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문화재단/ 경기그레이트북스 18
경기도 근현대 생활문화 II
양훈도
안양유원지(안양예술공원) 답사일 : 2009년 10월 6일
계곡을 막은 다섯 개의 풀장
안양시 만안구 석수1동에 위치한 오늘날의 안양예술공원에 가서 옛 안양유원지 시절을 떠올리기란 쉽지 않다. 공원 입구에 빽빽이 들어선 고층 아파트의 숲, 계곡을 따라 번듯하게 들어선 상점들, 세련미를 자랑하는 갖가지 예술 작품과 조형물, 그 사이를 한가롭게 산책하는 시민들은 유원지 시절과는 사뭇 다른 풍경을 빚어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술공원이 끝나는 부분까지 올라가서 찬찬히 입구 쪽으로 계곡을 따라 내려오다 보면 적어도 1970년대까지 소급할 수 있는 낯익은 유원지 풍경의 편린을 언뜻언뜻 만날 수 있다. 약간의 상상력을 발동해 계곡물이 철철 흘러넘친다고 가정하면 안양유원지를 구성했던 다섯 개의 풀장을 떠올리는 일도 가능하다. 그 자취를 밑에서부터 더듬어 올라가 보자.
유원지 입구에서 가장 가까이에 들어섰던, 그래서 안양유원지라는 이름을 낳았던 풀장은 입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1932년 안양역장이었던 일본인 혼다 사고로本田貞五郞는 철도수입을 늘리는 방안을 강구하다가 이곳 삼성산과 관악산에서 흘러내리는 계곡을 막아 풀장을 만들면 좋겠다는 아이디어를 떠올린다. 그는 조한구 당시 서이면장과 야마다山田 시흥군수를 찾아가 이 구상을 털어놓고 지역유지들을 설득하여 1,500원의 예산으로 천연수영장 2조를 만들었다. 이 수영장은 안양 풀이라고 명명되었다. 이것이 안양유원지의 시발이라고 한다. 그의 구상은 적중하여 안양 풀은 곧 여름철 명소가 되었다.
안양은 경부선을 타고 서울경성 사람들이 당일 코스 나들이를 하기에 가장 적합한 곳이었다. “나의/ 고향은/ 급행열차가/ 서지 않는 곳.// 친구야// 놀러오려거든/ 삼등객차를/ 타고 오렴.” 안양 출신 시인 김대규의 ‘엽서’라는 시의 전문이다. 그의 시는 비록 해방 이후에 쓰였지만, 그가 노래했던 삼등객차는 일제시대와 더 잘 어울린다. 1930년대만 해도 서울 주변, 특히 경부선 하행열차를 타고 여름 물놀이를 갈만한 마땅한 장소가 없었기에 안양 사람들뿐만 아니라 서울 사람들까지 안양유원지를 찾았다.
계곡 입구까지 저 유명한 안양 포도밭이 줄줄이 이어지고, 계곡을 따라서는 소나무와 밤나무 숲이 울창했던 이곳은 해방 후에도 둘째가라면 서러운 나들이 코스로 꼽혔다. 6·25 이후 안양에 주둔한 미군부대(속칭 ‘83부대’)는 안양풀 위쪽에 새로운 풀장을 조성했다. 안양보육원에 수용된 아동들을 위한 풀이었는데, 이 풀은 ‘대형 풀장’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대형 풀은 후일 안양의 유지
인 권용술 씨가 시내 노른자위 땅과 맞바꾸었다. 유원지 경영을 위해서가 아니라 근명여상의 재단이었던 안양보육원 측이 근명여상을 이전할 자리를 인수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그 이후 대형 풀장 위로 두 개의 풀이 더 들어섰다. 바로 위쪽 풀은 ‘맘모스 풀장’이라고 불렸는데, 장석재 현 안양문화원장의 부친인 장배근 씨 소유였다. 더 위에 조성된 풀은 ‘만안각 풀장’이라고 불렸다.(김종수 안양문화원 감사의 증언)
1980년대 들어 ‘만안각 풀장’ 근처에 인공 풀이 하나 더 생기기는 했다. 새로 들어선 블루몬테 호텔이 구내에 작은 풀장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것까지 치면 안양유원지에는 모두 6개의 풀장이 있었던 셈이다. 그러나 1990년대 말 안양시가 이들 풀장을 모두 인수하고 예술공원으로 꾸미면서 호텔 풀장을 제외한 다섯 개의 인공풀은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이처럼 계곡을 막은 인공풀이 계속 늘어나던 1969년 안양유원지는 ‘국민관광지’로 지정되었다. 계곡을 따라 맑고 푸르른 냇물이 우거진 수림과 어우러져 있어 언제든 편하게 찾을 수 있는 수도권의 휴식처로 사랑받았던 안양유원지는 이로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 전성기를 구가하게 된다. 김종수 씨에 따르면 안양유원지는 “한창때 한여름에는 서울 남대문보다 인파가 붐볐다.”고 기억한다. 한창 산업화가 진행되던 60~70년대에도 여름철 당일치기 물놀이 코스로 안양유원지만 한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비록 하루지만 기차를 타고 서울을 벗어날 수 있다는 해방감에 더해 더없이 차고 맑은 물에 몸을 담그고 놀 수 있는 경치 좋은 곳으로 이보다 더 좋은 장소를 찾기도 어려웠다.
안양역에서 안양유원지까지 거리는 약 3㎞. 따라서 일제강점기에도 유원지 입구(현재의 지하도 자리)에는 안양 풀장 간이역이 만들어질 정도였다. 해방 후에도 행락철이면 이곳 간이역에 기차가 섰고, 역에서 풀장까지는 임시버스가 운행되었다고 한다. 그 길의 양옆으로는 저 꼭대기 만안각 풀장을 지나서까지 노점상과 간이 상점이 줄줄이 늘어서 있었다.
안양을 먹여 살리던 유원지
“50~60년대에는 안양유원지가 안양 사람들을 먹여 살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루에 2만 명씩이나 다녀가는 명소였으니까요. 장사를 하려는 사람들은 아예 봄에 이곳 석수동 사람들에게서 점포 자리를 세 얻었지요.” 김종수 감사는 자신이 국민학교에 다녔던 1950년대에는 마을별로 아이들이 몰려와서 계곡에 흘러내린 토사와 돌덩이를 치웠다고 한다. 당시 김 감사의 집은 안양역 근처였는데, 누가 시키지 않아도 “안양사람들을 먹여 살리는” 안양유원지를 정비해야 한다는 마음에서 아이들까지 자진해서 양은도시락을 싸서 정비작업에 나섰다는 것이다.
“당시 안양 아이들은 자부심이 대단했지요. 서울 애들이 아랫지방으로 내려가려면 안양에 절을 하고 가야 했고, 또 지방 아이들이 서울로 가려면 안양에 절을 하고 가야 한다는 우스갯말이 있었지요.”
한 가지 흠은 계곡물을 내려보내는 관악산이나 삼성산이 돌산이어서 수량이 일정치 않다는 점이다. 비가 오면 계곡물이 크게 불어났다가 1주일이면 말라버린다. 풀장이 여러 개 생긴 이유도 그 때문이다. 또 장마가 오래 계속되는 해엔 여름 장사는 끝이었다. 계곡물이 너무 차서 8월 중순이면 더는 물에 들어가기 힘들었다. 그러나 봄가을로도 안양유원지를 찾는 인파는 꽤 있었다. 왜냐하면 안양의 명물 딸기와 포도 덕분이었다.
“안양 포도는 진짜 입안에서 살살 녹습니다. 어른들께 들은 얘기인데, 안양은 토질이나 물이 포도재배에 딱 알맞다고 하더군요.” 그 안양 포도를 길러내는 포도밭이 유원지 앞으로 계속 이어져 있었다고 한다. 딸기와 포도는 서울 사람들을 봄가을로 안양까지 불러낸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였다.
안양유원지가 입장료를 받기 시작한 것은 1970년 들어서였다. 1969년 국민 관광지로 지정되고, 이듬해 관광협회 안양유원지 지부가 결성되면서 입장료를 받았다. 명목은 청소비와 자릿세. “1인당 입장료는 담배 한 갑 값 정도였습니다.” 국민 관광지로 지정될 당시 안양유원지는 계곡 3㎞를 따라 호텔 3곳, 여관 12곳, 방갈로 19개 동, 풀장 6개소, 유기장 14개소, 카바레 2개소, 식당 17곳, 사격장 1개소를 갖추고 있었다. 1973년 통계에 따르면 한 해 동안 관광객이 120만 명 다녀갔고, 원화 소득이 2억 원, 외화소득이 1만5,000달러에 이르렀다.
그러나 1980년대 들어서는 양상이 사뭇 달라졌다. 유원지 상권을 둘러싸고 ‘깡패’가 동원될 정도였다.
“엉덩이만 붙였다 하면 돈 내라는 풍조가 생겼지요. 그 이전에는 그런 일이 없었어요. 바가지 상혼도 아마 그때부터 시작되었을겁니다.” 거기다 1977년 안양을 휩쓴 대홍수로 계곡은 엉망이 되었다. 정비를 하기는 했으나 다섯 개의 풀을 운영하기에는 수량과 수질이 따라주지 않았다. 풀장들은 수질을 유지하기 위해 소독약을 점점 많이 쓰게 되었다. 바가지가 갈수록 극성을 부리는 데다 수질 역시 계속 나빠지면서 안양유원지의 이미지는 쇠퇴하기 시작했다.
더욱이 8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수도권에 가볼 만한 행락지가 늘어나고, 자동차 보급률이 높아지면서 더 이상 안양유원지는 수도권 최상의 나들이 코스가 아니었다. 깨끗한 물이 흘러넘쳐 안양의 수영선수를 배출하던 풀장을 찾는 발길은 눈에 띄게 줄었다. 길가에 빼곡히 들어서 정겨운 유원지 풍경을 연출했던 노점상과 식당은 ‘행락객들에게 한 푼이라도 더 뜯어내려는 야바위꾼과 바가지 상혼’에 잠식당해 버리고 말았다. 급기야 안양유원지는 1984년 11월 국민관광지 지정이 취소되었다. 한때 안양을 먹여 살리던 안양유원지의 옛 명성을 되찾으려는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유원지를 활성화하는 방안으로 유원지 내에 ‘미니 민속촌’을 만들자는 의견이 대두되었다. 모두들 좋다고 손뼉을 쳤지만 정작 실행되지는 못했다. 이곳 주민들이나 상인들이나 남이 땅을 내놓는 것은 바랐지만, 자기 땅을 내놓아 ‘미니 민속촌’을 만들 생각은 없었기 때문이다.
유원지에서 예술공원으로
안양시는 1999년부터 안양유원지를 현대적으로 개발하는 사업에 착수했다. 그 ㅠ결과 2005년 ‘제1회 안양 공공 예술 프로젝트’의 개막식을 개최하고 유원지의 명칭을 안양예술공원으로 바꾸었다. 안양 공공 예술 프로젝트는 ‘Anyang Public
Art Project’의 머리글자를 따 ‘APAP’라고 약칭한다. ‘APAP 2005’에는 국내외 작가 52명이 참여하여 계곡을 따라 조형미와 개성이 넘치는 작품을 설치하였다. 안양예술공원 홈페이지의 설명을 그대로 옮겨 본다.
안양예술공원은 수도권의 대표적 휴양지로서의 명성뿐만 아니라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간직하고 있는 장소이다. 신라와 고려 시대의 불교 유적들, 일제의 흔적과 미군의 주둔, 이데올로기의 상흔과 새로운 문화적 욕구가 그것이다. APAP 2005는 이러한 흥미로운 안양예술공원의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배경과 국내외 예술가 건축가 디자이너의 상상력이 결합한 공공예술 프로젝트이다. 다종다양한 안양예술공원의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배경이 만들어 내는 불협화음들 속에서 ‘역동적 균형’ 찾기를 시도했던 APAP 2005는 전시관, 전망대, 각종 쉼터들, 안양예술공원의 기억에 관한 작품들, 다양한 용도로 사
용될 수 있는 파빌리온 등으로 구성되었다. 안양예술공원을 둘러싼 자연과 인간, 개발과 보존, 과거와 현재 사이에서 예술이 찾아낸 균형인 APAP2005는 안양예술공원을 방문한 관람객들에게 흥미로운 텍스트로 읽혀질것이다.
현재 안양예술공원은 만안각 풀장이 있었던 더 위쪽 서울대 수목원 입구까지만 차가 들어간다. 이곳 계곡의 수량을 조절하기 위해 수목원 안에 저수지를 만들었다고 한다. 수목원 앞에서부터 개울은 굽이를 이루며 내려온다. 구불구불한 하천을 따라 APAP 프로젝트의 결과인 조형물이 곳곳에 서 있는데, 그 사이 사이 1970~80년대 유원지 상가를 연상시키는 점포와 말끔하게 새단장한 커피숍이 공존한다. 위의 인용문 그대로 비동시적인 것들이 동시적으로 병존하면서 여러 시대가 한 공간에 공존하는 느낌을 자아낸다.
“안양유원지에는 6·25 직후부터 영업을 했던 곳이 딱 두 곳 남아 있습니다. 꼭대기 자연식당과 유원지 입구 쪽 백운여관이지요.” 자연식당은 주차장 근처여서 비교적 찾기 쉽다. 그 아래로 내려와 옛 풀장의 자취를 보여주는 곳이 ‘만안각 풀장’ 자리로 추정된다. 더 내려와 삼성3교라는 다리를 지나면 ‘안양정’이라는 정자가 보이는데 이곳 앞쪽이 ‘맘모스 풀장’ 자리인 듯하다. 그 하류에 ‘워터 파크’라는 레포츠 시설 건물이 있고, 그 앞이 ‘대형 풀장’ 자리로 짐작된다. 더 입구 쪽으로 내려오면 백운여관이라는 오래된 여관 건물 앞에 예전 풀장이 있었던 자리로 짐작되는 곳이 있는데, 여기가 일본인이 처음으로 만들었던 풀장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안양시가 계곡을 정비하면서 이들 풀을 모두 없앴기 때문에 정확한 자리를 찾기는 어렵다.
“우리 안양사람들, 특히 저 같은 세대 입장에서는 예전과 같은 자연풀장을 하나 만들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김종수 감사의 지적은 새겨들을 만 하다고 판단된다. 한때 산업화 시대 수도권의 일등 피서지로서 안양을 먹여 살렸던 안양유원지 시절을 기억하기에는 그보다 더 좋은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다. 안양 사람들로 하여금 안양의 근현대를 살아내게 한 장소의 상징성을 살리려면 역시 풀장을 다시 만들어야 제격 아니겠는가.
| 도움말 주신 분 |
박준호 안양문화원 사무국장
김종수 안양문화원 감사
| 참고자료 |
안양시사편찬위원회, 『안양시사』, 2008
경기도, 『경기도 근현대문화유산 조사 및 목록화 보고서』, 2004
http://apap.anyang.go.kr 안양예술공원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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