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08/13 군포시티뉴스]리포터 - 장병연
추억에나 남아 있음직한 오일장, 지금은 개발로 인해 수도권주변의 오일장이 성남의 모란 시장을 제외하고는 거의 사라졌지만, 우리 군포에도 인근 사람들을 불러 모아 신나게 장을 벌렸던 유명한 <군포장>이 있었다.
당시 군포장은 인근 충청도에까지 입소문이 흘러 장돌뱅이들과 장꾼들을 불러 모아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한다. 웬만한 장꾼들이라면 <군포장>을 모르는 사람들이 없을 정도였다고 하니 그 규모가 얼마나 컸던지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겠다.
어린 시절, 장날은 명절 다음으로 기다려지는 설렘이었다. 장에 가신 아버지의 손에 들려 있을 자반고등어와 총천연색이 어우러진 사탕, 그 사탕가운데 가장 인기가 있었던 것은 줄무늬가 들어간 왕눈깔사탕이었다. 입안에 넣으면 오랫동안 단맛을 즐길 수 있는 사탕은 어린 시절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최대의 기쁨이었고 즐거움이었다.
장터는 많은 이야기들을 생산해 내고 있었다. 고만고만한 이야기들이 상당부분 과장되거나 와전되기도 했는데 장돌뱅이와 과수댁의 눈 맞은 이야기가, 오랫동안 소문아닌 소문이 된 군포장 이야기는 어느 장터보다 더 구수했고 장터 국밥집에서 무럭무럭 피워 올리는 김보다 더 맛깔스러웠다.
인근 안양, 수원과 발안에서 모여든 장꾼들의 소란함과 대장간의 무쇠 치는 소리가 경쾌한 장터에는, 동동구리무와 참빗, 노리개등 없는 것이 없는 방물장수의 좌판, 그리고 갖은 묘기로 호객을 하고 있는 약장사들, 농산물을 팔러 나온 농민들과 사방에서 모여든 수집상들이 어울려 떠들썩한 분위기를 만들어 냈다. 이곳저곳에서 구수한 냄새 피워 내는 풍부한 먹거리도 군포장에서는 빠질 수 없는 풍경이었다.
장날은 농사일에 힘든 농민들의 잔치였고 축제마당이었다. 잠시 농사일로 분주했던 허리를 펴고 장터를 배회할 수 있는 유일한 오락이었다.
뚝배기에 넉넉한 인심과 함께 넘치도록 퍼 담아내던 장터 국밥집에는 장날만큼은 북적이는 장꾼들로 일손이 부족할 지경이었다. 마수거리로 장을 열었던 장꾼들이, 해거늘 파장 무렵 국밥집에서 기울이는 막걸리잔에 담아 내던 숱한 이야기들, 그날의 수입과 비례했던 막걸리 주전자와 장터 국밥,
이러한 장터이야기를 궁촌마을(지금의 군포1동)에 살고 있었던 소설가 이무영이 놓칠 리 없었다. 죽마지우이자 시인인 ‘이흡’을 따라 군포로 낙향했던 이무영은 1938년 동아 일보에 <군포장 깍두기>를 연재 하였다.
그 후, 이무영은 10여년간 군포에 거주하면서 농경생활에 깊은 참여를 하게 되고, 그 실천적인 체험을 바탕으로 <궁촌기><흙의 노예>등을 발표함으로서 농민문학가의 상징이 되었다. <상록수>의 작가 심훈과 더불어 농민 문학의 양대 산맥을 이룬 이무영의 눈에 비친 군포장은, 예사로움이 아니었다. 군포장에서 생산되는 이야기를 <군포장 깍두기>로 연재 하면서 장터의 애환과 당시 서민들의 생활상을 그려내고 있었던 것이다.
군포는, 그의 문학 활동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아울러 궁촌 마을(군포) 하면 이무영의 농민소설 요람지로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던 것이다.
조선시대, 안양의 호계3동 구 군포 지역에 군포장이 개설되었다. 수원과 안양, 남양, 과천에서 모여들 수 있는 길목에서 시작한 군포장은 숱한 이야깃거리를 생산 하면서 발전했고, 수많은 장꾼들의 기대를 불러 모았다.
군포장은, 오일장 단순히 그 자체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장날의 문화가 만들어내는 군포의 역사였고, 군포서민들의 삶이 닮긴 “삶의 현장”이요 “생활의 마당”이었다. 메스미디어가 발달되지 않는 당시에는 장돌뱅이들과 각지에서 모여든 장꾼들이야 말로 가장 큰 소식통 이였던 것이다.
인근에 경부선 철도가 놓여지고 시흥군 남면 당리에 경부선이 지나가면서 역사가 생기자 그 이름을 <군포장역>이라고 했다. 당시 군포장이 지역에 미친 영향이 얼마나 컸는지 역이름을 보아 짐작할 수 있다. 1938년 경부선 복선화가 되면서 군포장역은 군포역으로 이름을 바꾸게 되었고, 그 이 후, 지금의 군포시 지역이 군포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지만 번성하던 군포장은, 지역 개발과 더불어 차츰 쇠퇴하여 사라지게 되고, 기차역주변이 지역유통의 중심지로서 발 빠르게 자리매김 하기 시작했다. 그 흔적이 현재의 군포시장이다. 당시의 군포장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정도로 작은 규모가 되었지만 그나마 군포장의 명맥을 유지 하고 있으니 다행스러운 일이다.
지금은 대형 유통 마트들이 깔끔한 포장과 정찰제 판매로 소비자들을 부르고 있지만, 군포장의 넉넉한 인심이 그리울 때면 그 흔적이 남은 군포시장으로 달려간다. 시장 할머니의 미소도 덤으로 얻을 수 있고, 방앗간에서 흘러나오는 고소한 참기름 냄새도 덤으로 얻을 수 있어, 마치 군포장을 엿보는 듯하다.
우리에게는 귀중한 문화유산이 남겨져 있다. <군포장>도 우리가 지켜야 할 문화유산중 하나이다. 우리지역에 소중히 지키고 알려할 할 문화유산이 있다는 것은 우리의 자부심이요 자랑거리이기도 하다.
지금은 비록 이야기로 전해 오는 전설이 되었다 할지라도 그것을 발굴해내는 것, 또 한 우리가 해내야 할 몫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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