 충당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운영비는 1926년의 경우 회원의 부담금 및 기본재산의 수입을 기초로 관청의 보조금, 일반유지의 기부금으로 충당했는데 기본재산으로는 토지에서 연간 3,000원의 수입이 있었다. 그 후 1년간 운영비는 29,172(1933)20,000(1935)30,000(1936) 등으로 나오며 회원부담금, 기본재산, 관청보조금, 일반유지자기부금(1923, 1924) 총독부지방비, 경성부보조금, 찬조금, 양육료, 일반기부금(1929) 관청보조와 다소의 재산수입(1936)으로 충당했다. 여기서 재산수입은 수원군 음덕면남양리의 53,000평 전답에서의 수입을 뜻한다. 이 전답은 소작농들이 경작했는데 1925년에는 소작권 이전문제로 잡음이 일기도 하였다.

 

경성고아원에서 경성보육원으로 전환되면서 나타난 가장 큰 변화는 정부의 보조금 지급이었다. 재단법인이 되면서 정부로부터 매년 지속적인 후원을 받게 된 것이다. 이를 비롯한 기부자에 대해 정리하면 <7>과 같다.

 

이를 보면 시간이 지나며 점차 민간 기부보다 정부보조, 일황(日皇) 하사의 사례가 더 자주 나타난다. 물론 신문에 실리지 않은 사례도 많겠지만 1930년대에 들어와 민간의 기부금이 1920년대에 비해 감소했던 것 같다. 수원의 전답에서 나오는 3,000원 정도를 빼더라도 연간 20,000-30,000원의 운영비를 충당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며 이 때문에 1936년 안양 분원을 설치하여 점차 그 기능을 이전한 것이 아닐 까 짐작된다.

 

경성보육원의 원아들은 고아, 기아(棄兒), 미아(迷兒) 등이었으며 이들 중 상당수는 경성부 사회과를 통해 수용된 아동들이었다.

 

1939년 현재 원아의 절반 이상이 이 같은 과정을 통해 보육원에 들어왔다. 이미 1924년부터 보육원에서는 원아모집에 대해 경성부와 협의하여 후원을 받았다. 따라서 경성부에서는 매년 별도의 운영비를 보육원에 지원했을 것이다. 1932년 경성의 기아(棄兒)144명이었으며 이들은 대부분 생활난 대문에 버려진 생후 2-3주의 유아(乳兒)들이었다. 이처럼 사회과를 통해 수용되는 유아들도 있었지만 경성보육원에 직접 버려진 유아도 있었다.

 

19332월의 경우 기아는 1월보다 3배 증가했으며 이들은 경성보육원과 겸창보육원에 분산, 수용되었다. 이들은 상당수가 불륜관계에서 태어난 관계로 매독성, 임독성 때문에 사망률이 40%에 이르렀다고 한다. 경성에서 고아, 기아, 미아가 매년 증가하면서 이미 1933년 경성보육원, 겸창보육원, 천주교고아원도 수용의 한계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1935년에는 경성의 기아 103명과 고아 220명이 경성보육원, 겸창보육원, 미아 280명은 천주교고아원, 구세군육아원에 분산, 수용되었다. 같은 해에는 부정사건으로 물의를 빚은 애광사 자양원의 고아 15명이 경성부 사회과를 통해 경성보육원, 겸창보육원에 분산 수용되기도 했다. 1936년 당시 경성에는 5개의 고아원과 1개의 탁아소가 있었으나 계속 증가하는 고아, 기아, 미아들을 수용할 수 있는 시설의 확충이 시급했다.

 

이처럼 경성보육원이 서울의 사회복지사업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컸으며 193312월 우가키총독이 경성보육원을 방문하여 관계자들을 격려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이듬해 총독관저에서 열린 신년 연회에 윤치호가 참석했을 때 총독은 이 정도까지 해내다니 정말 수고가 많으셨소.” 라고 치하하여 윤치호를 놀라게 했다. 1922년 이후 경성의 조선사회사업연구회에서도 매년 아동위안회를 개최했으니 1923년에는 경성보육원의 원생 39명을 비롯한 고아들을 모아 창경원을 구경하고 장충단공원에서 점심을 먹은 후 운동회, 다과회를 베풀었다. 경성보육원 원아들은 1924년 수원기차여행과 1933년 인천원족회(소풍)에도 참여했다.

 

한편 해방 이후에는 오긍선이 점차 경성보육원의 설립자로 부각되었다. 경성보육원의 설립자를 누구로 볼 것인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을 수 있다. 자택에 고아들을 모아 돌보기 시작한 김병찬을 경성보육원의 창설자로 보기도 하며 경성고아구제회 회장과 경성보육원 이사장을 지낸 윤치호가 그렇게 불릴 수도 있다. 하지만 오긍선을 설립자로 보기는 어렵다.

 

윤치호가 자신은 명목상의 이사장이며 실제로는 오긍선이 크게 기여했다고 밝혔듯이 경성보육원의 성장에 그의 공헌은 절대적이었고 해방 이후에도 경성보육원의 명맥을 이으며 유수의 사회복지기관으로 발전시킨 그의 공적 또한 높이 평가받아 마땅하다.

 

그는 1952년 한국사회사업연합회 초대 회장을 역임했고 1949년과 1952년 정부로부터 사회사업공로표창을 받았으며 1962년 소파상을 수상하는 등 한국사회사업계의 거목이었고 노년에도 안양기독보육원 원장으로 헌신했다.

 

그렇지만 이는 경성보육원의 설립자가 누구인가와는 별개의 문제이다. 그가 1919년 경성보육원을 설립했다거나 최초의 고아원 설립자라는 등의 내용은 재고되어야 할 것이다.

 

 

 

4. 맺음말

 

이상에서 일제강점기 경성보육원의 역사에 대해 살펴보았다. 경성보육원은 김병찬이 자택에 고아들을 모아 돌보기 시작(1919.10)한 이후 경성고아구제회 발기(1920.1)경성고아구제회조직(1920.2)경성고아원 개원식(1921.5)재단법인 경성보육원 인가(1922.5)안양분원 설치(1936.9) 등의 복잡한 과정을 거치며 서울의 대표적 사회사업기관으로 성장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윤치호, 오긍선, 김병찬 등 발기인, 이사진은 물론 각계각층이 망라된 후원자들의 관심과 성원이 이어졌다. 경성보육원은 그 역사가 현재까지 계승되고 있는 흔치 않는 사회복지기관이란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그런데 경성보육원의 건립과 발전은 1920년대 이후 총독부의 사회사업정책과 무관치 않다. 총독부에서는 강제 병탄 이후 19116월 조선 고아들의 양육, 맹아자(盲啞者)의 교육, 풍나자(瘋癩者, 문둥병)의 구호 등을 목적으로 제생원을 설치했다.

 

그러나 1910년대의 사회사업은 부진했고 19193.1운동 이후 문화정치를 표방하면서 총독부에서는 1921년 조선사회사업연구회를 조직했으며 총독부 내무국 사회과에서 조선사회사업요람을 발간했다. 즉 총독부의 사회사업정책은 문화정치의 선전을 위한 정책적 목적에서 추진된 성격이 짙다.

 

경성부에서도 1920년 사회사업의 시설에 착수했으며 1921사회사업연구를 신설하여 시설을 요할 사회사업에 대해 연구노력하는 한편 사회사업에 관한 제1회 협의회를 개최했다. 이 때문에 1921년 경성부의 학무주임은 근래 사회사업이 많이 일어나서 상당한 성적을 얻는 모양이라 평가할 정도로 사회사업에 대한 당국의 관심이 고조되었다. 경성보육원은 이 같은 시점에 설립되었기에 총독부 및 경성부의 적지 않은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19327월 현재 경성부 사회과의 조사를 보면 서울의 사회사업시설은 총 59개였는데 그 중 육아시설은 관립 1, 사립 4개 등 총 5개였다. 그 후 1개가 더 신설되어 19363월 현재 관립으로는 조선총독부제생원 양육부, 사립으로는 경성보육원, 겸창보육원 경성지부, 천주교회 고아원, 평전육애회, 구세군 육아홈 등 6개의 육아시설이 있었다. 경성보육원은 전체 원아수(원내, 원외)에서 207(원내117, 원외90)으로 총독부 제생원 육아부의 282(원내77, 원외205)에 이어 2위였으며 원내 원아수에서는 117명으로 145명의 천주교회고아원에 이어 2위였다.

 

원아 정원만을 놓고 보면 경성보육원은 300(원내 200, 원외100) 으로 총독부제생원 육아부의 330(원내120, 원외220) 에 이어 2위였으나 원내 정원은 1위였다. 따라서 원아수만 놓고 본다면 서울의 사립 육아시설로는 가장 규모가 컸다고 할 수 있다. 보육원은 경성부 사회과를 통해 들어온 미아, 기아가 많았다는 점에서도 특색이 있다.

 

그동안 근현대사학계는 고아원, 양로원과 같은 사회사업기관에 대해서는 큰 관심을 두지 않았으며 사회복지계에서도 그 역사를 정리하는데 노력을 기울인 것 같지는 않다. 아직은 신문, 잡지기사를 나열한데 지나지 않고 분석이나 평가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관련 논저가 거의 없는 실정에서 이 논문은 경성고아원은 물론 당시 서울의 사회사업 상황, 일제의 사회복지정책 등을 연구하는데 작게나마 도움이 될 것이다. 더불어 고아, 기아(棄兒), 미아(迷兒)가 매년 증가하는 모습을 통해 당시 서울의 사회상을 이해하는데 보탬이 되리라 생각한다.

 

앞으로 경성보육원에 대해 밝혀내야 할 부분도 적지 않다. 예컨대 경성본원과 안양분원의 관계와 향방, 보육원 출신 원생들의 사회적 활동, 겸창보육원, 천주교고아원 및 총독부 제생원과의 비교 등이 그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른 사회사업기관들에 대한 연구가 병행되어야 한다. 일제강점기 민족의 최대과제는 독립이었으므로 민족운동사 연구가 매우 중요한 것은 물론이다. 그렇지만 이와 아울러 그 시대를 살았던 소외계층과 그들을 위해 헌신한 인물들의 모습을 밝혀내기 위한 연구도 근 현대 사학계, 사회복지계 모두에게 의미 있는 작업이 될 것이다.

 

 

 

**본 논문 중간 중간에 당시의 신문이나 자료 등을 인용하면서 당시에 사용하던 용어나 글자체를 그대로 사용하였으나 블로그 방문자의 편의를 위하여 현대 용어로 변경하여 게재하였음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