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문화재단/ 경기그레이트북스 18
경기도 근현대 생활문화 II
양훈도
안양 유유산업 옛 공장 답사일 : 2010년 5월 25일
신라 고찰古刹 터 위의 첨단 제약공장
유유산업(현 유유제약) 옛 공장은 안양시 석수동 안양예술공원(옛 안양유원지)으로 올라가는 초입에 있다. 지번상으로 석수동 212번지인 이 공장 자리는 아직 남아있는 굴뚝 때문에 멀리서도 식별이 가능하다. 사전 지식 없이 이곳을 찾은 방문
객이라면 입구에서부터 두 번 놀라게 된다. 우선 수위실이 독특하다. 공장의 수위실이라고 믿어지지 않는 조형미를 갖추었다. 정문 왼쪽에 큰 가람의 상징인 당간지주와 삼층석탑이 있다는 사실은 더욱 놀랍다. 첨단 의약품이 주 생산품목이었던 공장에 1,200년 전 신라 고찰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이다.
안으로 들어가 예전 사무동 건물과 생산동 건물을 자세히 살펴보면 정말 예사 공장이 아니었다는 걸 실감하게 된다.
당간지주와 삼층석탑으로 알 수 있듯이 이곳은 원래 신라 흥덕왕 때인 서기 827년을 전후한 시기에 세워진 중초사中初寺
가 있던 자리다. 무상한 세월을 따라 고찰은 스러지고 흔적은 땅속에 깊이 묻혔으나 당간지주와 삼층석탑만 남았다.
유유산업 설립자 유특한 회장은 1999년 작고)은 1959년 이곳 안양 석수동 공장을 세우면서, 이 당간지주와 삼층석탑을 그대로 살리고 공장을 건립하도록 했다. 유특한 회장은 유한양행 유일한 박사의 막냇동생이다.
유 회장은 게다가 수위실과 생산동 등 초기 건물의 설계를 김중업金重業(1988년 작고)에게 부탁했다. 당시 파리에서 돌아와 왕성한 활동을 하던 김중업은 특유의 건축 화법으로 이들 건물을 설계했다. 김중업은 수위실과 공장동 외에도 사무동, 굴뚝, 보일러실 모두 5개 건물을 설계했는데, 이들 건물은 한국 근대 건축의 대가 김중업의 초기 건축세계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으로 꼽힌다. 특히 김중업이 산업과 관련된 건축물을 설계한 예가 거의 없기 때문에 유유산업 안양공장은 건축사적으로 더욱 높이 평가된다.
유유산업은 1959년부터 2007년 충북 제천으로 공장을 이전할 때까지 반세기 가까이 이곳에서 숱한 의약품을 생산했다.
“셀 수도 없죠, 뭐. 비나폴로, 유판씨, 비타엠, 은행잎에서 추출한 타나민, 혈압강하제 크리드, 골다공증 치료제 엑스마빌…….” 유유산업에서 30년 가까이 근무하다가 지금은 옛 공장 관리인으로 일하는 신흥철 씨는 자신이 얼핏 기억나는 것만도 10여 가지 의약품이라 했다.
유유제약 홈페이지를 보면 이 회사는 1941년 유한무역주식회사로 출발해서 1953년부터 의약제조업을 시작했다. 55년 결핵 치료제 유스파짓, 57년 국내 최초 약리학적 7층 당의정 종합비타민제인 비타엠정, 65년 국내 최초 종합영양제 비나폴로를 개발했는데, 공장이 석수동에 있었으므로 이들 제품이 모두 김중업이 설계한 생산동을 중심으로 제조되었다는 얘기다.
유유제약이 시판한 비타엠, 비나폴로는 현재 장년층 이상이면 누구나 귀에 익은 친숙한 브랜드다. 유유산업은 호마킬러(모기향)라든가 미국 칼믹사와 합작으로 화장실 냄새 제거제를 내놓기도 했다. 천년 고찰의 터 위에 한국 근대 건축의 대표적 인물이 설계한 건물에서 한국인의 건강과 생활에 직결되는 의약품 등을 50년 가까이 만들어낸 것이다.
현재 이 공장 자리는 안양시가 매입해 복합문화공간으로 꾸미는 중이다. 그 과정에서 2009년 10월 안양이라는 지명의 유래가 되는 ‘안양사安養寺’ 명문銘文 와편瓦片이 발견되었고, 경주 황룡사와도 관련이 깊을 것으로 추정되는 중초사의 본래 면모가 드러나면서 현재 공장 터 앞뒤로 발굴 작업이 진행 중이다. 중초사 당간지주는 이미 보물 제4호로, 삼층석탑은 경기도 유형문화재 164호로 지정되어 있지만, 향후 발굴이 진척되면 1,200년간 땅속에 묻혔던 비밀이 더 드러나게 될 것으로 기대된다. 그럴 경우 유유산업 석수동 공장은 전통과 근대가 멋지게 조화를 이룬 공간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을 것이다.
김중업 초기 건축론의 실현
건축학자 정인하는 『김중업 건축론-시적 울림의 세계』에서 김중업을 한마디로 이렇게 평했다. “1940년대 초부터 시작하여 타계할 순간까지 타오르는 담배연기와 함께 뿜어져 나온 그의 건축물들은 그의 영혼이 함축되어 있는 그 충일함의 표현이었고, 그 강렬한 작품성 때문에 지금도 그 앞에 서면 심원한 시적 울림을 느낄 수 있다.” 김중업은 1952년 유네스코 주최로 열린 베니스 국제예술가대회에 참석했다가 세계적 거장 르 꼬르뷔제를 만나 그의 사무실에서 일하게 되었다. 56년 귀국한 그는 홍익대학교 건축학과 교수로서 새롭게 국내 활동을 시작했다.
“유특한 회장께서는 예술인들을 좋아하셨어요. 문화예술계 동향에도 항상 관심이 높으셨지요. 석수동에 공장을 짓게 되었을 때 유 회장께서 마침 국내에 돌아와 의욕적으로 건축 활동을 시작한 김중업 선생에게 설계를 맡기라고 하셨다고 해요.”
유유제약 최정엽 전무의 증언으로 미루어 유 회장과 김중업 간에 특별한 인연은 없었던 듯하다. 하지만 김중업은 문화예술에 조예가 깊은 기업인 유 회장의 부탁을 흔쾌히 받아들여 공장 건물의 설계에 착수했다.
김중업 초기작품의 특징은 “투명성의 확보”와 “구축체계의 노출”이었다. 유유산업의 건물들은 이러한 특징을 가장 잘 드러내 준다. 예를 들어 원형 수위실은 “투명성”에 대한 그의 표현이 반영되어 있고, 사무동은 두 가지를 모두 표현하고 있다. “이들 건물들 가운데 사무실은 앞서 이야기한 특징들을 잘 보여주고 있다. 2층 높이의 이 건물은 측면으로 돌출해 나와 건물 상부를 가로지르는 구조체에 의해 지탱되는데, 이 구조체는 힘의 전달 방향에 따른 형태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더이상 내력벽의 의미가 없어진 벽체는 유리로 처리되어 건물의 투명성을 높였다. 매우 간단하고 단순한 기능을 갖지만, 이 건물은 명쾌한 구조체계와 벽면분할로 높은 작품성을 획득하고 있다.” (정인하, 『김중업 건축론-시적 울림의 세계』, 60쪽.)
김중업의 섬세한 설계는 생산동에도 적용되었다. 현재 3층 높이인 생산동은 원래 2층까지가 김중업의 설계인데, 1층보다 2층을 더 넓게 하고 네 모서리에 벽감 형식으로 예술적 조형물을 설치할 공간을 배려했다. 이들 모서리에는 국전 대통령상 수상작가인 조각가 박종배의 모자상 파이오니아 조각상 등이 배치되었다. 또한, 김중업은 자신이 설계한 건물의 문과 기둥, 창문 철창에 와이(Y)를 두 개 겹친 유유산업의 이니셜을 일관된 모티프로 다양하게 변주하여 장식하도록 설계했다. 심지어 생산동을 비롯한 각 건물의 환기창도 그대로 노출하지않고, 철제 조형물을 일관되게 씌워 놓았다.
사무동 뒷면의 계단도 외부에서 붙이는 방식이 아니라 건물에서 자연스럽게 돌출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보일러실까지 이 대가가 설계하였다는 점도 흥미롭다. 김중업이 설계한 보일러실에서는 드라마 ‘아이리스’ 촬영이 이뤄지기도 했다. 50년대 후반 그 어렵던 시기에 이러한 건축이 이뤄지게 된 것은 유특한 회장의 안목과 치열한 건축정신의 소유자가 의기투합했기 때문이다.
또 한 번의 변신-체험 위주 복합문화 공간화
“유유산업이 한창때는 종업원이 500명 넘었지요. 그래도 사용자와 종업원 관계가 참 좋았습니다. 제천으로 이전할 때 종업원 대부분이 따라갔습니다.” 신흥철씨는 안양천 계곡물도 좋고 근무환경도 “그만이었던 그때가 그립다”고 했다. 근무자들에게 그토록 괜찮았던 유유산업 옛 공장은 안양시민 모두를 위한 괜찮은 공간으로 탈바꿈할 준비를 하고 있다. 물론 처음부터 이 작업이 순조롭게 이뤄진 건 아니다. 중초사지의 유적과 유물이 나오면서 시민대책위가 꾸려져 전통과 근대가 어우러진 공간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를 열띠게 토론하는 과정이 있었다.
“안양시에서는 일단 2012년을 목표로 리모델링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컨셉은 통일신라, 고려의 건물지와 현대 건축물이 조화를 이룬 건축공간입니다. 모든 건물은 원형 보전이 원칙이어서 외형을 보전해 산업시설 이미지를 살리고 내부만 리모델링을 할 계획으로 있지요. 리모델링이 끝나면 김중업 박물관, 타전기 등 유유산업이 남기고간 기계 등을 전시하는 유유관, 작가 스튜디오, 어린이에서 어르신까지 모두 직접 해보면서 즐기는 체험아트센터 등으로 활용할 겁니다.”
이종근 안양시 문화예술과 문화재 팀장이 들려준 향후 활용계획이다. 물론 이 계획대로 되려면 현재 진행 중인 발굴조사가 끝나야 한다. 이미 공장 입구와 뒷마당 발굴을 통해 중문, 금당, 강당, 좌우 회랑 등 고대 가람의 형태를 확인했지만, 설법단 등 중요한 터를 확실히 하기 위해서는 생산동 앞을 더 발굴해 봐야 하기 때문이다. 발굴 때문에 전체 일정이 더 늦어질 가능성이 높지만, 시가 계획한 콘셉트대로 복합문화공간을 꾸리기 위해서는 늦더라도 차근차근 진행하는 끈기가 필요해 보인다. 한마디 더 보탠다면 김중업의 건축세계가 잘 드러나도록 세심한 배려를 하는 동시에, 전통과 근대를 잇는 스토리텔링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더 치열하게 고민해보면 좋을 듯하다.
| 도움말 주신 분 |
이종근 안양시 문화예술과 문화재팀장
신흥철 유유제약 옛 공장 관리인(안양시 문화예술과 소속)
최정엽 유유제약 전무
| 참고자료 |
정인하, 『김중업 건축론-시적 울림의 세계』, 산업도서출판공사, 1998.
경기도, 『경기도 근대문화유산 조사 및 목록화 보고서』, 2004.
http://www.anyang.go.kr/ 안양시청 홈페이지
http://www.anyang.go.kr/ (주) 유유제약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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