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2.15/ #아카이브 #옛사진 #안양 #군포 #현대양행 #한라 #만도/ 고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의 동생인 고 정인영 회장이 설립한 현대양행이 만도-한라-HL로 이어지는 그룹의 출발점에는 안양과 군포에 있던 공장들이 한몫을 한다.
1962년 10월 '5대양 6대주를 넘어 나아간다'는 뜻의 사명으로 서울 중구 무교동 92번지에서 ㈜현대양행으로 창립한 후 1964년 6월1일 안양시 박달동 120에 안양공장(안양기계제작소)를 신축한다. 안양기계제작소는 초창기 스푼, 나이프, 포크와 주전자, 냄비 등을 생산한 양식기 공장이었으나 1969년부터 자동차부품을 생샌한다.
1970년대 들어서면서 현대양행은 안양기계제작소의 자동차 부품 생산이 본궤도에 오르며 기계공업으로 그 활동 영역을 넓혀간다
1976년 12월에는 군포종합기계공장을 완공한다. 군포공장은 자동차부품, 건설중장비, 산업플랜트용 기계 등을 생산해 한국 기계공업의 전초기지 역할을 담당했다.
1980년대는 정인영회장과 현대양헹에 악목과도 같은 시기로 전두환 신군부에 의한 현대양행 피탈의 시련을 겪었으나 중공업 왕국 건설의 꿈을 포기하지 않고 열정적인 도전과 개척정신으로 재기했다.
1991년 8월16일에는 군포 당동에 지상 14층, 지하 2층의 만도 본사 군포 사옥을 신축해 준공한다.
한라그룹의 자동차 부품기업 만도(Mando)의 기업명에는 ‘인간이 마음먹으면 못할 것이 없다. (Man do)’는 각오가 담겨있다.
군포 만도사옥은 2004년 11월 이전하고 효산의료재단에 매각됨으로 군포시대 막을 내린다..이후 만도사옥 건물은 리모델링을 통해 2013년 군포G샘병원으로 개원한다
안양과 군포에 있던 굴뚝공장들이 문을 닫고 만도사옥 마져 매각되지만 한라와의 연은 아이스하키를 통해 이어간다.
1992년, 만도는 사업 다각화의 일환으로 에어컨 사업을 시작한다. 후발주자 만도가 어떻게 하면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홍보방안을 고민하던 운영진은 사내 아이디어 공모전을 통해 한 가지 방안을 마련한다. 바로 만도 위니아 에어컨의 시원한 바람을 닮은 새로운 빙상 스포츠팀을 창단하자는 아이디어다. 그렇게 안양한라의 전신인 만도 위니아 아이스하키팀이 창단하게 된다. 안양 한라는 2004년 안양시로 연고지를 옮기면서 ‘안양 한라위니아’ 아이스하키팀으로 팀 명을 변경한 후 2006년 지금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아시아리그에서 우리나라 팀 중 유일하게 우승을 한 구단이며, 지난 시즌까지 총 4번의 우승컵을 들었다.
[한라의 발자취] 제1장. 한라그룹, 한국 중공업의 씨앗을 뿌리다 .
꿈은 신념을 낳습니다. 신념은 꿈의 자식입니다. 신념이 없으면 추진력은 생기지 않습니다. 그래서 추진력 또한 꿈의 자손입니다. 모든 게 꿈을 갖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중공업 입국을 통해 한국경제를 일으키겠다는 꿈을 품은 정인영 명예회장은 1962년 10월 1일 주식회사 현대양행을 설립했습니다. 이후 한국 최초의 건설 중장비를 생산하고, 공장을 짓는 공장인 창원공장을 건설해 대한민국 중공업 역사의 새장을 열었습니다. 그의 꿈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지금은 건설 사업과 자동차부품 사업을 양대 축으로 ‘한라’의 이름을 세계에 떨쳐 나가고 있습니다.
한라의 역사를 알아보는 한라의 발자취, 그 첫 번째 장은 정인영 명예회장의 미국 워싱턴 방문으로 시작합니다.
1. 중공업 입국의 첫발을 내딛다.
1961년 12월 미국 워싱턴 AID(국제개발처) 사무실. 한국 기업 최초 미국 AID 차관 도입에 성공한 정인영 명예회장(당시 현대건설 부사장)은 차관 성사에 도움을 준 AID 한국담당인 레이먼드 말리에게 미국의 주요 산업시설 견학을 부탁했습니다. 세계경제를 주도하는 미국의 힘이 무엇인지, 어떻게 하면 한국이 전쟁의 상흔을 딛고 경제성장을 이룰 수 있는지를 모색해보고 싶었습니다.
#UNKRA
국제연합한국재건단(United Nations Korean Reconstruction Agency)은 1950년 12월1일 국제연합 총회 결의에 의거해 설립됐다. 일명 운크라라고 불리기도 하는 국제연합한국재건단은 한국전쟁으로 붕괴된 한국경제를 전쟁 전 수준으로 회복시 키는 재건 사업의 추진을 목적으로 하였다.
#AID
AID(Agency for International Development)는 개발도상국의 경제적 • 정치적 안정을 기하고 경제개발을 촉진하며, 산업시설의 현대화를 촉진하기 위한 지원을 위해 설립된 미국의 정부기관이다.
레이먼드 말리의 도움으로 미국 동부의 공업지대를 둘러본 그는 충격과 놀라움에 휩싸였습니다. 마치 하나의 생물처럼 유기적으로 연결된 대규모 공장들이 쉴 새 없이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차관 성사의 덤으로 이뤄진 미국의 공업도시 견학은 정인영 명예회장에게 한 가지 뚜렷한 확신을 심어줬습니다.
한국 경제의 미래가 바로 이런 중공업에 있구나.
내가 가야 할 길은 중공업이다.
1962년 10월 1일, 정인영 명예회장은 ‘5대양 6대주를 넘어 나아간다’는 뜻을 담아 ‘현대양행’이라는 사명의 주식회사를 설립했습니다. 이것이 중공업을 통해 한국경제 발전을 이룩하겠다는 꿈을 향한 첫걸음이었습니다.
2. 중공업을 향한 꿈의 길목, 안양 기계제작소
현대양행은 무역업으로 출발했습니다. 건설용 기자재, 건설장비, 산업기계 등의 수입과 형석, 시멘트 수출 등 현대건설의 일을 주로 맡았습니다. 목표로 한 중공업 입국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기술 축적과 기계공업에 대한 경험이 필요했습니다. 1964년 12월 17일 양식기 공장을 준공하고 안양 기계제작소라는 간판을 달고 스푼, 나이프, 주전자 등을 생산하기 시작했습니다.
현대양행은 안양 기계제작소의 가동과 함께 탄력적으로 성장해 갑니다. 당시 세계 양식기 시장의 선두는 일본이었습니다. 일본이 소규모 가내수공업 생산 방식이었던 데 비해 현대양행은 현대식 시설과 대량 생산체제를 앞세워 품질과 가격경쟁으로 그들을 앞지를 수 있었습니다.
1968년에는 처음으로 영국 런던에 지점을 개설함으로써 본격적인 해외시장 개척에 나섰습니다. 우리기업의 해외 현지화 효시였습니다. 1972년에는 미국 샌프란시스코와 일본 도쿄 지점 개설로 이어져 국제무대 진출이 더욱 활기를 띠었습니다. 양식기로 외화를 벌어들이고 수출 실적을 높여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직원들도 수출산업에 이바지한다는 긍지가 대단했습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기계공업에 대한 정인영 명예회장의 관심과 열망은 커져갔습니다.
3. 자동차부품 제조 사업에 진출하다
정인영 명예회장은 외국에 나갈 기회가 있을 때마다 국제사회의 기계공업 추세를 탐색합니다. 자동차 산업과 중공업이 미래 산업을 이끌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지금이 기계공업을 시작할 적기임을 직감하게 됩니다. 기회는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습니다.
포드사가 1966년 한국 진출을 위해 시장조사 겸 한국 파트너를 물색하러 온 것입니다. 조사단은 신진자동차 김창원 씨와 삼성 등 4,5개 회사를 목표로 접촉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현대건설 부사장이었던 정인영 명예회장은 현대를 한국 측의 협상 파트너 중 하나로 만드는 일을 맡았습니다. 그 무렵 현대건설은 자동차와 아무런 관련이 없어 포드의 접촉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포드 측 조사단이 묵고 있는 조선호텔로 찾아갔습니다. 현대건설의 자동차 산업에 대한 관심과 조건을 내세워 설득을 시작했습니다. 미국 포드 본사도 여러 차례 방문했습니다. 그 결과 현대자동차는 포드와 자동차를 생산 판매한다는 합의를 끌어낼 수 있었습니다. 그해 12월 현대는 자동차 회사를 세웠고, 1967년 포드사와 자동차 조립 기술제휴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코티나’였습니다.
정인영 명예회장은 현대자동차의 탄생 과정에 관여하면서 한 가지 다른 결론을 얻습니다.
자동차 산업의 핵심은 부품에 있다.
부품 국산화를 이뤄야 자동차공업의 국내 정착이 가능하다.
그는 자동차 조립은 엄격하게 말하면 생산기술이라 할 수 없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자동차 산업의 본질은 부품 생산에 있다고 봤습니다. 당시 국내에는 자동차 부품 업체가 전무한 실정이었습니다. 부품 국산화를 한국 자동차 산업의 발전을 모색할 수 있는 돌파구로 생각한 정인영 명예회장은 1968년 봄, 안양기계제작소에서 자동차부품 개발을 지시했습니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사업을 시작합니다. 자동차 부품을 생산할 계획입니다.
항상 2,30년을 내다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양식기 생산은 오늘의 도약을 위한 워밍업이었습니다.
어떤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자동차 전반에 대한 기술을 공부하고, 자동차부품 생산라인을 갖추도록 하십시오.
1968년 봄, 정인영 명예회장
현대양행 직원들은 전세계 유수의 자동차공업 현장을 돌며 부품 생산 준비에 돌입합니다. 우선 기존에 보유하고 있던 양식기 생산라인을 자동차부품 생산라인으로 바꾸었습니다. 프레스와 금형제조 설비를 활용해 히터박스, 휠캡, 자동차 그릴 등 제작에 들어갔습니다. 이후 클러치페달, 와이어하네스까지 확대했습니다. 본격적인 부품 기술을 얻기위해 영국의 루카스사와 암스트롱사 등 기술 제휴 협상도 이어 나갔습니다.
이듬해에는 사이드멤버(Side Member), 크로스멤버(Cross Member), 퓨얼탱크(Fuel Tank) 등 프레스 부품뿐 아니라 히터(Heater), 엔진 라디에이터(Engine Radiator)와 같은 자동차 기능 부품들로 제품선을 키워나갔습니다.
4. 자동차부품 완전 국산화로 점프하다
현대양행은 안양공장의 성장에 발맞춰 그때까지 수입에 의존해오던 자동차부품의 연차적 국산화를 추진하기 시작했습니다. 핵심 기술을 확보하지 않고서는 장기적 성장을 담보할 수 없다는 정인영 명예회장의 의지를 강력히 반영한 결과였습니다.
이에 따라 현대양행은 1970년 2월 일본 도키코사와 쇽업소버 등 경차부품 생산을 위한 기술제휴를 체결했고, 그해 4월에는 미쓰비시사와 기술제휴를 체결하고 스타트모터(Start Motor), 얼터네이터(Alternator), 디스트리뷰터(Distributor) 등의 생산을 개시했습니다. 더불어 미국의 미첼 사와 기술제휴를 체결하고 카쿨러(Car Cooler) 생산도 함께 개시했습니다. 이처럼 기술제휴를 통한 끊임없는 기술개발 결과 현대양행은 1972년 전장품과 경차 부품의 완전 국산화에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현대양행 안양공장은 또한 1975년 7월 세계 최대의 브레이크 기업인 영국 루카스 사와의 기술제휴를 통해 브레이크 시스템 생산에 들어갔고, 1976년 12월에는 영국의 캠기어 사로부터 EASC(전자식 자동 평형 제어장치) 제조 기술을 도입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어 1977년 12월에는 일본의 고요세이코사와의 기술제휴를 통해 스티어링 시스템을 생산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처럼 잇단 자동차부품의 국산화와 국내 자동차 산업의 성장에 힘입어 안양공장은 1979년 연산 15만 대 생산규모로 증설하게 됐습니다. 그 결과 1970년대 말 안양공장은 브레이크, 스티어링 등 첨단 자동차부품을 비롯해 쇽업소버, 레귤레이터, 얼터네이터, 스타트모터, 이그니션코일, 혼, 엔진 라디에이터, 히터 및 각종 프레스 부품 등 300여 종을 생산하는 국내 최대 자동차 부품공장으로 입지를 확고히 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이곳이 훗날 '만도(MANDO)'란 이름의 세계 초우량 부품 기업이 되리라고는 아무도 예상치 못했습니다.
꿈을 갖고 신념으로 끝까지 밀고 나가라
(Dream it, belive it and just do it)
- 정인영 명예회장의 좌우명-
정인영 명예회장은 '성공은 꿈꾸는 자의 몫'이라는 경구를 신념으로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불굴의 도전정신과 개척정신은 이 땅에 중공업의 기반을 이룩하였고, 오늘의 글로벌 한라의 정신적 기반으로 계승되고 있습니다.
[한라의 발자취] 제2장. 한라그룹, 한국 기계공업을 선도하다.
한라그룹은 창업기(1962~1969)에 사업기반을 구축하며, 1970년대 들어 그 영역을 꾸준히 확대 합니다. 자동차 부품과 기계공업의 기술 국산화를 추진하고 안양기계공장 증설을 비롯해 군포와 창원에 종합기계공장을 건설하면서 대량생산 체제를 갖춥니다.
특히, 세계적인 규모의 초대형 플랜트공장인 창원종합기계공장 건설을 추진하면서 국제 기계공업사상 최초의 시멘트플랜트 수출이라는 성과를 이끌어내는 등 한국 중공업의 새 역사를 열었습니다. 이로써, 정인영 명예회장이 지향하던 중화학공업 입국의 꿈을 실현할 수 있는 사업기반은 1970년대에 전반적으로 구축된 것입니다.
1. 국내 최초로 건설 중장비를 생산하다
1970년대 들어서면서 현대양행은 안양기계제작소의 자동차 부품 생산이 본궤도에 오르며 기계공업으로 그 활동 영역을 넓혀갑니다. 국가 경제 발전을 위해서는 기계공업이 꼭 필요하다는 산업보국 정신으로 기계공업에 과감히 뛰어든 것입니다.
특히, 현대건설 사장으로 1965년 국내 최초의 해외 공사인 태국 고속도로 공사를 수주해 수행했던 정인영 명예회장은 당시 건설 중장비의 국산화 중요성을 누구보다 절감했습니다. 많은 해외 공사를 수행하면서 선진 기업들이 사용하는 유압식 신장비에 비해 시설이나 장비 면에서 큰 격차를 느꼈기 때문입니다.
건설업을 위해서도 기계공업은 선결 과제이다.
장비의 현대화를 이루지 않고서 세계를 지향한다는 것은
그 목표 자체가 웃음거리일 뿐이다.”
1970년 봄, 안양공장과 가까운 군포에 주물공장 건설에 들어가 착공 1년여 만인 1971년 1월 가동에 들어갑니다. 이를 기반으로 중기공장, 대형 플랜트공장을 단계적으로 세워 중공업 기반을 갖춘 다음 최종적으로는 세계적 플랜트 수출을 주력 사업으로 해나가겠다는 전략이었습니다.
기계공장을 1972년 6월 완공하고 그 해 11월 국내 최초로 트럭크레인을 생산하면서 건설 중장비 국산화 시대를 활짝 열었습니다. 군포공장은 이후 1973년 1월 주조공장, 1974년 10월 중기계공장, 1976년 8월 경기계공장을 차례로 준공하며 한국 최고의 기계공장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미국 업체와 기술제휴도 이어졌습니다. 아메리칸 호이스트 사와 트럭 크레인 기술제휴를 시작으로 1974년 2월 프랑스 포크레인 사와 굴삭기 생산에 이어 6월에는 피아트 앨리스 사와 제휴로 불도저, 휠로더 생산에 들어 갑니다. 이런 기술제휴에 힘입어 1975년 1월 지게차 국산화에 성공하게 됩니다.
"명예회장님께서는 최첨단 시설이어야만 경쟁력이 있다고 생각하셨습니다. 기술도 경험도 없으니 설비가 좋아야 한다는 지론이셨죠. 때문에 군포공장은 공장건설, 설비, 기술 모두 일류로 진행했습니다. " (한상량 전 한라펄프제지 사장)
이후 군포공장에서는 불도저, 엑스카베이터, 모터그레이더, 트럭크레인, 크롤라크레인 등 건설중장비를 비롯해 전기고가 이동 크레인, 포크리프트트럭, 포테이너 등 운반하역 기계, 크러싱 플랜트, 아스팔트 플랜트 등 광산•건설 기계를 생산하는 대규모 공장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특히 1978년 국내 최초로 중장비를 해외로 수출하는 개가를 올렸습니다. 이때 상표를 ‘HALLA’로 정하며 ‘한라’의 이름이 처음 등장합니다.
그 당시 기업들은 투자비가 많이 들고 성과를 내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이유로 국내 어느 기업도 기계공업을 비롯한 중공업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중공업을 육성해야 한국경제를 살릴 수 있다고 믿었던 정인영 명예회장의 꿈과 열정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현대양행은 군포 기계공장 건설을 시작으로 우리나라 산업지형을 바꿔놓고 있었습니다.
2. 국내 최대 단일 종합기계공장을 건설하다
현대양행은 군포공장이 소재에서 완성품에 이르는 시스템을 어느 정도 갖추자 본격적인 플랜트 사업 구상에 착수합니다. 군포공장을 국내 최대의 종합기계공장으로 대형화, 현대화한다는 계획이었습니다.
마침 그 계획을 앞당기는 계기가 찾아왔습니다. 1973년 1월 정부가 ‘중화학공업화’를 선언한 것입니다. 이미 중공업을 지향하고 있던 현대양행에는 기회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중화학공업은 국가경제 성장을 위해서도 필요하지만
기계산업을 축으로 하는 기업은 결국 중공업을 육성해야 세계시장을 뚫을 수 있다.
그것이 당시 한국 실정에 가장 잘 맞는 정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문제는 자금이었습니다. 정인영 명예회장은 곧바로 필리핀 마닐라에 있는 아시아개발은행(ADB) 본부로 날아갔습니다. 1973년 2월이었습니다. ADB는 차관이 불가능하다는 답변을 내놓습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차관의 규모도 규모지만 민간 기업의 차관 요청 자체가 ADB에는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아무리 봐도 힘든 과제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불가능한 일만은 아니라고 믿었습니다. 이런 낙관의 밑바탕에는 이번 계획이 정부 중화학공업 육성책에 부합하는 일로 정책적 지원도 기대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행히 AID차관 교섭 때 인연을 맺은 계봉혁 박사의 도움으로 ADB 관련 인사들을 만날 기회를 얻습니다. 그에게 주어진 시간은 겨우 20분 남짓, 그 짧은 시간 안에 사업의 타당성과 장래성을 설득하는 것이 관건이었습니다.
먼저 정인영 명예회장은 공장 건설 계획을 설명했습니다. 연건평 3만 평의 종합기계공장을 지어 플랜트 수출을 주도하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런 다음 그는 사업성을 전하는 대신 뜻밖의 이야기를 꺼냅니다. 자신의 현대건설 시절 AID(국제개발처) 차관 경험을 들려준 것입니다. 자신의 경험을 통해 민간기업 지원에 대한 정당성을 부각시킨 것입니다. 특히 그는 1962년 AID 차관으로 현대건설은 플랜트 건설 경험을 축적할 수 있었고, 이는 해외시장 진출로 이어져 국내 건설업은 물론 한국 경제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는 점을 예로 들었습니다. 실제 1960년대 초반 한국 건설업의 성장률은 한국 GNP 7.8%를 훨씬 앞지른 14%로, 국내 경제는 건설업에 의해 주도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조용하지만 확신에 찬 목소리로 이야기를 이어 나갑니다. "한국의 경제발전을 위해서 기계산업을 축으로 하는 중공업 육성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이번 차관이 그 출발이 될 것입니다."라며 한국의 경제 발전에 ADB가 일조한다 점을 다시 한번 강조했습니다.
시큰둥하던 그들의 태도에서 미묘한 변화가 감지되었습니다. 결국 그는 ADB로부터 내부적으로 검토해보고 연락하겠다는 답변을 받습니다. 차관 교섭에서 이 같은 약속은 반 성사나 다름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그였습니다. 그의 예상은 적중했습니다. 1974년 10월 현지조사 내한과 두 달 뒤 ADB 평가조사단 내한으로 이어졌습니다. 군포와 안양공장 둘러본 그들은 국내산업 현황 점검과 상공부 협의를 거쳐 잠정 합의에 도달했습니다. 1975년 6월, 현대양행은 마침내 민간 기업 최초로 아시아개발은행(ADB)에 1,750만 달러의 차관계약을 체결했습니다.
1975년 6월 10일, 드디어 군포 종합기계공장 건설을 시작했습니다. 이로써 연면적 9만 9173㎡ 규모의 군포공장은 경중기계류(輕重機械類)와 그 연관제품, 건설 중장비 및 각종 공작기계, 시멘트·섬유기계·운반하역 설비 등을 생산하는 국내 최대 단일 종합기계공장으로 위용을 드러냈습니다.
"군포 종합기계공장은 기존 군포공장을 증설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규모가 워낙 커 새로운 공장을 건설한 것과 다름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우리나라 기술수준으로는 어려운 일이라고 했습니다만 보란 듯이 완공함으로써 중공업 입국의 실현을 앞당겼습니다." (유병철 전 한라중공업 부사장)
안양의 외진 곳에 공장을 지은 지 10년, 자동차 부품을 생산하기 시작한 지 5년 만에 이룩한 꿈이었습니다.
학문(배움)이란 것은 흐르는 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배와 같아서 끊임없이 나아가지 않으면 뒤처진다는 뜻입니다.
그는 문장 그대로ㅍ배움에서도, 사업에서도, 인생에서도 늘 새롭고 혁신하려고 했습니다.
글을 마무리하며, 정인영 명예회장의 평생의 좌우명을 다시금 되새겨보고자 합니다.
꿈을 갖고 신념으로 끝까지 밀고 가라! (Dream it, believe it and just do it!)
[출처] 한라그룹 공식 블로그에서( https://blog.naver.com/hallagroupblog )
한편 한라그룹은 2013년 1월에 1962년 창립 이후 50년간의 역사를 담은 사사 (社史) ‘한라그룹 50년사’를 발간했다.
한라그룹은 1962년 운곡 정인영 명예회장이 설립하였으며, 한라그룹이 사사를 발간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번 사사는 역사집, 화보집 등 1책 2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권> 역사집은 경영철학, 통사, A Story of Passion, 부록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경영철학은 정인영 명예회장의 기업관, 리더십, 한국경제 발전에 기여한 공로 및 정몽원 회장의 기업이념 등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통사는 한라그룹 50년 역사를 4개 시기로 구분해 현대양행 창립과 우리나라 중공업 발전의 견인, 만도를 통한 한국 자동차산업의 경쟁력 강화 그리고 한라건설, 한라엔컴, 목포신항만운영, 마이스터, 한라대학교, 안양한라아이스하키단 등 한라그룹의 성장역사를 체계적으로 집대성했다.
A Story of Passion은 50년 역사 속에서 중요한 터닝 포인트가 되는 이슈를 선정, 그에 얽힌 스토리를 발굴해 수록했다. 부록에는 현 경영진, 역대 대표이사, 국내외 사업장 현황, 연표 등을 실었다.
<제2권> 화보집은 연혁화보와 현황화보로 이루어져 있으며 연혁화보는 통사와 마찬가지로 지난 반세기 한라그룹 역사를 총 4편으로 시대를 구분하여 스토리가 있는 화보로 만들었다. 현황화보는 사업부문별로 화보를 구성하여, 세계를 향하여 성장하고 있는 한라그룹의 오늘을 생생하게 만나볼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역사집과 화보집뿐 아니라 대외홍보와 사내교육 등을 위해 <단행본>을 별권으로 제작하여 최근에 배포했다.
한라그룹은 사사 발간을 위해 3년 전부터 사사 편찬 TFT를 구성하여 사료 수집 및 100회 이상의 인터뷰 등을 진행해 왔다.
사실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던 1등 재벌의 귀인, 오뚝이 같은 기업 HL이야기/ 소비더머니
https://www.youtube.com/watch?v=1g-MFfJAplM
한라그룹 통사1편
https://hallo.halla.com/App/dext5editordata/2022/06/20220622_174313576_94158.pdf
만도기계를 들여다본다
http://imgstock.naver.com/upload/research/company/1378081968822.pdf
'이야기보따리 > 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240402]안양 박달군용지, 우리나라 최초 원자로 후보지였다 (0) | 2024.04.02 |
---|---|
[20240310]인천에 대한 귀한 기록(2013년 보보담 봄호) (0) | 2024.03.10 |
[20240306]군포역사신문-군포시사 별책3권(PDF파일) (1) | 2024.03.06 |
[20240223]안양 호계동에 자리했던 전파연구소 시설 (0) | 2024.02.23 |
[20240215]아이스하키 '안양 한라'가 걸어온 길 (0) | 2024.02.15 |
[20240203]우리그림에서 1989년 만든 그림책 "구름가족이야기" (0) | 2024.02.03 |
[20240202]걸개그림과 안양전자 위장이전 투쟁 승리대회 (0) | 2024.02.02 |
[20240201]1988년 우리그림 <노동의 햇볕전> 판화 작품들 (0) | 2024.02.01 |
[20240201]안양민요연구회 문화강습 포스터(1988년) (0) | 2024.02.01 |
[20240131]안양 만안구 2020 우리동네 마을 한바퀴(PDF파일) (0) | 2024.01.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