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절기란 뭔가요?
절기는 태양년을 태양의 황경에 따라 24등분한 기후의 표준점이다. 시령·절후라고도 한다. 황경이란 태양이 춘분에 지나는 점을 기점으로 하여 황도에 따라 움직인 각도를 말하며, 황경이 0°일 때를 춘분으로 하여 매 15°마다 새로운 절기로 구분한다. 계절을 세분하여 대략 15일 간격으로 나타낸 달력이라 할 수 있다.
이 황경이 0°일 때를 춘분, 15°일 때를 청명(淸明) 등으로 구분하는데, 〈표〉와 같이 15° 간격으로 24개 절기의 날짜가 구분된다.
24절기는 다시 홀수 번째 절기를 절로, 짝수 번째 절기를 중으로 구분한다. 중이 되는 절기는 음력 열두 달의 이름을 정하는 절기인데 음력의 달에서 24절기의 중기가 빠진 달이 생기면 이 달을 윤달로 쳐서 양력과 음력의 차이를 보완한다.
세시 풍속이 뭔가요?
세시 풍속이란 1년 중 특별하다고 생각되는 날에 사람들이 지켜왔던 생활 습관이에요. 그런데 이 특별한 날은 1년에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매년 반복된다는 특징이 있어요. 예를 들면 해마다 음력 1월 1일은 설날, 음력 5월 5일은 단오인 것처럼 말이죠.
우리 역사 속에서 가장 오래된 세시 풍속은 부여, 고구려, 동예, 삼한의 제천행사라고 할 수 있다. 이 국가들은 철기 문화를 바탕으로 만주와 한반도에 세워졌다ㅓ.
각 나라의 고유한 풍습은 조금씩 달랐지만 대부분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제천행사를 열었다. 제천행사는 대체로 10월에 열렸는데, 곡식 수확에 감사하며 다음 해에도 풍년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삼국 시대가 되면 이전의 제천 행사가 그대로 이어지면서도 나라를 세운 시조나 산천에 대한 제사를 해마다 지냈다. 특히 신라에서는 정월 대보름, 단오, 추석 등의 세시 풍속이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고려 시대 사람들은 해마다 1월에 고려를 세운 태조 왕건의 제사를 지냈어요. 또 불교의 영향으로 2월에 연등회를, 10월 또는 11월에 팔관회를 열었다.
조선 시대 사람들도 다양한 세시 풍속을 지키며 살았다. 조선 시대 세시 풍속은 설과 추석같이 오늘날 우리가 지내는 명절도 있고, 입춘과 입추, 동지처럼 농사와 관련된 24절기도 있다.
흔히 옛날에는 달의 움직임을 바탕으로 하는 음력을 사용했기 때문에 24절기도 당연히 달의 움직임에 따라 정해졌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종종 있다. 하지만 24절기는 달이 아니라 태양의 위치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리고 봄에서 겨울까지 계절마다 각각 6개씩 있어요. 24절기는 다음과 같다.
24절기 중 봄의 첫 절기는 ‘입춘’이다. 봄이 시작되는 이때부터 농부들은 농사지을 준비를 했다. 3번째 절기인 ‘경칩’은 겨울잠을 자던 동물이 깨어나는 시기로 콩, 들깨 등을 심고 밭에 거름을 주었다.
여름이 시작되는 ‘입하’에는 논에 모내기를 시작해서 9번째 절기인 ‘망종’이 될 무렵에는 논에 모를 옮겨 심었다. 가을의 ‘처서’에는 아침 저녁으로 선선해지면서 참깨를 수확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겨울의 ‘소한’은 아주 춥다. 집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야 했다.
조선 시대 양반들도 24절기와 관련 있는 세시 풍속을 지켰다. 예를 들면 ‘입춘’이 되면 ‘입춘대길’과 같이 복을 비는 글을 종이에 적어 대문이나 집의 벽에 붙이기도 했다. 양반들에게는 24절기를 지키는 것보다 더 중요한 세시 풍속이 있다.
그것은 바로 조상에게 제사 지내는 것이다. 보통 제사는 조상이 돌아가신 날에만 지내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조선 시대 양반들은 속절(俗節)이라 하여 설, 한식, 단오, 추석의 4대 명절과 정월 대보름, 동지 등의 날에도 제사를 지냈다.
이렇듯 조선 시대 사람들이 지키던 세시 풍속은 신분에 따라 조금씩 달랐다. 또 농촌과 어촌처럼 지역에 따라 다르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설, 한식, 단오, 추석 등의 4대 명절은 누구나 비슷하게 지키는 세시 풍속이었다.
조선 시대 사람들이 4대 명절을 어떻게 지냈는지 살펴볼까요?
떡국을 먹고 세배하던 설날
설은 한 해의 첫날로 음력 1월 1일이에요. 설날 아침에는 새 옷(설빔)을 단정히 입고 먼저 조상에게 차례를 지낸다. 차례는 설과 같은 명절에 드리는 제사를 말한다. 차례가 끝나면 집안 어른께 세배를 드린다. 그리고 설의 대표적 음식인 떡국을 먹는다. 음식을 먹은 후에는 성묘를 간다. 성묘는 조상의 묘를 찾아가 살펴보는 일이다.
설날에는 다양한 민속놀이도 즐겼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윷놀이다. 윷놀이는 어린아이부터 어른까지 모두 즐길 수 있었던 놀이다. 윷놀이에는 말판과 말, 윷이 필요하다. 윷은 보통 박달나무나 밤나무를 잘라 만들기도 하고 어떤 지방은 자주색 콩을 잘라 만든 윷을 사용하기도 했다.
설날에는 연날리기도 했다. 조용히 연을 날리면서 놀거나 다른 사람의 연줄을 끊는 연싸움을 했다. 또 연에 ‘액’이라는 글자를 쓰고 연줄을 끊은 후 날려 보내기도 했다. 그렇게 하면 나에게 오는 나쁜 기운을 연이 모두 가지고 떠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불을 때지 않고 찬 음식을 먹던 한식
한식은 24절기 중 해가 가장 짧은 동지가 지난 후 105일째 되는 날이다. 음력 3월이나 2월에 오는 명절이다. 조선 시대 사람들은 한식이 되면 불을 사용하지 않고 전날에 만들어 놓은 찬 음식을 먹었다.
한식에 불을 때지 않고 찬 음식을 먹는 풍습은 중국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중국 춘추 시대 개자추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진나라 문공이 왕이 되기 전 어려운 일을 겪을 때 문공의 곁을 지켰다. 그런데 문공이 왕이 된 후 개자추를 멀리하자 그는 산에 들어가 살았다.
왕이 뒤늦게 개자추의 소중함을 알고 산에서 나오라고 했지만 개자추는 뜻을 따르지 않았다. 왕은 개자추를 나오게 하려고 산에 불을 질렀다. 개자추가 불을 피해 산에서 나올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왕의 예상과 달리 개자추는 끝까지 버티다 결국 죽음을 맞이했다. 그 후 왕은 개자추의 죽음을 슬퍼하며 해마다 그가 죽은 날이 되면 불을 때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언제부터 한식을 명절로 지냈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1431년(세종 13)에 한식과 그 후 3일 동안 불을 사용하지 못하게 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 시대 사람들은 한식을 중요한 명절로 여겼던 것 같다. 한식 때는 양반들이 꼭 해야 하는 중요한 일이 있다. 바로 조상의 산소에 성묘 가는 것이다. 떡이나 술, 국수 등의 음식을 만들어 가서 조상님께 차례를 지냈다.
씨름하고 그네 뛰던 단오
“애호와 부채를 골고루 나누어 주도록 하시오.”
해마다 단오가 되면 조선의 왕은 신하들에게 애호와 부채를 나누어 주었다. 애호는 짚으로 호랑이 모양을 만들고 쑥과 비단을 연결해 만든 것이디. 조선 시대 여자들은 단오가 되면 애호를 머리에 이어 나쁜 기운을 물리쳤다고 한다.
또 부채를 나누어준 것은 단오가 음력 5월 5일로 여름을 맞이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신하들은 이 부채에 금강산의 1만 2천 봉을 그려 넣어 시원한 바람이 불기를 바라기도 했다.
한편 농민들에게 단오는 모내기를 마치고 잠시 쉬는 시기디. 그래서 남자들은 모여서 씨름을 했다. 조선 시대 씨름은 다른 명절에도 즐겼지만 일 년 중 양의 기운이 가장 왕성한 단오날에는 빠질 수 없는 민속놀이다. 여자들은 창포물에 머리를 감고 그네를 타거나 널뛰기를 즐겼다.
단오에는 특별한 음식으로 수리취떡과 화전을 먹었다. 수리취떡은 수리취나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수리떡이라고도 하는데, 떡의 모양이 수레바퀴처럼 생겨 수레바퀴떡으로 불리다가 수리떡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화전은 꽃잎을 따서 만든 거다.
이때 사용된 꽃잎은 보통 분홍색의 진달래 꽃잎이었다. 또 단오에 먹는 과일로 앵두가 빠질 수 없다. 사람들은 빨갛게 익은 앵두로 화채를 만들어 먹었다. 정성스럽게 딴 앵두를 단오 차례상에 올렸다.
햇곡식과 과일로 차례를 지내던 추석
우리 속담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어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와 같으면 좋겠다.
한가위는 추석의 다른 이름이다. 추석은 음력 8월 15일로 가배, 중추절 등으로도 불렸다. 설날과 함께 우리 민족의 최대 명절이지요. 『삼국사기』에는 신라 유리왕 때 가배와 관계된 기록이 있다.
유리왕은 도읍의 부녀자들을 두 편으로 나누어 8월 15일이 되기 약 한 달 전부터 옷감을 짜는 길쌈을 하도록 했다. 마지막 날이 되면 승부를 겨루었는데, 이때 진 편에서 음식을 장만하여 대접하며 놀았다고 한다.
조선 시대 사람들은 추석 때 송편을 빚어서 먹었다. 농사지은 햇곡식과 과일로는 조상님께 차례를 지냈다. 한식 때처럼 조상의 묘를 찾아가 성묘도 했다.
서당에 다니는 아이들은 원놀이를 하거나 편을 나누어 가마 싸움을 했다. 원놀이는 아이들 중 한 명이 마을의 원님(사또)이 되고 나머지는 백성이 되어 모의재판을 하는 거다. 가마 싸움은 각 마을마다 나무 가마를 만들어 서로 부딪히면서 싸우는 것인데. 이때 가마가 부서지면 지는 거예요. 이외에 부녀자들은 강강술래를 했다.
역사 속 작은 이야기: 4대 명절 외에 현재까지 이어지는 세시 풍속은?
조선 시대에는 설, 한식, 단오, 추석 등 4대 명절 외에도 다양한 세시 풍속이 있었다. 그중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세시 풍속은 정월 대보름, 사월 초파일, 동지 등이다.
먼저 정월 대보름은 설이 지난 후 15일째 되는 날이다. 정월 대보름 아침에 땅콩, 호두, 밤 등을 깨물며 종기나 부스럼이 나지 않도록 비는 풍속이다. 또 정월 대보름 전후로 사람들이 모여 마을 공동의 제사인 동제를 지내고 줄다리기, 지신밟기 등을 했다.
사월 초파일은 부처의 탄생일을 기념하는 불교 행사가 일반 백성들의 세시 풍속이 된 것이다. 사월 초파일 저녁에는 여러 가지 모양의 등을 매달았다.
동지는 24절기 중 하나로 밤의 길이가 가장 긴 날이디. 동지 다음날부터는 다시 낮이 길어지기 때문에 새해의 시작이라고 생각했다. 동지가 되면 궁궐에서는 달력을 만들어 신하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했다.
동지는 매해 음력 11월에 돌아온다. 11월 중에서도 초에 있으면 ‘애동지’, 중순에 있으면 ‘중동지’, 11월 말쯤이면 ‘노동지’라고 구별하여 부르기도 했다, 동지에는 보통 팥죽을 먹는데, ‘애동지’에는 팥떡을 먹는다. 이날 팥죽을 먹으면 아이들에게 좋지 않다는 이야기가 있다.
조선 시대는 농업 중심 사회였기 때문에 그들이 지켰던 세시 풍속은 농업과 관계있는 것이 많다. 그리고 그중에는 현재까지 이어지는 것도 있지만 사라진 것도 있다.
자료: 우리역사넷에서 발췌(https://contents.history.go.kr/mobile/eh/view.do?levelId=eh_r0312_0010&code=eh_age_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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