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지역얘기/담론

[김대규]‘스승의 날’ 단상

안양똑딱이 2016. 7. 2. 16:47
[김대규]‘스승의 날’ 단상

[2007/05/18]시인
‘스승의 날’ 단상

나는 1964년부터 1971년까지 안양여중고교에서 국어교사 생활을 했다. 대학 졸업과 함께 시작한 첫 번째 직장생활이어서 나의 인생에서는 소중한 자산의 잊지 못할 추억들이 많다. 그 가운데서도 배구부, 문예부, 연극부, 방송부 등의 특별활동을 통한 인간관계는 지금까지지도 이어지고 있어 삶의 활력소가 된다.

더 고마운 것은 12, 13회 졸업생들이 주축이 되어 늙어버린 선생님들을 초청해서 ‘사은회’를 열어주는 일이다. 벌써 10년 가까이 된다. 지난 5월15일 스승의 날에는 청계의 한 음식점에서 모임이 있었다. 가슴에 꽃을 달아주고, 음식상 앞에 나란히 서서 ‘큰 절’을 하고, ‘스승의 노래’를 합창하고, 매번 ‘용돈’ 봉투까지 건네주는 ‘늙은 학생’들을 보노라니 공연히 눈시울이 젖어오고, 교사생활을 한 것이 참 보람스럽고, 이렇게 우러름을 받는다는 것이 한 편으로는 쑥스럽기도 했지만 오늘날 점점 찾아보기 힘든 교사와 학생, 스승과 제자간의 사랑의 표본이 아닌가 싶어 그렇게 흐뭇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제는 지천명(知天命)을 넘긴 저들 가운데는 납부금을 제대로 내지 못해 집으로 되돌려 보내진 애들도 있을 것이고, 도시락도 변변히 싸오지 못하거나 대학 진학을 포기하느라 번민이 많았을 애들도 있었을 터. 그러나 이제는 모두 자기 삶의 영역에서 나름대로의 성(城)을 쌓고 꿈을 엮고 있으니 그 얼마나 대견한 일인가.

아, 그 시절의 ‘가정환경조사서’에는 집에 TV나 전화기가 있느냐는 문항도 있었지. 학년 초가 되면 가정방문을 했고, 송충이를 잡으러 가기도 하고, 체육대회의 가장행렬, 음악제를 위한 합창연습에, 예술제의 연극공연에, 수학여행 열차에서의 낭만적인 해프닝들도 참 많았었지. 한마디로 ‘정’이 넘쳐났지. 그래서 졸업식장은 눈물바다가 아니었던가. 그 ‘정의 눈물’을 요즘에는 초등학생들에게서조차 찾아보기 어렵게 됐다.

어째서 교문마다 ‘학교폭력’을 저지하자는 현수막이 항상 걸려있어야 하는가. ‘촌지’가 어느 정도이길래 스승의 날에 휴교를 할까. 근래의 언론매체는 참고서나 교복, 또는 단체급식 재료구입에 따른 사례비 문제에서부터, 최근에는 해외 단체여행과 연관해서 자행되는 뒷거래 사례들이 연이어 보도된다.

학교에서 야기되는 모든 문제의 책임은 ‘교사’에 있다는 것이 나의 평소 지론이다. 따라서 오늘날의 교육의 질적 하락은 교사들의 인간적 함량과 직결된다고 생각한다. 사람을 길러내는 것이 교육일 터인 즉, 교사부터 사람이 되지 못하고서야 어찌 ‘사람’을 만들어낼 수 있겠는가. 인성은 아랑곳하지 않고 이념에만 혈안이 된 특정 노조의 편향성이 교육부재현상을 더욱 가속화시켜 왔다.

‘스승의 날’은 단순한 ‘교사의 날’이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는 교사라고 해서 다 스승은 아닌 것이다. 흔히 말하는 사제지간이란 재학생과 현직교사나, 졸업생과 은사와의 일반적인 관계를 넘어서 학문적·인격적 영향이 남다르게 교류된 경우일 때 비로소 ‘스승’과 ‘제자’라는 참된 의미가 성립되는 것이다.

세계적으로 위대성을 인정받는 인물들에게 공통점이 있다면 그들 대부분이 청소년 시절에 존경하고 따르는 훌륭한 선생님이 있었다는 것이다. 훌륭한 사람을 만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그보다는 훌륭한 사람을 남보다 먼저 알아보는 마음의 눈이 더 중요한 것이다. 차이는 그뿐이다.

학창시절의 선생님만이 ‘스승’이 아니다. 인생을 살아가노라면 무수한 사람을 만나고, 무수한, 일을 겪는다. 그러다 보면 나의 삶 전체에 빛을 비춰주고 더 높은 곳으로 이끌어 줄 수 있는 정신적인 스승을 만날 수도 있다. 그게 참 스승이다. 인생의 학교에서도 좋은 학생이어야 훌륭한 스승을 만날 수 있는 것이다.

나의 경우, 책을 읽으며 많은 참 스승을 만난다. 그리고 나를 보고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이들에게 그 참 스승들을 소개하는 즐거움이 크다. 좋은 제자는 스승을 더욱 스승답게 한다.

2007-05-18 15:47: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