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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원식]역사와 함께 숨쉬고 있는 안양행궁(安養行宮)

안양똑딱이 2016. 6. 11. 07:59
[문원식]역사와 함께 숨쉬고 있는 안양행궁(安養行宮)

성결대학교 교수, 안양학연구소 소장


 

정조임금의 화산능행(花山陵幸)을 위해 삼성천에 만안교를 가설하기 1년전인 1794년, 안양리(安養里)에는 안양주필소(安養駐 所)가 당시의 경기감사 서 용보에 의해서 건립되었다.

원래 주필소란 임금이 쉬어가기 위한 용도로 마련된 건물로 왕의 숙박을 위해서 만들어진 행궁(行宮)과는 구별해야 하지만, 일반적으로 행궁이라고 혼용해서 부르고 있다.

이러한 연유로 해서 안양행궁(安養行宮)이라고 불려지게된 안양주필소가 원래 있던 자리는 안양1동 674-29번지인 지금의 아카데미극장 1층에 있는 강촌목장이라는 식당에서부터 그 뒤편 주차장 건물과 로얄호텔에 이르는 지역을 포함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극장 건물 우측 하단에 세워진 표석은 이 곳이 행궁지(行宮趾)임을 알리고 있다. 그러나 표석에는 안양행궁이 1795년경 건립된 것으로 연대를 잘못 기술하고 있으므로 바로잡아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안양행궁이 존재했던 사실은 시흥군 향토사료실의 이 한기 상임위원이 1987년 규장각에서 발견한 원행정례(園行定例)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원행정례는 정조의 능행이 규모가 커서 민폐가 심해지자 이러한 민폐를 줄이기 위해 정조 13년(1789) 비변사(備邊司)에 명해서 만들어졌는데, 이듬해 편찬을 끝내고 정조의 재가를 받아 완성되었다.

원행정례는 능행에 필요한 군사들의 배열, 여비, 복장, 도로와 교량의 가설, 척후, 복병, 행궁의 준비물, 정조를 수행하는 관리들의 총원과 그들을 따를 수 있는 종자의 수 및 마필의 두수에 이르기까지 세세하게 규정하고 있다. 원행정례야말로 능행을 위한 교범이었던 것이다.

또한 안양행궁을 안양주필소라 칭하고, 비치물의 항목과 양(量)을 정해 놓고, 그 준비는 경기감영에서 할 것을 규정하고 있다. 원행정례에 의하면 안양주필소는 대청과 방의 비품 7종, 종이와 기름을 합쳐서 7종, 방석 4종을 합쳐 도합 3개 항목 16종의 비품을 항시 비치할 것을 예시하고 있다.

그러나 정조임금의 숙박지인 시흥행궁의 비치품목을 보면 대청과 방의 비품 34종, 종이와 기름 16종, 등촉 14종, 방석 10종 등 도합 10개 항목 111종의 배설물을 비치하고, 매 7년 혹은 10년마다 교체할 것을 명하고 있다.

이와 같은 비치품목의 가짓수와 양으로 비교해보면 행궁과 주필소 사이의 용도와 규모 및 품격의 차이를 자연스럽게 짐작할 수 있다.


정조임금이 안양행궁에서 쉬어간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구 경찰서 뒤 동아아파트 자리에서 행렬을 멈추고 모친 혜경궁 홍씨에게 미음과 다과를 대접한 기록은 나타난다.

또 이 곳은 수리산 끝자락으로 예로부터 밤나무 숲이 무성했던 곳으로 평촌들과 관악산이 잘 보이는 풍광이 좋은 곳이다. 이러한 연유로 정조임금은 능행과 환궁 시 이 곳에서 쉬어 간 기록을 남긴 것으로 생각되며, 마을이름도 임금이 쉬어갔다고 해서 주접동(住接洞)이 되었다.

일제시대까지 현재 안양 6, 7, 8동에 이르는 주접동 일대는 밤나무 숲으로 덮여 있었으며, 약 80여 호에 이르는 집집마다 살구나무를 많이 키워 살구 수확 철에는 항상 많은 수집상들이 몰려들었다고 이 마을 태생의 정 봉수 옹은 증언하고 있다.

그러나 '안양시 지명유래집' 중 주접동 항에서 당시 이 곳에 정자를 건립하였다는 기록을 한 것에 대하여는 어린 시절부터 들은 바 없다면서 부정적인 견해를 보였다.

어쨌든 안양행궁은 정조 사후 행궁으로서의 의미는 상실되고, 민간인 소유로 된 후 1986년에는 수어장이란 여관으로 신축되었다가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예전에는 이 곳에 큰집이 있었다 하여 대궐 터라 불렀고, 그 집을 대궐이라 칭했다 하며 또 그 주변을 파면 행궁을 지을 때 사용했던 장대석, 지대석 등이 흔하게 출토되었다 한다.

이러한 역사적 문화재에 대하여 우리가 불과 20년만 일찍 식견을 가지고 있었던들 안양은 또 다른 커다란 문화유산을 하나쯤 가질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해 본다면 참으로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안양행궁이 존재했던 위치를 알리는 표석조차 영업에 지장 된다고 거추장스러워 하는 오늘 우리들의 자화상은 역사와 문화에 대해서 무관심한 우리 삶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참고문헌 : 이한기, 안양시 지명유래집, 새안양회, 1996.
안양시, 안양시지, 1992.
시흥시, 시흥군지, 1988.
원행정례 외 다수
자료제공 : 김지석, 안양시 향토사료실 상임위원
대 담 : 정봉수(74세, 1927년 생), 전 안양상공회의소 사무국장.

2003-06-07 13:04: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