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충독부가 1942년에 조사한 시흥군 삼성산의 사적]
경기도 시흥군 삼성산 서남록(西南麓) 비‧귀부‧고분(제5호지), 암벽 조각(제6호지), 안양리 오층탑(제7호지)
조선총독부가 1942년에 제작한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 고적유물에 석비귀부(현 안양사 귀부)와 고분(현 석수동), 석실귀부(石碑龜趺), 석등(石燈), 마애종 등이 수록돼 있다.
24. <석비귀부(石碑龜趺)>
동면 안양리(東面 安養里 ) - 석비귀부는 길이 10척, 폭 7척, 높이 3척5촌으로 석비는 분 넘어져 있으며, 석등 하나와 폐정(廢井) 하나가 있는데 마을사람이 있었다고 하지만 절의 이름 등은 알지 못한다.
35. <고분(古墳)>
동면 안양리 국유림(國有林) - 석수동(石水洞 趺)의 후방에 석곽(石槨)이 노출된 것 2, 3개가 있다.
[삼성산에서 현재의 안양사로 옮겨진 부도와 귀부]
조선총독부가 삼성산에서 조사한 부도와 귀부는 현재 안양사 경내에 있다. 하지만 처음부터 안양사에 있던 것은 아니다.
적지않은 기록과 안양사 방문(탐방) 글중에서 혼란을 야기하는 부분이 안양사와 안양사지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안양사지 (安養寺址)는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된 중초사 사찰지로 현재 안양예술공원 주차장 아랫쪽의 공립 안양박물관과 김중업건축박물관이 있는 곳이다. 안양사지는 안양사 명문기와가 출토되는 등 발굴조사 이후 경기도가 2023년 4월 26일 면적 1만6천111㎡를 도 지정 문화재(기념물) 231호로 지정·고시했다.
안양사지(安養寺址)는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된 중초사터위에 고려시대 안양사가 있던 사찰지로, 827년 중초사 건립 사실을 기록하고 있는 당간지주의 명문, 고려 대각국사 의천의 방문 기록, 고려말 7층 전탑 중수 기록 등 중초사와 안양사 사찰의 역사를 알 수 있는 자료들이 전해지고 있으며 인근 암벽에는 마애종이 새겨져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與地勝覽)에는 고려 우왕 7년(1381년) 왕실에서 향을 하사했으며, 고려의 마지막 보루인 최영(崔瑩) 장군이 고려 초에 만들어진 기와가 얹혀진 7층전탑(塼塔)을 중수하고 승려 1,000명이 불사(佛事)를 올렸다는 기록이 있어 안양사의 규모가 상당했음을 가늠케 한다.
조선으로 들어와서도 조선 정부와 여러 문인들과의 인연이 상당하여 태종 11년(1411년), 태종(太宗)이 충청도 온양(溫陽)으로 온천욕을 가던 중, 이곳에 잠시 들리기도 했으며, 안양사와 관련된 여러 수의 시가 전해오고 있다.
안양사지에서 안양예술공원 주차장으로 나오면 공중화장실 북쪽 방향 윗쪽으로 마애종이 보이는데 이곳 또한 과거 사찰 경내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나라에서 단 하나밖에 없는 바위에 새겨진 오래된 종
석수동 마애종(石水洞 磨崖鐘) ~ 경기도 지방문화재 제 92호
안양예술공원 주차장에서 북쪽(삼성천 건너)을 바라보면 석수동 마애종이 있다. 마애종이 새겨진 바위는 사람들이 치성을 드린 흔적들(촛농 뿌려진 바위 부분)이 많은데, 신앙의 대상으로 삼을 만큼 범상치 않다. 마애종이란 마애불(磨崖佛)처럼 바위에 새겨진 종을 말한다. 종치는 장면을 바위에 묘사한 것으로 우리나라에서 달랑 하나 밖에 없는 귀한 문화유산이다.
9개의 유두가 달린 2개의 유곽을 드러내 보인 종(아마도 범종일 있으며 범종의 기본 메뉴인 음통, 상대, 유곽, 당좌, 하대(구연 에는 종을 치는 승려의 모습이 자리해 있다. 전체적으로 종이 안정감이 들어 보이며 조각 수법이나 종뉴, 종 인 시기는 알 수 없으나 대략 고려 초기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중초사(中初寺)와 안양사 터가 인접해 있어 사찰과 관련된 유물일 수도 있는데,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적성한 '조 적급유물등록대장'에는 <중초사지 마애종>으로 기록돼 있다.
1,000년 가까운 세월에도 마애종의 상태는 양호하다. 무슨 이유로 바위에 어린 동자승이 종 치는 모습을 새겼는지 모르겠지만, 오랜가간 수차례 학술조사 및 발표 자리가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지방문화재로 머물러 있다는 것이 아쉽다. 이젠 국가지정문화재로 등재되아야하지 않나 싶다.
이어 현존하는 안양사를 가보자.
안양예술공원 주차장에서 삼성천 북쪽 공원길을 400m가량 들어서면 삼성천 위에 자리한 공원 주차장이 나오고 안양사를 알리는 이정표가 중생을 맞는다. 인파가 붐비는 공원길과 달리 안양사 길은 공원의 뒤쪽 부분으로 한적하기만 하다.
이정표의 안내로 나무가 무성한 길을 10분 정도 걸으면 안양사를 알리는 표석이 마중한다. 기품이 넘치는 안양사 표석을 지나면 기와집 1채와 연못이 나타난다. 이곳을 지나 계단을 오르면 비로소 안양사 경내(남쪽 구역)에 다다른다.
안양사는 명부전이 있는 남쪽과 대웅전이 있는 북쪽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그렇다고 가람이 큰 것도 아니다. 그럼 여기서 안양사의 내력을 잠시 짚어보도록 하자.
현 안양사는 대한불교 태고종 소속사이며, 비구니스님의 사찰이다.
안양사는 염불암(현재 염불사) 주지스님이셨던 박기석 스님이 소유하고 있었다. 이분은 당시 염불암과 함께 두 개의 절을 사유(私有)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를 1955년도에 성인(成人, 비구니)스님께서 인수 받았다. 인수 받을 당시에는 현 요사 채와 종무소 자리에 작은 규모의 건물 한 채가 있었으며, 현 명부전(冥府殿) 자리에 작은 규모의 대웅전이 있었다.
성인스님은 각고 끝에 대웅전을 중수하고 천불전을 신축하였으며 1983년에는 심검당을 지었다. 성인스님이 1983년 입적하자 영심스님(현 안양사 주지)이 뒤를 이어 운영하고 있다.
영심스님은 현재의 대웅전을 지으시고 석가모니부처님과 문수·보현보살을 협시로 모셨으며 종전 대웅전 자리에는 명부전을 모시고, 천불전을 16나한전으로 개축하면서 산신각, 범종루, 대형 미륵부처님상을 2004년까지 완성하였다.
안양사 입구에 단아하게 앉아있는 안심당은 경기도청 직원들이 이곳에 기거하면서 5급 사무관 시험준비를 하던 곳인데 안양사에서 매입하여 안심당을 세웠다.
안양사 대웅전 앞에는 부도탑과 탑비의 귀부(龜趺)가 남아있다.
사찰내에 있는 부도는 머리 부분이 팔각으로 되어있는 팔각원당형(八角圓堂形) 부도로 고려때 만들어졌다. 정작 증요한 부도의 알맹이인 탑신은 어디로 갔는지 사라졌으며, 머리부분과 탑신 아랫부분만 덩그러니 남아 있는데 높이는 1.4m 정도다.
부도를 바라보며 귀부(경기도지방문화재 제93호)가 넓직하게 앉아있다. 비석의 일부로 용머리가 받쳐들던 비신(碑身)과 2마리의 교룡이 여의주를 두고 대치중인 비석의 머릿부분인 이수(螭首) 는 없어지고 귀부만 남아있는데 몇 개의 장대석으로 지대를 이루고 굄대와 귀부가 하나의 돌로 만들어 졌다. 전체적인 모양으로 보아 이 귀부는 고려시대 작품이며 높이 1m, 길이 3m, 너비 2.18m이다. 승탑주인공의 행적 등을 담을 비라고 볼 수 있다.
귀부의 등에는 등껍데기가 세세히 묘사되어 있으며 비문이 심어져 있던 비좌(碑座)는 치아가 빠진 모양이지만 당장 앞으로 엄금 기어갈 것 같은 용머리(귀부)에는 머리와 수염, 4개의 발, 등껍데기, 살랑살랑 흔드는 꼬랑지 등이 섬세히 표현되어 조각 솜씨가 예사롭지가 않다. 귀부 주위로는 그를 보호하기 위해 석주(石柱) 18개를 심었다.
귀부는 고려 중기 때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아마도 승려의 탑비(塔碑)나 사적비(事蹟碑, 혹 콩일신라 중초사 또는 고려 안양사 사적비는 아닐까?)로 여겨지지만 글씨가 적힌 비신도 없고 비석의 정체를 밝혀줄 단서도 없어 그저 답답하다. 삼국사기(三國史記)를 저술한 김부식(金富軾)이 비문을 썼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확인할 길은 없다
부도와 귀부는 안양사를 새로 지으면서 삼성산 자락에 있던 사찰 경내로 옴긴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은 안양사의 오랜 내력을 상징하는 소중한 보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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