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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122]평촌과 산본지역의 선사(先史) · 고대유적

안양똑딱이 2025. 1. 22. 12:03

 

수도 서울의 젖줄인 한강을 끼고 그 남방에 위치한 안양, 군포, 의왕, 과천지역에는 이미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고 있었을 것이다. 옛 과천군 동면 신원리(新院里), 남면 부곡리(富谷里산본리(山本里) 및 상서면(上西面) 일대에서 청동기시대의 지석묘 등이 출토된 것으로 미루어 보아 이 곳이 거주 지역이었음을 짐작할 수가 있다. 초기의 인류는 어로·채취·수렵 등으로 이동생활을 영위한 후 차차 이동식 농경에서 정주(定住)식 농경으로 생산양식이 발전되었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안.군.의지역은 그들에게 좋은 환경을 제공해 줄 수 있었을 것이다.

 

1절 평촌지역(坪村地域)의 선사(先史) · 고대유적(古代遺蹟)

 

1. 개관

2. 평촌마을 지석묘군

3. 신촌마을 지석묘군

4. 기타 지석묘

5. 귀인마을 백제 주거지

 

1. 개관

현재 안양시 동안구에 있는 평촌 신도시 개발지구는 1914년 과천이 시흥군에 폐합되기 이전까지는 삼국시대 이래 행정구역상 과천의 일부 지역으로 조선시대에는 과천현의 상서면(上西面)과 하서면(下西面)으로 편제되어 있었다. 이 지역은 관악산과 청계산 아래로 학의천이 흐르는 비교적 넓은 개활지로 선사시대인들이 주거지로 택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평촌의 유적에 대한 조사는 1989년에 명지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지표조사가 실시되었으며, 이듬해인 19904월부터 5월까지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다.2) 두 차례의 조사는 평촌지구가 대규모 택지개발로 인하여 지표의 원형이 변형될 수밖에 없어 실시된 것으로, 주택단지 조성에 앞서 체계적인 학술조사가 진행되었으므로 그나마 원과천 지역의 선사유적지를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선사유적으로는 지석묘가 모두 13개가 발견되었을 뿐이다. 이것들은 평촌산(坪村山) 동북쪽 논에서 발견된 6, 신촌(新村)마을 입구의 구릉 정상부의 5, 평촌산 남서쪽 기슭의 1, 귀인(貴仁)마을 안쪽 구릉의 1기이다. 그리고 귀인마을에서 조사된 백제시대로 추정되는 주거지(住居址) 유적이 있다.

 

아쉬운 것은 신도시의 택지개발을 위해 실시된 조사였으므로 조사 후에 유적들을 현장에 복원하여 보호하지 못하고, 지석묘 중 일부는 경기도에서 건립중인 도립박물관의 전시용 유물로 옮겨 가고, 귀인마을 지석묘는 명지대학교로 이전 복원되었으며, 신촌마을 지석묘는 평촌신도시내의 자유공원에 복원되도록 결정되어 지석묘와 그 유구(遺構)의 원형이 훼손되었다는 점이다.

 

산본 지역은 조선시대의 과천현 남면(南面)의 산본리와 금정리 일대이다. 산본은 조선시대 후기까지는 산저리(山底里)로 불리다가 고종 때부터 산본리(山本里)로 불리웠으며, 1914년부터는 과천에서 떨어져 나가 시흥군의 남면에 속하였다. 수리산의 남쪽지역에 위치한 구릉지대로서 경사가 완만하고 가운데로 하천인 산본천이 흘러 비교적 사람이 살기에 좋은 입지적 조건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선사나 고대시대에 적지 않은 사람이 살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특히, 삼국시대의 군사적 요충지인 서해안이 가까워 국가에서 중요시 했을 것이다. 이 지역에서는 11기의 지석묘와 1개의 고분군이 확인되었다.

 

과거 과천을 중심으로 안양과 군포 양쪽으로 분리된 이 지역들은 비록 오늘날에는 다른 행정구역으로 속하여 있지만, 유구한 역사에서 그 시기는 매우 짧고 대부분의 시기는 행정구역상 과천에 속해 있었다. 불행히도 현 과천 지역은 아무런 대책이 없이 신도시개발을 하는 과정에서 유적이나 유물이 사라져 갔다. 

 

2. 평촌(坪村)마을 지석묘군

이곳의 지석묘는 인덕원(仁德院) 4거리에서 군포(軍浦) 방향으로 약 1쯤 떨어진 지점에 있는 의왕시(儀旺市) 포일(浦一) 주공아파트단지 서쪽 약 200지점에 6개가 나란히 위치하고 있다. 유적의 주변에는 안양천의 지류인 학의천(鶴儀川)이 남에서 북으로 흐르고 있으며, 서쪽으로는 해발 약 80의 구릉지가 있다.

 

평촌마을 지석묘군 위치도

【 지도 】 평촌마을 지석묘군 위치도

 

1) 1호 지석묘

화강암인 덮개돌(蓋石)의 크기는 150×85×30~40이고 장축(長軸) 방향은 남-북에서 동쪽으로 약 10°가량 기울어져 있었다. 덮개돌에는 3개의 성혈(性穴)이 있으며, 사방에는 매끈하게 다듬어 치석(治石)을 한 흔적이 있고, 남동쪽 모서리는 정()으로 깨뜨린 흔적이 남아 있다. 덮개돌 밑의 유구(遺構)는 할석(割石)들이 결실되는 등 훼손의 흔적이 있었다. 그러나 원형을 찾아 복원한 결과 유구의 길이는 약 230이며, 폭은 40~50의 규모로 성인(成人)을 신전장(伸展葬)하였던 것으로 추정되며, 그 하부에 토광(土壙)의 흔적은 없었다.

 

2) 2호 지석묘

1호 지석묘의 북쪽 2지점에 위치하였는데, 덮개돌은 화강암으로 그 크기는 220×150×30~40의 규모이며, 장축 방향은 남-북에서 20°가량 기울어져 있었다. 덮개돌 밑의 유구는 석관(石棺)으로 55~80의 삼각형 혹은 사각형의 판석(板石) 6()를 깔아 놓았다. 부장된 유물은 발견되지 않았으나 생토(生土) 위에 판석으로 된 석관을 구축한 후 덮개돌을 덮은 구조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3) 3호 지석묘

2호 지석묘의 북쪽 약 2.5지점에 위치하였는데, 6개의 지석묘 중에서 유일하게 지표면에 노출되어 있었다. 덮개돌 위에 170×110×25~40의 석괴가 얹혀 있었는데, 이 석괴는 제5호 지석묘의 덮개돌로 추정되고 있다. 3호 지석묘의 덮개돌은 440×210×40~50의 대형으로 장축방향은 남-북에서 동쪽으로 약 60°가량 기울어져 있었다. 덮개돌에는 하나의 성혈이 있었으며, 하부 유구로 3개의 석곽이 발견되었다.

 

주석곽(主石槨)으로 보이는 제1호 석곽은 덮개돌을 받치는 4개의 지석(支石) 사이에 있었는데 할석을 연결시켜 벽석을 만들고 내부를 작은 할석으로 채웠다. 크기는 250×60정도로 성인을 매장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주석곽의 남쪽에 있는 제2호 석곽은 크기가 135×55정도로 판석을 장축 방향으로 양쪽 벽석에 걸쳤으며, 양쪽 끝은 판석 2장으로 마무리지었다.

 

이 석곽은 크기로 보아 아동용이었거나 세골장(洗骨葬)과 같은 특수한 매장법에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데, 한강 유역에서 발견된 것으로는 첫번째 사례이다. 덮개돌의 동북쪽에 있는 제3호 석곽은 크기가 140×45이며, 할석이 제4호 지석묘 쪽으로 흘러 들어가 원형이 심하게 훼손되었다. 2호 석곽과 같이 세골장용이었거나 아동용 석곽으로 보이며, 4호 지석묘 쪽으로 흘러 들어간 할석 사이에서 간돌화살촉[磨製石鏃] 1점과 민무늬토기[無紋土器] 파편이 몇 점 발견되었다.

 

4) 4호 지석묘

3호 지석묘의 하부 구조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발견되었다. 덮개돌의 크기는 370×290×40~50규모로 삼각형의 모양을 하고 있으며, 4개의 매장터가 발견되었다.

 

1호 유구는 덮개돌의 남쪽에 위치하였는데, 100×40×50의 규모로 토광을 판 후에 할석을 덮은 구조로 되어 있으며, 그 규모로 보아 세골장을 했던 유구로 추정된다.

 

2호 유구는 제1호 유구의 동쪽에 있는데, 토광을 판 후 그 위에 할석을 얹은 모습으로 토광의 크기는 길이가 120×50~70, 폭이 40~50의 규모이다. 3호 유구는 제2호 유구의 동북쪽에 위치하였는데 토광을 판 후에 할석을 덮은 모양이나 덮개돌에 눌려 원형을 확인할 수는 없었다. 4호 유구도 토광의 규모를 확인할 수는 없었다.

 

이 제4호 지석묘는 하나의 덮개돌 아래에 유구가 여러 개 있는 구조로서 가족들이 사망한 후 뼈만 추려서 매장한 세골장식 가족묘로 추정된다.

 

5) 5호 지석묘

3호 지석묘에서 북쪽으로 약 4지점에 위치하고 있었다. 덮개돌의 크기는 75×50×15~20정도로 작은 규모였으며 장축 방향은 남-북에서 동쪽으로 약 40°가량 기울어져 있었다. 덮개돌을 들어낸 후 할석들을 확인할 수 있었으나 유구의 정확한 규모는 확인할 수 없었다. 그리고 덮개돌도 그 규모로 보아 유구 위의 덮개돌이 본래의 것이 아니고, 3호 지석묘 덮개돌에 올라가 있던 석괴가 여기로 옮겨진 것으로 추측된다.

 

6) 6호 지석묘

1호부터 5호까지의 지석묘가 밀집해 있는 곳으로부터 북동쪽으로 약 200쯤 떨어져 위치하고 있었다. 인접하여 송유관 등 시설물이 있어 유구를 확인하지 못하였다.

 

7) 출토 유물

평촌마을 지석묘군에서는 몇 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원형토제품(原形土製品)은 제1호 지석묘 부근에서 출토되었는데 직경 4.4~5, 두께 1.4~1.5의 크기로 손질한 흔적이 뚜렷하나 정확한 용도는 밝혀지지 않았다. 민무늬토기 조각들은 제3호와 4호 지석묘 사이에서 발견되었는데, 앞으로 더 연구가 진행되면 이 곳에 있는 지석묘의 연대 추정에 자료가 될 것으로 추측된다.

 

간돌화살촉도 제3호 지석묘 부근에서 출토되었는데 길이 6, 1.2의 크기이다. 날의 한쪽은 떨어져 나갔으며, 가운데가 도툼한 모양을 하고 있다. 6호 지석묘의 덮개돌 하단에서 발견된 숫돌은 길이 12.1, 7.2~4.1크기로 땅에 박아 놓고 사용하던 숫돌로 추정된다. 돌도끼는 제6호 지석묘에서 2개가 출토되었는데, 완전한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은 길이가 11.1, 5.5~8.5, 두께 0.6~1.4의 크기이며 몸체의 중앙부에 자루를 고정시키는 홈이 있다. 같이 발견된 돌도끼 조각은 한쪽 면을 매끈하게 다듬었고 사용으로 인한 마모가 심하게 나타난다.

 

3. 신촌(新村)마을 지석묘군

신촌마을은 안양남국민학교에서 평촌 신도시 건설지구 쪽으로 약 500쯤 떨어져 위치하고 있다. 이 곳의 지석묘는 발굴·조사 후 평촌단지내에 들어설 자유공원에 이전·복원될 계획이라고 한다. 이 곳에서는 모두 4개의 지석묘가 발굴되었다.

 

1) 1호 지석묘

신촌마을 지석묘 중에서 제일 큰 것으로 덮개돌은 화강편마암으로 크기는 340×250×30~40정도이며, 성혈이 하나 발견되었다. 지석묘가 위치한 구릉은 지표밑 10~15아래에 부식 암반층이 깔려 있었는데, 여기에 하부 구조가 시설되어 있다. 덮개돌 밑의 주 유구 외에도 덮개돌 주위에서 유구가 2개 더 발견되었는데, 서쪽의 석관유구는 형태가 완전하였으나, 석관 남쪽의 유구는 원형을 알아 볼 수 없었다. 석관의 규모는 80×60에 깊이가 30정도로 성인을 신전장(伸展葬)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덮개돌 아래의 유구는 형태를 확인할 수 없었다. 부장된 유물은 없었으나, 덮개돌 주위에서 민무늬토기의 바닥조각과 간돌화살촉, 숫돌이 발견되었다.

 

2) 2호 지석묘

1호 지석묘의 서남쪽 약 5지점에 위치하였는데, 덮개돌의 크기는 174×110×30~40로 장축 방향은 남-북에서 동쪽으로 약 35° 가량 기울어져 있었다. 할석을 이용해 석곽(石槨)을 만들었던 것 같으나 훼손되었다.

 

3) 3호 지석묘

2호 지석묘의 남동쪽 약 3지점에 위치하였는데, 언덕 정상부에 덮개돌이 거의 노출되어 있으며 그 크기는 185×155×20~30이고, 장축 방향은 남-북에서 서쪽으로 약 60°가량 기울어져 있었다. 덮개돌 위에 3개의 성혈이 있었으며, 사방에는 치석한 흔적이 남아 있다. 덮개돌 밑에는 90×30정도 크기의 반월형(半月形) 판석 2매가 놓여 있는데, 이외의 하부 구조는 발견되지 않았다. 따라서 이 지석묘는 매장을 위한 것이 아니고 하늘에 제사를 지내기 위한 제단의 역할을 한 것이 아니었나 추정된다.

 

4) 4호 지석묘

3호 지석묘에서 동쪽으로 약 6쯤 떨어져 있으며, 덮개돌의 크기는 205×190×25이고 장축은 동-서에서 북으로 약 10°가량 기울어져 있었다. 산의 경사에 의해 덮개돌이 미끌어지면서 하부구조는 훼손된 듯 하며 30정도 크기의 할석 2개만이 남아 있었다.

 

5) 출토 유물

간돌화살촉은 제1호 지석묘 부근에서 출토되었는데, 길이는 약 7.7로 날과 날개 부분이 원형대로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부장용으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숫돌은 역시 제1호 지석묘 부근에서 출토되었는데, 크기는 길이 5.7, 3, 두께 1.5의 규모이며 사용으로 인한 마모흔적이 뚜렷하다. 민무늬토기의 바닥 조각은 민무늬토기 제작양식상 후대에 속하는 것으로 바닥에서 그릇의 배쪽에 연결되는 부분이다.

 

4. 기타 지석묘

평촌마을 및 신촌마을의 지석묘균 외에 평촌지구 발굴조사에서는 2기의 지석묘가 더 발굴되었다. 이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귀인(貴仁)마을 지석묘

평촌동 365-3번지 뒷산의 정상부에 있는데 주민들에 의해 '신선바위'라고 불리웠으며, 덮개돌의 크기는 175×110×20~30규모이고 7개의 성혈이 있었다. 지석묘는 산 정상부근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따라서 덮개돌 밑에서 아무런 시설도 나타나지 않았다. 이 지석묘는 현재 명지대 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2) 갈산(葛山)마을 지석묘

경수산업도로에서 군포 방향으로 가다보면 대안(大安)여중이 있는데, 이곳에서 남쪽으로 20m쯤 떨어진 산기슭의 밭에 지석묘가 있다. 이 곳은 신도시 중앙공원의 끝자락 일부이기도 하다. 덮개돌의 크기는 200×105×20~25로 장축은 남-북에서 동쪽으로 약 30˚가량 기울어져 있었다. 덮개돌 밑에서 유구 등 하구 구조는 발견되지 않았다.

 

5. 귀인(貴仁)마을 백제 주거지

평촌 신도시 개발을 위한 명지대 박물관의 조사에서 지석묘들과 함께 백제시대로 추정되는 주거지가 발견되었다.3) 이 주거지는 귀인마을 지석묘가 있는 곳에서 서북쪽으로 약 3쯤 떨어진 산의 능선에서 발견되었는데, 지표조사시 타제(打製)석기가 흩어진 채 여러 점 발견된 곳이었으므로 발굴조사가 진행되었고 이 조사과정에서 백제주거지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이 백제시대 주거지는 온돌구조를 하고 있는데, 온돌은 할석들이 4줄의 석렬(石列)을 형성하고 있다. 석렬 사이의 골에는 숯가루가 깔려 있고 돌에는 불을 땐 흔적이 뚜렷이 남아 있다. 아궁이 시설이 되어 있으며 솥을 걸기 위한 것으로 추정되는 판석이 발견되었고, 아궁이 북쪽으로 부엌으로 추정되는 시설이 만들어졌던 흔적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이 곳에서 백제 초기 것으로 추정되는 갈색토기의 파편이 출토되었다. 또한 당시 집을 세웠던 기둥자리와 함께 저장고(貯藏庫)로 보이는 시설도 확인되었다.

 

이 귀인마을의 주거지는 초기 백제시대의 주거지로 추정되는데, 지표면으로부터 30~50정도 깊이의 움을 판 후 온돌시설 · 부엌 · 저장고 등을 갖춘 것이었다. 바깥 기둥내의 집은 지름 4.5정도의 원형이며, 면적은 25.25평방이다. 이 곳에서 발견된 유물은 3점으로 초기 백제시대의 토기로 보이는 승석문토기의 파편 1점과 곁면을 마연한 흑색토기 파편 1, 그리고 돌도끼 1점이다.

자유공원에 복원한 지석묘

 


2절 산본지역(山本地域)의 선사(先史) · 고대유적(古代遺蹟)

 

산본지역은 조선시대의 과천현 남면(南面)의 산본리와 금정리 일대이다. 산본은 조선시대 후기까지는 산저리(山底里)로 불리다가 고종 때부터 산본리로 불리었으며, 1914년부터는 과천에서 떨어져 나가 시흥군의 남면에 속하였다. 수리산의 남쪽지역에 위치한 구릉지대로써 경사가 완만하고 가운데로 하천인 산본천이 흘러 비교적 사람이 살기에 좋은 입지적 조건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선사나 고대시대에 적지 않은 사람이 살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특히, 삼국시대에는 군사적 요충지인 서해안이 가까워 국가에서 중요시 여겼을 것이다. 이 지역에서는 11기의 지석묘와 1개의 고분군이 확인되었는데 이를 차례로 설명하고자 한다.

 

1. 산본지구 지석묘

2. 산본지구 삼국시대 고분군

 

1. 산본지구(山本地區) 지석묘(支石墓)

1) 골안 지석묘군

2) 광정마을 지석묘군

3) 문화촌 지석묘군

 

1) 골안 지석묘군

골안은 군포의 산본 주공아파트 1단지 우측으로 당성사(堂成寺)로 들어가는 입구에서부터 수리산 기슭까지의 구간이다. 길을 따라 가면 왼쪽으로 논이 보이는데, 논의 중간 쯤 되는 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골안[內谷]이란 말에서처럼 수리산에서 뻗어 내린 2개의 작은 능선 사이에 있다. 현재에는 도시고속화도로의 건설로 인하여 수리산의 밑부분이 파괴되어 개발되었기 때문에 줄기가 없어졌다. 또한 산본 신도시 개발로 인해 그 지역에 10쯤 땅을 돋우어 우성아파트를 지었기 때문에 그 흔적조차 알 수 없다.

 

(1) 1호 지석묘

해발 45m의 계단식 논에 위치하는데, 덮개돌은 장축이 남-북에서 서쪽으로 30°정도 위치해 있다. 덮개돌의 규모는 길이 205, 너비 140로 약간 긴 타원형이고 두께는 50내외이고, 석질은 화강암이다. 덮개돌의 하부는 흑갈색 점토층이었으며, 덮개돌 하부의 중앙과 남쪽 부분에서 할석들이 노출되었다. 계곡 입구에 위치하여 있으므로 자연적인 유실로 유구가 상실된 것으로 판단되며, 검출된 유물은 없었다.

 

(2) 2호 지석묘

1호 지석묘에서 남쪽으로 4쯤 떨어진 논두렁에 위치하였는데, 덮개돌은 길이 180, 너비 85, 두께 30~50의 규모로 부정형이다. 장축은 동-서 방향이며, 석질은 화강암이고 둘레를 치석하였던 흔적이 뚜렷이 남아 있다. 덮개돌의 하부는 흑갈색의 뻘과 모래가 섞여 있는 교란층이었으며, 유물은 출토되지 않았다.

 

2) 광정(光亭)마을 지석묘군

광정마을 지석묘군은 수리산에서 남쪽으로 뻗어내린 큰 능선의 하단부에 있는 계곡의 삼각지에 위치하는데, 행정구역상으로는 산본 2345번지의 밭에 위치한다. 유적 뒤편으로 산본중학교가 있으며, 옆쪽으로는 옐림복지타운이 들어서 있다. 이 지석묘군은 동-서 방향 약 70사이에 일정한 방향으로 배열되어 있는데, 5기가 조사되었다.

 

(1) 1호 지석묘

유적의 가장 서편에 위치하는데, 광정마을 지석묘 중 규모가 제일 크다. 덮개돌은 크기가 길이 265, 너비 140, 두께 50~55의 타원형이며, 장축방향은 남-북으로 약 40°가량 서쪽으로 기울어져 있고, 석질은 화강암이다. 덮개돌은 지반의 경사에 따라 서쪽으로 이동해 온 듯 한데, 덮개돌의 동북쪽에서 하부 구조로 보이는 할석이 노출되었으나 대부분은 훼손 상실되고, 'U'자 모양의 석곽 형태만 확인되었다. 복원된 석곽의 규모는 길이 200, 80내외로 추정된다.

 

(2) 2호 지석묘

1호 지석묘에서 동북으로 약 40떨어져 위치한다. 길이 100~200, 50~100내외의 석괴 5개가 모여 있는데, 중앙의 돌은 뒤집혀 있는 것으로 보아 옮겨온 것으로 추정된다. 주변 3호 지석묘와 합쳐 모두 7개의 석괴가 흩어져 있는 상태이다.

 

5개의 석괴 중 남쪽에 있는 장축방향 동-서인 장방형의 석괴가 주석괴로 추정된다. 이 주 석괴의 규모는 길이 196, 93, 두께 37였다. 5개의 석괴를 모두 옮긴 결과 2개의 석곽이 노출되었다. 이 지석묘는 별개의 2개 지석묘 유구가 있었던 것인데, 어느 시기엔가 석괴를 모아 놓은 것으로 추정된다.

 

3) 문화촌(文化村) 지석묘군

문화촌 지석묘군은 수리산의 동쪽 지맥에서 다시 남으로 뻗은 중간 지맥의 해발 55지점에 위치하며, 행정구역상으로는 산본동 산1~2에 해당한다. 주변에는 전주 이씨 묘역이 서쪽에 위치하며, 지표면은 남쪽으로 경사진 사면을 이루고 있다. 주위에 지석묘의 덮개돌으로 보이는 큰 돌들이 여럿 분포하는데, 이 중에서 지석의 흔적이 뚜렷한 4기가 되었다.

 

(1) 1호 지석묘

구릉 사면의 동남부에 위치한다. 덮개돌은 편마암이며, 규모는 길이 200, 너비 180, 두께 20이며, 장축은 서북-동남방향이고, 타원형이다. 둘레에는 치석이 되었던 흔적이 완연하였으나 하부 구조는 발견되지 않았다.

 

(2) 2호 지석묘

1호 지석묘 서쪽 7에 위치한다. 덮개돌은 편마암이며, 규모는 길이 290, 263의 거의 원형이고 두께는 64이다. 장축은 남-북향이고 덮개돌의 하단에서 길이 40~60의 장방형 판상할석이 발견되었다.

 

(3) 3 · 4호 지석묘

1호 지석묘 서쪽 7에 위치한다. 덮개돌은 편마암이며, 규모는 길이 290, 263의 거의 원형이고 두께는 64이다. 장축은 남-북향이고 덮개돌의 하단에서 길이 40~60의 장방형 판상할석이 발견되었다.

 

2. 산본지구(山本地區) 삼국시대(三國時代) 고분군(古墳群)

산본 지역에서는 지석묘와 함께 고분군도 발견되었다. 삼국시대 말기에서 통일기 신라 초기의 고분으로 추정된 산본 지역의 고분은 모두 9기였으며, 그 구조는 수혈식석곽분(竪穴式石槨墳)과 횡혈식석실분(橫穴式石室墳)이 혼재해 있었고, 당시에 사용된 토기 등 유물도 수 점이 발견되었다.

 

고분군의 위치는 군포시 산본동 산 1~2번지이며, 안양과 군포의 시계를 지나는 34번 국도의 우측에 있는 해발 60~90의 구릉지대의 동쪽 사면 중턱에 위치한다. 밑으로는 전경부대가 있다. 고분군의 앞면에는 산본천과 안양천이 흐르며 그 주위에 분지형 평야가 펼쳐져 있어 고분 조성 당시에는 이 곳이 매장된 이들의 생활터전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 1호 고분

조사지점의 구릉 정상부에 노출되었는데, 수혈식석곽(竪穴式石槨) 구조이며 분구(墳丘)는 유실되어 형태를 확인할 수 없다. 석곽 북쪽 분구 기저부에 반원형의 호석(護石)시설이 남아 있는데 남쪽의 호석은 유실된 것으로 추정된다. 내부 구조는 길이 80~90의 장방형 토광을 파고 그 안에 돌로 네 벽을 축조하였다. 장축은 남-북향에서 서쪽으로 약 10°가량 기울어 있다. 석곽의 바닥에는 길이 80, 너비 60, 두께 15의 판석 2장을 깐 시상대(屍床臺)가 설치되었다. 유물로는 북벽과 시상대 사이에 놓인 판석 위에서 인화문유개합(印花文有蓋盒)과 점열타인문완(點列打印文碗) 뿐만 아니라 청동제의 유물도 수 점이 발견되었다.

 

2) 2호 고분

1호 고분에서 남쪽으로 13정도 떨어진 구릉 중턱에 위치하고 있다. 분구는 거의 유실되어 지표 하 15~20에서 호석과 석실 4벽의 상단부가 발견되었다. 석실은 현실(玄室)과 연도가 있는데, 현실의 평면은 방형이며, 연도는 왼쪽에 약간 치우쳐 있는 횡혈식석실이다. 호석은 길이 50~60정도의 비교적 면이 고른 돌을 이용하여 서로 겹치게 쌓았다. 이로써 보면 분구의 밑면이 직경 6.4인 원형분으로 생각된다. 유물로는 토기병(土器甁)이 동쪽 시상대의 북단에서 발견되었는데, 입둘레는 6.7이고 둘레는 8.5이며 밑의 둘레는 8.5, 높이 15.5의 작은 병이다.

 

3) 3호 고분

구릉에서 동남쪽으로 경사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지표 5~10아래에서 석곽의 4벽 상단부가 나타나 있으며 분구의 봉토는 유실되어 원형을 알 수 없다. 내부 구조는 수혈식석곽으로서 석곽의 평면은 남북 방면으로 긴 축을 둔 장방형이다. 길이 220, 너비 87이고 남아있는 벽면인 북벽의 높이는 80이다. 석곽은 80~90의 장방형의 토광을 파고 그 안에 돌들을 쌓아 구축하였다. 유물로는 토기인화문병(土器印花文甁)이 출토되었는데, 시상대에 접하여 석곽 북벽과 서벽의 모서리 부분에 세워져 있는 상태였다. 크기는 입둘레 10.2, 둘레 17, 밑바닥의 둘레는 10.8이고 높이는 182호 고분의 것보다 약간 크다.

 

4) 4호 고분

3호 고분에서 동편으로 10떨어진 동쪽의 경사면에 있다. 내부 구조는 수혈식석곽인데, 봉토는 유실되고 석곽의 상단부만 남아 있는 상태였다. 석곽의 경우 지표에서 100정도의 장방형 토광을 조성하고 그 안을 막돌과 포갠돌 등으로 쌓았다. 석곽은 폭이 82~92, 길이 220정도, 높이 88의 대형이고 잔존 형태도 양호하며, 주축방향은 남-북으로 10° 정도 기울어져 있다. 유물은 출토되지 않았다.

 

5) 5호 고분

3호 고분에서 남쪽으로 8정도 떨어진 구릉의 비탈에 있다. 분구의 봉토는 유실되어 석곽의 남쪽 상단부 일부가 노출되어 있었다. 내부 구조는 횡혈식석곽으로 장방형의 토광 안에 만들어졌다. 남쪽 부분은 파괴되어 소실되고, 나머지 부분은 양호한 상태였다. 유물로는 서북의 시상대 위에서 토기단지 1점과 왼쪽 어깨부분에서 청동제 허리띠 장식이 여러 점 출토되었다. 토기단지는 입구의 주둥이 부분이 약간 상했을 뿐 거의 완제품에 가깝다. 검은 회색을 띠고 있고 형태와 바탕흙의 성격으로 보아 백제 계통의 것으로 여겨진다. 입둘레 11.4, 둘레 17.4, 밑둘레 11.8, 높이 16이다.

 

6) 6호 고분

구릉 남쪽 비탈의 제2호 석실분에서 13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수혈식석곽분으로 분구의 봉토는 이미 유실되어 석곽의 일부가 노출된 상태이다. 석곽 바닥의 전면에는 포갠돌을 한 겹으로 깔아 시상대를 설치하고 있으며, 남쪽 시상대의 경우는 1/3이 완전히 파괴되었다. 그 이유는 도굴에 의한 것으로 보이는데, 다행히 시상대에서 깨진 점열문토기와 청동으로 만든 허리띠 장식이 출토되었다. 석곽의 평면 구조는 장방형으로 장축방향은 남-북이며 약 15도 편제되어 있다. 관뚜껑으로 석재가 발견되지 않은 것으로 미루어 보아 나무뚜껑이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석곽의 규모는 길이 260, 110, 높이 106이다.

 

7) 7호 고분

구릉 사면의 남단에 위치하며, 단애에 걸쳐 있다. 발굴조사 이전에 파괴되어 남벽과 서벽을 상실한 채 조사가 진행되었다. 수혈식석곽분으로 150깊이의 토광을 파고 석벽을 축조하였다. 북벽과 동벽은 각각 크기 60×25의 돌을 가로로 눕혀서 7~8단의 높이로 축조하였다. 비교적 면이 고른 석재를 이용하여 벽면이 정연한 편이다. 석곽의 바닥은 고운 흙으로 깔고 다진 흔적이 있으며, 북벽으로부터 43떨어져 소형 판석이 있어 시상대 시설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8) 8호 고분

발굴지의 서편 구릉에 위치하며, 봉토가 유실되어 석곽의 상단 일부가 노출된 상태로 조사되었다. 수혈식석곽분으로 60정도로 낮은 토광을 파고 축조되었다. 4벽은 모두 50~30정도의 큰돌을 포개 눕히고 그 사이에 잔돌을 끼워 넣은 형태로 4~5단을 구축하였다. 석곽의 바닥에는 남벽 쪽으로 20×15의 판석이 놓여 있을 뿐 시상대는 별도로 축조되지 않았다. 생토를 깍아 만든 바닥에 고운 흙을 깔았으며, 석판은 매장자의 신발 등 유물을 놓기 위한 것으로 추정된다. 석곽의 규모는 너비 73, 길이 212, 높이 64이다.

 

산본동의 고분은 수리산의 동쪽 지맥을 이루고 있는 해발 65의 구릉지대에 분포하고 있는데, 이같은 구릉지대의 고분군은 낙동강 유역의 가야고분군에서는 흔히 나타나는 형태이나 중부지역에서는 청주 신봉동 백제고분군에서 찾아질 뿐이다. 고분의 축조형태는 수혈식석곽분(8)과 횡혈식석실분(1)이 같이 나타나고 있는데, 수혈식고분은 지표에 장방형의 토광을 파고 토광 안에 석곽을 축조하였고, 석곽 바닥에 시상대를 조영한 것이다. 그리고 덮개는 나무덮개 형식을 택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횡혈식석실분은 수혈식과 같이 토광을 파고 남벽에 연도를 마련한 평면방식에 가까운 석실을 축조하였다. 석실 바닥에는 동서로 2개의 시상대가 마련되어 있다. 고분군에서 발견된 3점의 토기 등 유물을 통해 삼국시대 말경에서 신라통일기에 이르는 7세기 말에서 8세기 초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