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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일제강점기 안양에는 비행기공장이 있었다

안양똑딱이 2016. 6. 11. 09:34

2005년 8월15일, 광복된지 60주년이 되는 날이다. 역사교과서 왜곡, 독도 영유권 주장, 친일파 후손의 땅 소송이 줄을 잇는 반면 친일파 명단이 속속 발표되며 안양지역 또한 친일 수탈의 아픔과 흔적들을 간직하고 있다. 역사에 담긴 기록들을 재조명한다.

최근 일제에게 비행기를 헌납한 친일 인사들과 단체들의 명단이 일부 공개된 가운데 일제 침략의 수단인 전투기를 제작해 제공하던 비행기 제작공장이 안양에 자리하고 있었으며 이곳에서 생산된 비행기가 친일파들에 의해 헌납까지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뿐만 아니라 지금은 체육공원으로 탈바꿈하기 위한 공사가 한창이지만 안양9동 채석장 역시 일제가 경부선 철도의 명학에서 평택까지 구간을 부설하며 자갈채취와 운반을 위해 1901년께 바위산을 온통 파헤치는 등 안양지역에는 수탈의 현장들이 자리하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이사장 조문기)는 중일전쟁이 시작된 1937년부터 해방까지 일제에게 비행기를 헌납한 친일인사 100여명과 친일단체들의 명단을 지난 12일 공개하며 "이들에 대한 연구는 계속 진행되고 있어 향후 명단과 단체들은 더 늘어날 수 있다"고 밝혔다.

오마이뉴스에 따르면 비행기 헌납자 명단에는 인촌 김성수의 동생 김연수 당시 경성방직 사장을 비롯한 기업가 ▲민영휘 휘문고 설립자 일가 ▲경남 진주의 정태석 등 대지주, 그리고 기독교와 불교계 등 종교 단체들도 포함돼 있다고 보도했다.

또한 이들 중 이들 중 김연수·박흥식·신용욱 등은 비행기를 헌납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직접 비행기 공장을 운영했다. 당시 경성방직 사장이었던 김연수는 조선항공공업회사를, 화신백화점을 운영한 박흥식은 조선비행기주식회사를 1944년에 설립 운영했다.

관련기사(오마이뉴스)

반민특위에 제1호로 검거된 '매판자본가'

[특별기획-미리보는 친일인명사전 9] 전 화신백화점 사장 박흥식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185005&CMPT_CD=SEA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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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ww.ohmynews.com

 

광복60년, 안양지역 사회에 미친 일제 '침탈'

특히 박흥식은 유통업체 화신의 총수로 1942년 일왕 히로히토를 만나 "대동아전쟁 완수에 전력을 바칠 것"을 맹세하는 등 뚜렷한 친일 족적을 남긴 인물로 지난 1938년 조선총독부의 지시로 1944년 안양에 조선비행기주식회사를 설립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인물로 보는 친일파 역사(역사문제연구소 지음.역사비평사)에 따르면 박흥식은 1944년 고이소 총독에 불려가서 조선인들이 명실공히 천황의 적자로서 황은을 입게되었으나 그 기념으로 전투비행기 공장을 세우라는 청탁을 받은 것으로 배경을 설명하고 있다.

이에 박흥식은 1944년 8월19일 자본금 5천만원(당시화폐)으로 1932년 안양에 세워진 조선직물주식회사를 접수해 조선비행기주식회사를 설립하였다. 당시 규모는 부지 3만평에 건평 1만평으로 타 항공기 제작소가 견주기 힘들 정도의 초대형 규모였다는 것이다.

조선비행기주식회사 설립에는 인근 토지를 몰수하는 등 총독부 힘을 빌려 접수해 비행기공장을 건설하였으며 생산시설은 조선군사령부 병참부의 중개로 관동군의 지원을 받았는데 공장 노무인력은 전적으로 당시 시흥군일대에서 차출된 징용자들이 대부분이다.

이 때는 태평양전쟁이 절정단계에 이르렀을 때임에도 일본의 항공전력 증대를 목적으로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 설립허가를 총독부와 일본내각에 제출하고 수차례 일본을 다녀온 끝에 설립허가를 받은후 10월2일 자신이 대표가 되어 주식을 공모해 설립한다.

조선비행기주식회사의 설립과정은 박흥식에 대한 반민특위 공소장에 소상히 기록되어 1944년 3월경 박흥식이 일본에 직접 가서 기술과 자재의 지원을 요청하고 중일전쟁 폭발일인 7월7일 항공제조사업 허가서 제출하는 등 전쟁 막바지에 군수품 생산을 꾀했다.

서울시가 기록한 서울6백년사의 '조선비행기공업'과 화신그룹사 등의 지난 기록들을 살펴보면 흔히 박흥식이 안양에 건설한 조선비행기주식회사에서는 전투비행기 시제품만 생산했을뿐 일제패망으로 비행기는 생산하지 못하고 그만둔 것으로만 알려져 있다.

그러나 반민특위의 조사내용에 따르면, 1945년 5월 당시 제1호기의 주익(主翼)·동체를 위시하여 대부분의 작업을 마치고 8월에 시험비행을 하였으며, 제2·3호기도 부분품 제작중에 있었으며 9월말 작업을 완료할 계획이었던 것으로 기록을 통해 드러났다.

또한 박흥식은 자신이 경영하던 광신상업학교를 조선비행기공업학교로 개편, 비행기 기술공을 양성하려 했던 사실도 조사과정을 통해 새로 밝혀지는 등 실제로 전쟁에 투입되지는 않았지만 안양에서의 비행기 양산체제 제조계획은 거의 완성단계었다는 것이다.

 


1968년도 금성방직(안양2동) 일대 항공사진

이같은 사실을 살펴볼 때 당시 조선비행기주식회사가 자리했던 위치는 현재의 안양시 안양2동 일대로 해방후 1948년 10월 금성방직이 인수하고 1967년 대한농산(대농)에 매도된 뒤, 1977년 한국토지금고에 의해 일반에 매각되어 주택단지로 변모하게 되었다.

특히 민족문제연구소가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비행기 헌납자 명단과 생산공장이 기록되어 경성, 경성제일, 조선경북, 경기시흥 등 행정구역의 이름이 새겨진 비행기들을 확인할 수 있음에서 안양에서도 비행기를 생산해 일부 헌납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일본은 태평양전쟁이 본격화되면서 육군 전투기를 '애국기', 해군 전투기를 '보국기'로 지칭하며 비행기 헌납 운동을 벌였다. 거대 부호 친일파들뿐 아니라 종교계와 한걸음 더 나아가 시도 및 학교별 모금운동을 전개하고 강제적인 모금운동까지 벌였다.

박흥식은 1949년 1월8일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가 일제하 매판자본가에 대한 공식 활동에 들어갔으나 유명무실해진 반민법 제4조 7항의 '비행기ㆍ병기ㆍ탄약 등 군수공장을 경영한' 죄로 이 법에 따른 최초의 구속자로 기록된 대표적 친일이다.

하지만 반민특위에 회부된 친일기업인들은 최종적으로 모두 무죄선고를 받고 풀려났다. 박흥식은 국회 프락치사건으로 검찰관이 바뀌는 우여곡절 끝에 공판에서 무죄판결이 내려졌다. 이와같이 친일행위 및 과거사 청산문제는 현재 미완의 과제로 남아있다.

'비행기 헌납' 친일파 100여명 명단을 공개한 조세열 민족문제연구소 사무총장은 "비행기 공장을 운영했다는 사실은 침략자에게 직접 무기를 전달한 행위에 해당된다"며 "해방이후 친일 청산이 제대로 이뤄졌다면 이들의 죄는 사형에 해당된다"고 밝혔다.

한편 조선비행기주식회사는 일제 패망이후 과거사 청산을 하지 못한 채 무죄판결을 받은 박흥식이 조선군사령부로부터 조선비행기에 투자한 금액과 격려금까지 받으면서 운영되다가 이후 금성방직을 설립한 김성곤에 의해 방직회사로 다시금 변모하게 된다.

한국 재벌형성사(이한구 지음. 비봉출판사)에 따르면 태평양 전쟁말기 일본정부는 연합군의 일본 폭격을 피하기 위해 일본내의 주요한 산업시설을 한국으로 피신시켰다. 이에 해방직후 안양역전에는 일본방적 소유의 방적기 2천추가 그대로 방치되고 있었다.

금성방직을 설립한 김성곤은 방치된 방적시설을 이용하여 공장을 설립하기로 결심하고 관할관서인 미 군정청과 교섭하여 안양에 소재한 조선직물주식회사(조선비행기주식회사)의 일부인 3천평을 임차받아 인견사 생산공장에 나서게 된다.(쌍용그룹 전사편)

김성곤은 기술자를 대동하고 안양역전에 나뒹굴고 있는 기계부품의 목록을 작성하여 미 군정청 관재처에 제출하여 사용 가능한 431대를 확보해 불하 받은 후 공장 귀퉁이에 설치하였으며 이는 금성방직의 시초이다. 불하금액은 당시화폐로 2천만원 정도였다.

하지만 6.25전쟁으로 금성방직이 전소되자 김성곤은 UNKRA원조자금을 확보하고 이를 이용하여 금성방직 공장 재건에 나섬으로 재벌로 부상하는 계기를 만들었으며 이는 1956년 5월15일 안양1동 현 진흥아파트에 자리한 태평방직을 인수하고 공장 확대에 나섰다.

태평방직은 1953년에 자본금 1억환으로 안양읍 안양리 97번지 일대에 설립된 삼흥방직이 전신으로 방기 1만추, 직기 50대를 구비하고 1954년 10월부터 생산을 시작하였으며 자금사정으로 금성방직에 인수되었다가 1967년 10월 금성방직과 함께 대농에 매각됐다.

2005-08-18 03:10: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