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원식]안양歷史에서 안양驛舍 개설 의미
[2006/10/27]성결대학교 교수·안양학연구소 소장
[2006/10/27]성결대학교 교수·안양학연구소 소장
안양歷史에서 안양驛舍 개설 의미
안양(安養)이란 말을 안양지역에서 최초로 사용한 곳은 고려 태조 왕건의 명을 받은 능정(能正)에 의해 AD900년 경 창건된 안양사(安養寺)이다. 광주, 충주, 청주 등 조공을 바치지 않던 남쪽 3주를 정벌하러 가던 청년 장군 왕건이 안양예술공원 계곡 오색구름이 이는 곳에서 늙은 중 능정을 만나 뜻이 맞아 안양사를 창건했다고 신증동국여지승람(중종 23년·1530)은 전하고 있다.
불국정토를 뜻하는 안양이란 말을 공식적인 지명(地名)으로 사용한 기록은 훨씬 후대인 조선 영조 시대에 제작된 여지도서 금천현도(영조 35년·1759)와 정조 13년(1789)의 호구조사 기록 등이 있다. 금천현(衿川縣) 현내면(縣內面)의 안양리(安養里)와 과천현(果川縣) 하서면(河西面)의 안양리(安養里)가 자연부락 지명으로 처음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안양이란 지명을 활용해 작명한 기록은 정조 임금의 화산능행(花山陵行)을 위해 안양리에 건립한 안양행궁(安養行宮)이 있다. 행궁은 임금이 임시 머물 목적으로 건립한 별궁을 의미하는 바, 시흥로를 이용해 능행하던 행렬의 휴식을 위해 정조 18년(1894년)에 지어져 지금은 표석으로만 행궁터가 안양일번가에 남아 있다.
19세기 말의 안양리에 대한 기록 중 일제가 1895년에 제작한 군사지도가 있다. 이 지도에는 논밭과 십여 채 정도의 올망졸망한 가옥 표시 부호 가운데 안양촌(安陽村)이 명기돼 있다. 1898년 군포 궁례동에서 안양리로 시집 온 고 강주희(1883년생) 여사도 시집올 당시 안양행궁 주변으로 집들이 십여 채에 불과했다고 입버릇처럼 말한 것을 작년 말 작고한 고 장배순(1921년생, 전 안양시시정자문위원장) 옹이 생전에 증언한 바 있다.
이처럼 규모가 작은 자연부락에 불과하던 안양리를 변모시킨 일대 사건은 1905년 1월1일 개통돼 영업을 시작한 경부선 철도의 안양역사 개설이다. 부연하면 1902년부터 부분운행에 들어간 경부선 1구간 역 중 하서면 안양리에 개설된 역사의 명칭이 공교롭게도 하서역도 명학역도 아닌 안양역으로 결정된 것이다. 이때부터 호계리와 군포장을 중심으로 형성된 기존의 지역대표성은 안양역을 중심으로 비약적인 성장·발전하는 안양리에 그 자리를 내주게 됐다.
먼저 인구변화를 살펴보면 19세기 말의 3천여 명에서 1912년 3천412명, 25년 6천165명, 35년 8천957명, 40년 1만명 등으로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바, 늘어난 인구 대부분은 안양리의 증가분인 것을 알 수 있다. 1926년 정식으로 공설시장으로 인가 받은 안양시장, 27년 개교한 안양보통학교, 30년에 창립한 안양교회에 이어 안양금융조합, 안양우체국, 안양주재소, 안양청년회, 안양소년척후단 등이 안양이란 명칭을 달고 생겨난 공공기관이거나 편의시설 및 사회단체이다. 이와 같이 공공기관이나 사회단체의 명칭에서 당시의 공식 지명인 서이면(西二面)의 서이를 딴 명칭이 보이지 않고 안양이란 이름을 사용하고 있는 것에서 1920년대 말, 30년대 중반에 이르는 시기에 이미 안양이란 명칭이 지역대표성을 얻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안양역사 개설 후 30년이 경과하면서 하서면의 1개 리(里)에 불과했던 안양리가 지역을 대표하는 공식 명칭으로 자리를 굳힌 것이다.
지역대표성을 상실한 서이면은 1941년 10월 안양면으로 개칭되면서 27년간의 공식 활동을 접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됐다. 이 안양면이 발전해 1949과 1973년 각각 읍과 시로 승격한 후 오늘날 인구 63만의 수도권 중심도시로 안양시로 성장하고 있다.
안양시 지명의 뿌리가 1천100여 년 전 왕건에 의해 창건된 안양사에서 발원한 것이 역사적인 유래이긴 하지만, 현재의 안양시 지명이 경부선 철도 개설 당시 시흥역으로부터 6.2㎞ 지점에 위치한 하서면 안양리 하천변에 개설된 역사(驛舍)의 명칭을 안양역으로 명명한 데서 사실적으로 출발하고 있는 것을 찾아내는 것도 역사공부가 주는 큰 재미일 것이다.
안양(安養)이란 말을 안양지역에서 최초로 사용한 곳은 고려 태조 왕건의 명을 받은 능정(能正)에 의해 AD900년 경 창건된 안양사(安養寺)이다. 광주, 충주, 청주 등 조공을 바치지 않던 남쪽 3주를 정벌하러 가던 청년 장군 왕건이 안양예술공원 계곡 오색구름이 이는 곳에서 늙은 중 능정을 만나 뜻이 맞아 안양사를 창건했다고 신증동국여지승람(중종 23년·1530)은 전하고 있다.
불국정토를 뜻하는 안양이란 말을 공식적인 지명(地名)으로 사용한 기록은 훨씬 후대인 조선 영조 시대에 제작된 여지도서 금천현도(영조 35년·1759)와 정조 13년(1789)의 호구조사 기록 등이 있다. 금천현(衿川縣) 현내면(縣內面)의 안양리(安養里)와 과천현(果川縣) 하서면(河西面)의 안양리(安養里)가 자연부락 지명으로 처음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안양이란 지명을 활용해 작명한 기록은 정조 임금의 화산능행(花山陵行)을 위해 안양리에 건립한 안양행궁(安養行宮)이 있다. 행궁은 임금이 임시 머물 목적으로 건립한 별궁을 의미하는 바, 시흥로를 이용해 능행하던 행렬의 휴식을 위해 정조 18년(1894년)에 지어져 지금은 표석으로만 행궁터가 안양일번가에 남아 있다.
19세기 말의 안양리에 대한 기록 중 일제가 1895년에 제작한 군사지도가 있다. 이 지도에는 논밭과 십여 채 정도의 올망졸망한 가옥 표시 부호 가운데 안양촌(安陽村)이 명기돼 있다. 1898년 군포 궁례동에서 안양리로 시집 온 고 강주희(1883년생) 여사도 시집올 당시 안양행궁 주변으로 집들이 십여 채에 불과했다고 입버릇처럼 말한 것을 작년 말 작고한 고 장배순(1921년생, 전 안양시시정자문위원장) 옹이 생전에 증언한 바 있다.
이처럼 규모가 작은 자연부락에 불과하던 안양리를 변모시킨 일대 사건은 1905년 1월1일 개통돼 영업을 시작한 경부선 철도의 안양역사 개설이다. 부연하면 1902년부터 부분운행에 들어간 경부선 1구간 역 중 하서면 안양리에 개설된 역사의 명칭이 공교롭게도 하서역도 명학역도 아닌 안양역으로 결정된 것이다. 이때부터 호계리와 군포장을 중심으로 형성된 기존의 지역대표성은 안양역을 중심으로 비약적인 성장·발전하는 안양리에 그 자리를 내주게 됐다.
먼저 인구변화를 살펴보면 19세기 말의 3천여 명에서 1912년 3천412명, 25년 6천165명, 35년 8천957명, 40년 1만명 등으로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바, 늘어난 인구 대부분은 안양리의 증가분인 것을 알 수 있다. 1926년 정식으로 공설시장으로 인가 받은 안양시장, 27년 개교한 안양보통학교, 30년에 창립한 안양교회에 이어 안양금융조합, 안양우체국, 안양주재소, 안양청년회, 안양소년척후단 등이 안양이란 명칭을 달고 생겨난 공공기관이거나 편의시설 및 사회단체이다. 이와 같이 공공기관이나 사회단체의 명칭에서 당시의 공식 지명인 서이면(西二面)의 서이를 딴 명칭이 보이지 않고 안양이란 이름을 사용하고 있는 것에서 1920년대 말, 30년대 중반에 이르는 시기에 이미 안양이란 명칭이 지역대표성을 얻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안양역사 개설 후 30년이 경과하면서 하서면의 1개 리(里)에 불과했던 안양리가 지역을 대표하는 공식 명칭으로 자리를 굳힌 것이다.
지역대표성을 상실한 서이면은 1941년 10월 안양면으로 개칭되면서 27년간의 공식 활동을 접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됐다. 이 안양면이 발전해 1949과 1973년 각각 읍과 시로 승격한 후 오늘날 인구 63만의 수도권 중심도시로 안양시로 성장하고 있다.
안양시 지명의 뿌리가 1천100여 년 전 왕건에 의해 창건된 안양사에서 발원한 것이 역사적인 유래이긴 하지만, 현재의 안양시 지명이 경부선 철도 개설 당시 시흥역으로부터 6.2㎞ 지점에 위치한 하서면 안양리 하천변에 개설된 역사(驛舍)의 명칭을 안양역으로 명명한 데서 사실적으로 출발하고 있는 것을 찾아내는 것도 역사공부가 주는 큰 재미일 것이다.
2006-10-27 16:5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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