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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안양에서 덕장골까지

안양똑딱이 2016. 6. 11. 20:29
[자료]안양에서 덕장골까지

[02/27 네이버블로그]귀천/귀향/귀인


도시가 농촌을 먹어버리는 모양을 표현하는 데 잠식(蠶食)이라는 말이 적절할 듯하다. 누에가 야금야금 뽕잎을 먹어가듯이 도시화(urbanization)가 이루어졌고, 우리는 알게 모르게 그 도시화의 파도에 잠겨버렸다. 시골에서 유소년기를 자란 나로서는 도시라는 괴물에게 모든 것을 다 빼앗긴 것 같은 박탈감을 늘 가지고 있다. 도시화가 진전되면서 어디 변화되지 않은 곳이 있으랴마는 지금 가보면 그야말로 알 수 없게 변화된 곳이 안양과 덕장골 사이이다. 안양은 하루에 몇 번씩 기차가 지나다니고, 플라타너스 가로수 사이로 차들이 왕래하던 지방의 소읍이었다. 삼막사 아래로 안양풀장이라는 유원지가 있었고, 근처에는 포도밭이 많았다. 안양을 산자수명한 곳으로 예찬한 사람도 있는 모양이나, 그렇게 빼어난 경관은 아니었다. 지금의 안양-덕장골 사이를 보면 그야말로 상전벽해이다.

안양은 주변의 농촌을 합병하면서, 또한 전체로 서울 메트로폴리스에 편입되어 이제 굳이 안양이라고 확인할 것도 없이 서울대도시권에 파묻혀 버린 모양이 되었다. 안양, 시흥, 영등포, 용산, 서울이랄 것도 없이 다 서울이 되어버렸다. 각자의 이름을 잃고 그냥 도시가 되어버렸다. 하물며 작은 골짜기 동네 덕장골만의 정체성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으며, 그 이름 부르기를 언제까지 고집할 수 있을 것인가. 덕장골에서 안양까지는 당시 어린 걸음으로 두 시간 이상 걸리던 거리였다. 안양장에 무엇인가를 팔러 가는 머슴의 지게꼬리를 붙잡고 따라간 적도 있었는데, 아마 세 시간은 걸려서 갔던 것 같다. 그 후에는 부림말까지 걸어가서 과천에서 나오는 버스를 이용하였고, 훨씬 후에 한직골까지 버스가 들어오게 되었다. 그것은 우리에게는 1899년 경인선 철도 개통만큼이나 큰 사건이었다. 판교로 넘어가는 하우고개 길이 개통되지 않아서 버스 노선도 안양-한직골 선이 유일한 것이었다. 신작로에서 뽀얀 흙먼지를 일으키며 달리는 버스의 모습은 자못 신기한 것이었으며, 그 당시 버스 기사는 남이 감히 넘보지 못하는 일을 하는 사람으로서 얼마나 존경스럽게 보였는지 모른다.

사십여 년 전 안양에는 안양역, 안양읍사무소, 안양경찰서, 시흥군청, 금성방직공장, 태평방직공장, 몇 개의 교회, 약방, 의원 등이 있었다. 당시 안양의 중심업무지구(CBD)는 읍사무소, 경찰서, 군청이 있었던 곳이었다. 지금 무슨 관광호텔인가가 들어선 자리인 듯하다. 당시에는 정오가 되면 읍사무소에서 사이렌이 울렸고, 전기는 저녁때가 되어서야 들어왔기 때문에 전등도 그 때나 켤 수 있었다. 고모님 댁이 그곳에 있어서 얼마 동안 거기서 생활한 적이 있었다. 근처에 치과, 이형래의원, 만춘관인가 중국집 등이 있었다. 안양역을 지나서 조금 서울 방향으로 가면 화단극장이 있었다. 당시 안양은 소읍이었다. 아침저녁으로 통근열차가 지나가면서 많은 학생들과 직장인들을 흡입했다가, 토해냈다가 하는 동네였다. 정기적으로 안양장이 열리기는 했었지만 그렇게 유명한 장은 아니었으며, 당시 그곳은 이미 상설시장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경수 구도로에서 철도 건널목을 건너 수프르지 개천 건너기 전까지가 시장이었다. 시장 끝 부근에는 소시장이 열리곤 하였는데, 시장이 서지 않는 때에는 소 말뚝만이 남아 있어서, 버려진 공동묘지처럼 보였었다. 우시장 뒷골목으로는 장국밥집, 막걸리집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시장 끝에 안양천이 흐른다. 다리를 건너면 수프르지라는 동네가 되었다. 지금 경수산업도로와 안양 과천 도로가 교차하는 사거리를 중심으로 한 동네이며, 현재는 비산동이라 부른다. 당시에는 그곳을 수프르지라 하였다. ‘수프르지’는 숲이 푸른 곳 정도의 뜻을 가진 지명인 듯한데 확실한 것은 아니다. 그곳의 옛 지명에 임곡(林谷)이 있는 것으로 보면, 그 말이 숲과 관련된 것으로 볼 수는 있을 것이다. 이 동네는 안양의 행랑채 정도의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작은 안양 정도의 마을이었다. 골짜기 안으로 제법 집들이 있었지만 큰 마을은 아니었다. 이곳 수프르지 끝에 산모퉁이가 있고, 그곳을 돌아 나가면 다음 산모퉁이까지 거의 곧은길로 한참을 걷게 되어 있었다. 그 사이에는 집들도 없었고, 왼쪽으로는 야산, 오른쪽으로는 밤나무가 군데군데 있고, 더 아래쪽에는 넓은 논이 있었다. 여기에서 안양 쪽을 바라보면 태평방직공장의 측면이 무슨 거대한 붉은 톱날처럼 보였고, 기적을 울리면서 안양역으로 들어가는 기차의 모습이 참으로 신기한 풍경이었다. 산모퉁이를 돌아들면 오른편 산을 끼고 운곡 마을이 있었으나 그 곳에 들어가 본 적은 없었고, 그 앞을 지나다니기만 하였었다.

운곡 앞 큰 길에서 벌판으로 난 길로 가면 논 가운데로 가게 되는데, 그 길은 뺏말 쪽으로 가는 지름길이어서 가끔 걸어가 보기도 하였다. 그 중간쯤에 보의 콘크리트 수문이 있었다. 넓은 벌판 가운데를 걷다 보면 종달새들이 높은 하늘에서 조무래기들 입짓으로 지지배배 하였다. 운곡에서 위로 약간 경사로 뻗은 길로 올라가면 구리고개가 된다. 덕장골에서 걸어서 구리고개 언덕 위에 서게 되면 안양이 그리 멀지 않았다는 생각에 후유 한숨을 내쉬던 곳이었다. 그곳에 방앗간이 있었다. 옛날 시골에서는 방앗간이 무슨 굉장한 곳처럼 생각되었었다. 별난 기계들이 돌아가고, 피대(벨트)가 오르내리고, 온통 느린 것뿐인 시골에서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이 있고, 조금 기다리면 하얀 밀가루가 쏟아지는 모습이 신기하기도 하였었다. 벌말(지금의 평촌)에도 방앗간이 있었는데, 밀을 빻기 위하여 그곳에 가시는 어머니를 따라 가서, 호기심을 가지고 구경하고 온 기억이 난다. 구리고개 오른쪽으로 (담배)가게가 있었는데, 그 가게 안채가 크고 안마당이 넓게 보이는 집이었다. 아마 형님 친구 분의 집이 아니었나 싶다.

구리고개를 넘으면 도회의 냄새는 거의 다 가시는 듯하였다. 고개를 내려가면 다리가 있었다. 다리를 건너서 조금 걸어가면 뺏말이다. 거기에는 내 친구 준기가 살고 있었는데, 그의 할아버지 가게가 지나는 길가에 있었다. 그곳에는 담배, 과자, 눈깔사탕, 비과, 꽈배기, 가끔 오징어, 소주 등이 있었다. 색소와 감미료만으로 된 사이비 오렌지 주스도 있었던 것 같다. 어릴 적에 여기까지 친구를 만나러 와서 친구 할아버지 가게에서 소주를 절도하여, 한밤중 길 가운데서 대취한 적이 있었다.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다가 어두워지는 것도 몰랐다 ... 취해 일어나 시내에 박힌 달을 밟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곳이 요즘엔 큰 아파트들이 들어서서 전혀 옛 모습을 가늠해 볼 수 없는 곳이 되어버렸다. 뺏말은 아마도 한자 지명으로 수촌(秀村)이 되겠다. 여러 마을 가운데서 무엇이 탁월한지 알 수 없으나, 빼어난 곳으로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지명에 반영된 것으로 보이는 동네였다.

뺏말을 지나면 말무데미(말무덤)였다. 비교적 큰 마을이었다. 한자로 마분동(馬墳洞)이라 하는 것을 보면 언젠가 말의 무덤이 있었던 곳이 아닌가 싶다. 하필이면 왜 거친 뜻의 말로 동네 이름을 지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작명 의도가 사실적이어서 오히려 좋게 여겨지기도 한다. 동네 이름이 그래서 그런지 이 마을 앞은 지나다니기가 망설여지던 곳이었다. 옛날에는 마을 앞에 동네마다 짓궂은 놈들이 있어서 지나가는 아이들에게 텃세를 부리면서 괴롭히곤 하였었다. ‘왜 쳐다보느냐’는 것이 시비의 실마리가 되었던 동네 골목대장들의 최전선이 말무데미 한길 가였던 것이다. 근처 길가에 공동묘지가 있었던 것 같다. 그곳은 성경에 나오는 갈릴리호수 북동쪽에 있었던 거라사와 비슷한 분위기의 동네였던 것 같다. 산 쪽으로 조금 걸어 올라가면 관양초등학교가 있었다.

다음 동네는 간뎃말(가운데말, 中村)이었다. 말무데미와 부림말 사이에 끼어있는 마을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약간 언덕 위로 들어서 있는 이 동네는 규모가 작았다. 미국 누님 시댁이 있었던 동네이다. 그냥 지나쳐도 되는 간이역 같은 동네, 과문불입해도 괜찮을 만한 곳이란 뜻인가. 그런데 동네 앞을 지나다 보면 동네의 대소를 막론하고, 어느 동네이건 동네가 풍기는 나름대로의 바람결이 있고, 바람결에 묻어오는 냄새가 있었다. 덕장골에서 안양에 이르는 한길 가에는 군데군데 마을들이 한 줄에 꿰이듯이 늘어서 있었으며, 그 마을들은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박목월/나그네)’처럼 그렇게 호사스럽지는 않지만, 제각기 독특한 사랑방 머슴 냄새와 같은 속내를 가지고 있었다. 굴뚝에서 나오는 저녁 연기도 모양이 다르고, 냄새가 서로 달랐었다. 밥 누른 내도 동네마다 달랐다. 궤지기 태우는 냄새도 동네마다 달랐다. 가을걷이를 태우는 냄새는 더욱 다양하였다. 별다른 냄새가 없이도 그 동네의 분위기가 냄새를 내고 있었다. 그것은 말하자면 지니어스 로사이(genius loci)의 몸내였다.

부림말에는 얽힌 사연과 이야기가 많다. 부림말은 안양이라는 대도회로 나가는 중간 기착지였다. 안양-과천 선에서 한직골 선이 분기하는 교통의 요충지가 부림말이었던 것이다. 전에는 버스가 안양-과천 사이만 왕래했기 때문에 부림말까지 걸어 나와서 버스를 이용하였었다. 버스정류소는 부림말 길가에 있는 대장간이 붙어있는 집 앞이었다. 겨울철이면 그 대장간 안에서 차를 기다리곤 했었다. 그 대장간의 녹슨 양철 칸막이의 틈새로 과천 쪽 찬우물에서 올라오는 버스 불빛을 기다리고 있었다. 가끔 그곳에서 낫이고, 호미를 단김에 쇠망치로 쳐서 만드는 일이 벌어졌다. 화덕과 풀무질 등이 참 신기한 것들이었다. 그 대장간 집 어머니는 왜 그러했는지 자식들에게 모진 욕설을 퍼부었던 기억이 난다. ‘오라질년, 육실(시)할 년, 엠병(염병)할 놈’ 등. 그 대장간 뒷길로 들어가면 부림교회가 있었다. 그 길가에는 코스모스가 만발했었다. 그 교회는 나중에 동은교회로 개명하고, 길 건너 쪽으로 이전 개축하였다. 부림교회 주일학교를 다녔었다. 나무 종루에서 울려 퍼지던 교회 종소리가 멀리 덕장골까지 들렸었는데, 이제 어디서고 교회 종소리를 듣지 못하게 되었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요절을 외우는 일, 하기학교가 시작되면 교회 앞마당에 큰 물통을 놓고, 감미료(사카린, 아니면 당원이란 것)만을 탄 물을 한 컵씩 나눠주곤 했었는데, 그것이 무슨 별식이라도 되는 양 뙤약볕에 장사진으로 기다리곤 했었다. 성탄절 준비였던지 어느 날 밤 교회 앞 작은 사택에서 헌 오르간으로 찬양 연습을 할 때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방청객이었다. 미국간 누님, 옆집의 숙자 누님 등이 찬양대원이었고, 찬양대 지휘자는 키가 크고, 얼굴이 말처럼 길게 생긴 분이었는데, 지금 얼마나 큰 음악가가 되어 있는지 궁금하다.

부림말에서 과천 방향으로 낮은 언덕을 넘어서 내려가면 찬우물이란 동네이다. 그곳에는 당시 배밭이 있었고, 그것이 최근까지도 있었는데, 지금은 어찌 되었는지 모르겠다. 찬우물 안쪽으로 들어가면 갈현리 작은 동네가 있다. 그곳에 내 친구 오만영의 외딴 집이 있었고, 그곳에서 위로 조금 걸어가면 내 작은 어머니 친정 동네인 제비울이 있었다. 제비울에서 두 고개를 넘으면 바위고개, 집너머 그리고 덕장골이 된다. 부림말 가지 길에서 오른쪽 방향으로 걸어가면 개울이 있었다. 당시에는 거기에 외나무다리가 있었다. 그 다리를 건너면 인덕원이다. 인덕원은 그 당시에도 사거리였다. 길섶에는 망초대가 바람에 흔들리고, 질경이가 발에 밟혀 납작하게 늘어 붙어있었던 소박한 시골 사거리였다.

인덕원에서 진터 쪽으로 가다보면 왼쪽 남향받이로 꽤 넓은 포도밭이 있었고, 그 주인집이 원두막 겸용으로 지었었던지 좀 특이해 보이는 이층집이 밭 가운데 있었다. 당시에는 이층집이란 게 없었으니까. 그곳에 박새기로 넘어가는 오솔길이 있었다. 그 반대편 길 건너로는 참나무 숲이 있었는데, 그곳에 후에 성림고등공민학교, 그것이 변하여 신성중ㆍ고등학교가 세워졌고, 나중에 그 학교는 안양시내로 이전하였으며, 지금 그곳은 아파트단지가 되어버렸다. 그 남쪽 개울 건너 쪽으로는 벌말이란 동네가 길게 뻗어 있었다. 그 동네를 포함하여 안양까지 이어진 벌 전체는 넓은 논 지대였는데, 나중에 평촌지구로 개발되어 상전벽해이다. 벌말이란 동네는 이방인의 동네처럼 생각되었었다. 주요 교통로에서 벗어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약간 비탈길로 걸어 내려가다가 왼편 샛길로 들어서면 오솔길이었는데, 거기를 진터라고 불렀다. 옛날에 진을 쳤던 곳이란 뜻이란다. 아무집도 없었다. 다만 그 위쪽으로 올라가면 큰 과수원이 있었고, 과수원 주인집인지 큰집과 그것에 딸린 작은 집이 있었다. 진터에서 덕장골에 이르는 길은 세 갈래 길이다. 하나는 개울을 따라 올라가 이미를 거쳐 작은 도랑을 건너서 바위고개를 넘어 내려가면 한 걸음으로 건너는 실개울이 있고, 그 실개울 골짜기 위에 나만이 아는 굵은 칡뿌리가 나오는 석벽이 있었다. 집너머 느티나무 모퉁이를 돌아들면 거기가 바로 덕장골이다. 바야흐로 거기가 바로 덕장골이다. 그렇게 덕장골은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다. 멀리까지 보이고, 이 사람 저 사람이 기웃거릴 수 있는 그렇게 헤픈 동네가 아니었다. 고즈넉이 자리 잡은 절간 같은 골 안이었다.

진터에서 논틀길을 건너 성고개 너머를 지나 병길네 뒷산을 넘어 새꼬지, 모텡이를 거쳐 향나무 모롱이를 돌아 덕장골로 올라가는 길도 있었다. 잘 다니지 않던 길이다. 새꼬지에는 다섯 채의 집이 있었다. 이 길로 가면 노자네 뒤꼍 길을 지나가게 되는데, 그럴 때면 엷은 석유 등잔불 빛이 문틈으로 새어나오고, 들창 안에서 두런두런 식구들의 말소리가 들리기도 하였었다. 또 다른 길은 성고개 너머에서 병길네 뒷산을 넘기 전 왼편 산 능선을 걸어서 바위고개를 거쳐 내려가는 길이었다. 그 산등성이는 저녁놀을 받으면 황적색 소잔등처럼 반짝였다. 그곳에는 작은 소나무들이 군데군데 있고, 곳곳에 갈대가 흔들렸다. 드문드문 오리나무가 서 있었다. 산등성이가 끝나는 곳에 바위고개가 있었다. 마지막 한 길은 한밤중에, 그것도 비 내리는 밤에 그곳을 걸으면 밤나무 터널 위에서 물 듣는 소리가 후드득이고, 지척이 어둠이었지만 나는 그 길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거리끼지 않고 앞으로 갈 수 있었다. 그 길은 성고개 너머에서 이미 맞은편에 이르는 길이었다. 거기서 우회전하면 바위고개로 올라가는 길이 된다. 올라가는 길 오른편 밭 가운데는 이름 모를 무덤이 하나 있어서 밤중에는 그곳을 지나기가 아주 무서웠다.

모든 길은 덕장골로 통했다. 모든 마음이 덕장골로 통했다. 덕장골은 아주 가까이 갈 때까지 전혀 보이지 않다가 갑자기 모양을 들어낸다. 술래잡기에서 술래를 찾아내듯 갑자기 앞에 다가선다. 그곳을 그리워하면서 오랫동안 걸으며, 생각하며, 마음 조리며 찾아왔는데 막상 만나서는 짐짓 아무 말이 없고, 오히려 고개를 돌려 못 본체 하는 듯했다. 덕장골은 그렇게 무던하고, 아무렇지도 않은 곳이었다. 그래서 더욱 아름다운 곳이었고, 더욱 그리운 곳이다.

對酒不覺暝(대주불각명) 落花盈我衣(낙화영아의)
醉起步溪月(취기보계월) 鳥還人亦稀(조환인역희)

李白「自遣」전문

2006-02-26 19:59: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