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문화재단/ 경기그레이트북스 20
경기도 근현대 생활문화 III
양훈도
백운저수지 답사일 : 2009년 7월 17일
평촌 들판 젖줄이었던 저수지
의왕~과천 고속도로에서 언뜻언뜻 내려다보이는 백운호수는 아름답다. 여름에는 푸른 물살을 가르는 모터보트가 시원해 보이고, 겨울에는 호수 얼음을 지치는 광경이 흐뭇해 보인다. 호수를 둘러싼 청계산과 백운산 줄기의 숲은 계절마다 달라지는 색감을 호수 수면 위에 드리운다. 이렇듯 의왕을 대표하는 랜드마크이자 가볼 만한 곳 첫손에 꼽히는 백운호수는 원래 농업용 저수지였다.
백운저수지 축조가 시작된 해는 1951년이다. 그해 9월 1일 서쪽 산자락에서 흙을 퍼다가 제방을 쌓는 공사가 시작되었다. <의왕시사> 기록에 따르면 원래 이곳에 저수지를 만든다는 계획은 일제강점기부터 있었다. 근처 하천을 막아 고질적인 한해 旱害를 막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공사가 강행된 점으로 미루어 사정이 꽤나 급박했던 듯하다.
헌데, 백운저수지 축조는 근동의 한해 방지와 농용수 공급을 목적으로 하지 않았다. 지금은 아파트 숲으로 변한 평촌 일대 드넓은 벌판에 물을 대기 위한 공사였다. 당시 학의리 일대에도 가뭄과 홍수가 번갈아 찾아들었지만, 증산이 최대 목표였던 시절이므로 평촌이 우선이었다. 오히려 학의리에 있던 옥답일부는 새로이 생긴 저수지로 인해 수몰되어 버렸다.
이종훈 의왕문화원장은당시를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내가 초등학교 들어가던 해에 저수지 공사가 시작됐어요. 우리 집은 저수지 남쪽 끝에 있었지. 거기서 포일동 덕장초등학교를 다녔는데, 처음에는 저수지 자리를 가로질러 가는 길이 있었어요. 그런데, 저수지공사가 시작되면서 빙 돌아다녀야 했단 말이야. 저수지가 완공된 게 1956년 12월 25일이거든. 그러니까 초등학교 다니는 내내 먼 길을 다니느라 고생을 했어. 그래서 공사기간을 잘 기억하고 있지요.”
이 원장이 살던 동네는 의일 마을(오린계마을)이다. 의일 마을은 법정동으로는 학의2동에 속하고, 행정동으로는 청계동이다. 덕장초등학교 역시 행정동으로는 같은 청계동이지만 법정동으로는 포일동에 있다. 의일 마을에서 덕장초등학교까지는 3㎞가 넘는다. 현재 잘 닦인 호숫가 도로를 따라가면 금세 갈 수 있지만, 길이 험했던 당시 사정을 고려하면 험한 길을 돌아 십리 가량 걸어 다녔던 셈이다.
이 원장의 증언은 저수지의 완공 연도와 관련해서도 중요하다. ‘백운호수 홈페이지’(http://www.baekunhosu.co.kr, 검색일 2009년 7월20일)에 보면 “의왕시 학의동에 있는 백운호수는 1953년에 준공한 인공호수이며,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북
동쪽의 청계산과 남동쪽의 백운산, 그리고 서쪽의 모락산이 만나는 지점”에 있다고 돼 있다. 뒤 설명은 맞으나 준공년도를 1953년이라고 잘못 적어 놓았다.
그 때문인지 일부 기록 역시 백운저수지 완공을 1953년이라고 전한다. 하지만 이 원장 증언이 맞다. 증거가 있다. 흥안농지개량조합이 1970년 8월 30일 건립한 ‘백운호수 설립기념비’를 보면, 준공연원일이 분명 1956년 12월 25일이다.
이 기념비는 저수지 제방 서쪽 끝부분에 세워져 있다. 이 기념비 뒷면에 새겨진 내용에 따르면 공사비는 492만5,650원이며, 만수면적 33.4㏊, 평균수심 4.50M, 저수량 1,464.245M/T, 몽리 면적 350.0이다. 만수위가 되면 저수지 면적이 10만 평이 넘고, 몽리 면적이 1백만 평을 웃돈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 기념비의 전면은 제방 서쪽 끝에서 확인할 수 있지만, 뒷면 기록은 확인 불가능하다. 기념비가 잠가 놓은 울타리 안쪽에 있기 때문이다. 다행히 뒷면 내용이 <의왕시사>(2권 292쪽)에 기록되어 있다.)
백운저수지의 물은 주로 학의천 물을 가둔다. 학의천은 청계사천을 본류로, 한직골천, 학현천, 북골천, 바라천, 오린개천이 모여 이루어지는데, 이 가운데 한직골천을 제외한 나머지 네 하천이 백운호수로 흘러든다. 학의천은 안양 비산동에서 안양천 본류에 합류한다. 학의천은 안양천 연안의 핵심 평야인 평촌 충적층을 관통하기 때문에 농업용수로 중요한 하천이었다. (<의왕시사> 1권 22쪽)
오래도록 곤궁했던 저수지 주변의 삶
저수지 제방을 북쪽에 쌓은 까닭은 이 일대를 감싸 안을 듯 펼쳐진 청계산, 백운산, 모락산 자락이 제방 근처에서 가장 가깝게 만나기 때문이다.
“공사를 할당시 (저수지 둑의 동쪽인) 학현 서쪽 산자락에 철로를 놓았어요. 흙을 실어 나르는 갱차(광차)가 다니도록. 사람들이 산에서 흙을 퍼서 갱차에 담으면, 뚝 공사장으로 연결된 곳까지 갱차가 실어 날랐지요.” (이종훈 원장)
저수지가 완공되기는 했으나 인근 청계동 사람들 삶이 좋아진 것은 아니었다. 앞서 언급했듯이 저수지 물은 오로지 평촌의 논을 살리는데 있었기 때문이다. 학의리 사람들은 큰 저수지를 옆에 두고도 한해와 수해를 극심하게 겪었던 듯하다. 저수지가 생기고 20년이 넘은 1977년에 발간된 당시 면정 현황 기록은 이러하다.
“본면 학의2리는 농가 110호가 주농主農 미맥작 이외는 없는 영농방법으로, 발전되지 못하고 있으며, 토지는 사리질의 답과 임야의 반분이 전田이고 면적 70%가 산림으로 한해를 극심하게 받는, 이 지역 농민의 연소득은 50만 원 이하에 해당되는 빈곤한 촌락임.”(<의왕시사> 5권 48쪽에서 재인용.)
학의2리를 위해 따로 소류지를 만들어야 할 정도였다고 한다. 저수지 주변으로는 농로조차 제대로 확보되지 않았다. 백운저수지를 위해 농토와 길을 수몰시킨 후 주민들은 꼬불꼬불한 논밭 길로 다니는 형편이었다. 그나마 70년대초 새마을 가꾸기 사업의 일환으로 일부 농로가 포장된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내가 교육대학을 졸업하고 발령을 기다릴 때였으니까 1971년 초였어요. 초등학교 다닐 때도 개울 건너 험한 길로 다녔는데, 서울 가서 학교를 마치고 돌아왔는데도 그 모양이더란 말이야. 포일리 쪽으로 가려면 개울을 일곱 번이
나 건너야 했어. 자동차는커녕 우마차도 다니기 어려웠어요. 그래서 내가 어려운 일을 한번 해보자고 결심했지요.”
청년 이종훈은 ‘새마을 가꾸기 농로 확장사업 계획서’라는 걸 만들어 시흥군수를 찾아갔다. 군수는 “참 훌륭한 생각”이라며 상부에 건의해보겠다고 했다. 그의 건의가 받아들여져 경기도에서 밀가루 500포가 지원됐다. 밀가루는 공사에 동원되는 인력에게 지급하는 노임이자, 팔아서 철근 따위 자재를 사들이기위한 공사자금이었다. 시멘트는 도에서 지원해 주었다.
청년 이종훈은 마을 주민들을 설득했다고 한다. 길을 포장해야 마을이 발전한다며 반남 박 씨네 등 이곳 토박이 종중도 찾아다녔다. 그렇게 해서, 포크레인이 학의리에 처음 들어왔다. 그 결과 의일 마을에서 백운저수지를 따라 서쪽으로 다리 3개를 포함해 길이 약 2㎞, 폭 5m 농로를 놓을 수 있었다. “학의동에서는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이 길이 포장되면서 청계동 쪽으로 들어선 목장에 젖소를 실어들이고, 우유를 실어 나갈 수 있게 되었고, 화훼와 채소 운반 트럭이 들어올 수 있었다.
“장마철 전에 다리를 놓아야겠다고 공사를 서둘렀지요. 그런데 장마가 왔어요. 시멘트를 타설하기는 했는데, 양성은 안 되었지요. 어느 날 밤에 폭우가 쏟아지길래 나가보니 교각이 유실되고 있더라고. 그걸 맨몸으로 막으려다 다리에 상처를 입기도 했지요. 일을 할 때는 욕도 많이 먹었습니다. 다리 놓으면서 성토를 높게 한다고 일하는 청년들이 투덜대며 불평이 많았지요.”
그가 이룬 농로확장이 학의동을 엄청나게 살기 좋은 동네로 만들지는 못했지만, 그의 노력은 헛되지 않아, 80년대 들어 이 길이 아스팔트 포장되었다. 90년대 들어서는 오메기 쪽으로 가는 길도 뚫렸다. “일단 교사 발령이 난 뒤에는 전근에 전근을
거듭하느라 고향 일을 할 수 없었지요. 그래도 나중에 ‘선견지명이 있었다.’는 칭찬을 받았으니 됐습니다. ‘민간인이 놓은 다리 중에서는 ’속말다리‘(오린계 마을 안쪽에 놓은 다리)가 가장 멋지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지요.” 청년 이종훈은 교장이 되어서야 향리에 와서 오전초등학교 교장을 끝으로 정년퇴임했다.
그래도 백운저수지 주변의 삶은 80년대까지 곤궁했다. 더욱이 의왕 대부분이 그린벨트로 묶여 행위제한을 심하게 받았다. 1989년 의왕이 시로 승격했으나 개발은 서남쪽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백운저수지 주변이 그나마 탈바꿈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들어서다. 전부 논이었던 평촌이 아파트 숲으로 바뀌면서, 백운저수지는 원래 기능을 잃었다. 대신 백운호수라는 그럴듯한 이름을 얻었다.
1920년 일제가 화전火田을 금지하기 전까지는 화전민이 살았던 오지, 이후에는 담배농사와 나뭇짐 장사로 연명하던 마을. 학의동 일대 주민들은 1970년 대 초까지만 해도 소에 길마를 매거나 달구지에 땔나무를 싣고 안양, 영등포로 나가 팔던 기억을 갖고 있다. 그러나 백운저수지가 백운호수가 될 무렵부터 학의동은 달라졌다. 음식점과 카페가 호숫가에 줄줄이 들어섰다. ‘백운호수 홈페이지’에 등록된 업소만 53개에 이른다. 대부분이 소비와 유흥을 위한 업소다.
이보다 앞서 포일동은 평촌 못지않은 아파트 숲으로 변했다. 학의동 사람들의 수입은 대체로 늘었고, 생활도 편해졌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닐 듯하다. 학의동의 마을공동체는 빠르게 붕괴하여 가고 있다. 백운호수를 둘러싼 카페와 음식점들도 외지인 소유거나 그들이 경영하는 곳이 많다.
백운저수지가 학의동 사람들을 위한 저수지는 아니었듯, 백운호수 역시 학의동 사람들을 위한 호수는 아닌 듯하다. 이 부조화를 어떻게 바로잡을 것인가. 학의동 토박이들의 고민이다.
백운저수지 제방은 의왕~과천 고속도로와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가 엇갈리는 학의분기점 아래 지점쯤에 있다. 마치 백운호수 공영주차장 뒷담처럼 보인다. 제방의 길이는 253m, 폭은 7m쯤 된다. 공영주차장에서 올라가는 계단이 동쪽과 서쪽에 있다. 제방 서쪽에는 물넘이 둑이 있다. 수위가 높아지면 자연스럽게 물이 넘쳐 흐른다. 이 물은 평촌 방향으로 물길을 놓은 학의천으로 흘러내린다. 자료에 따르면 제방은 아래에 석축을 쌓고 그 위에 흙 제방을 쌓았다고 한다. 하지만 외양만으로는 석축과 흙 제방을 구분하기 어렵다.
물넘이 둑 위로는 철제 제방으로 통하는 철제 다리가 놓여 있다. 원래 있던 다리는 폭이 60~70㎝에 불과하나, 옆으로 1m 넘는 새 다리를 덧붙여 놓았다. 이 다리 건너 제방 위는 산책로로 꾸며져 있다. 왼편으로는 공영주차장이고,
오른편이 호수면이다. 제방과 호수 사이에는 철책을 설치해 출입을 막고 있다.
앞서 언급한 ‘백운저수지 건립기념비’가 그 안에 있다.
제방 동쪽 끝부분에는 수문을 조절하는 시설이 호수 안쪽으로 설치돼 있다. 하지만 현재 수문은 확인할 수 없다. 동쪽 끝에 화장실과 쉼터를 조성하면서 수문을 철거한 듯하다. 근처에 모터보트와 노 젓는 배를 대여하는 곳이 있다. 호수 주변에는 산책로와 자전거도로가 있지만, 호수를 일주할 수 있도록 설치되어 있지는 않다. 현재 호수를 관리하는 기관은 농업기반공사 수원지사다.
| 도움말 주신 분 |
이종훈 의왕문화원 원장
| 참고자료 |
의왕시·의왕문화원, 『의왕시사』, 2007
학의동교회, 『학의동교회 60년사』, 2008
의왕문화원, 『의왕 문화유적지를 찾아서』(영상자료), 2008
www.baekunhosu.co.kr (백운호수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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