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지역얘기/담론

[박철하]1919년 3월 31일 의왕면사무소앞 독립만세운동

안양똑딱이 2019. 3. 28. 19:32

한적한 농촌마을에 일제에 대한 저항의 기운이 돋다

 

의왕시는 대한제국 시기까지만 해도 광주군 의곡면과 왕륜면 지역으로 나뉘어 있었다. 일제는 1910년 강제로 한국을 식민지화하고 효율적으로 식민통치를 하기 위해 1914년 지방행정구역 통폐합을 단행하였다. 이때 조선총독부는 의곡면과 왕륜면을 하나로 통합하여 의왕면이라 하고 수원군에 편입시켰다. 당시 의왕지역은 지금의 부곡동(삼동, 이동), 고천동(왕곡동, 고천동), 오전동, 내손1.2동, 청계동(청계동, 학의동, 포일동) 등을 포함하였다.

고천에는 조선시대에 임금이 쉬어가던 사근(천)주정소가 있었다. 현종 때부터 그 기록이 나타나지만 가장 많이 이용했던 임금은 정조였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를 화산 현륭원에 모시고, 이어 수원화성과 화성행궁을 설치한 뒤 자주 왕래하게 되면서 주정소를 수리 확장하고 ‘사근행궁’이라 명명했다. 일제는 바로 이 사근행궁을 그대로 의왕면사무소로 이용하였다. 곧이어 면사무소 가까이에 경찰관주재소도 설치되었다. 고천 일대에는 소규모 장을 볼 수 있는 곳과 주막이 들어서고 의왕면의 읍내로서 모습을 갖춰갔다.

1910년대 의왕면에는 800여 호 안팎에 3,000여 명의 주민이 생활하고 있었다. 농업인구가 90% 이상 절대적으로 많았고 약간의 상업인구가 있었을 뿐이었다. 게다가 농업인구의 거의 대부분이 영세빈민으로 불안한 소작인의 지위에 처한 주민들이 많은 아주 궁벽한 농촌마을이었다. 학교도 없어서 인근의 과천으로 가야 했고, 일본인은 한 두 가구 거주했을 뿐 조선인과 일본인의 차별을 크게 경험하지도 않았다. 그저 전통적인 마을공동체를 유지하며 평범한 농민들의 삶터에 불과한 곳이었다.

하지만 1900년대 초 경부선 철도가 설치되면서 철도용지로 수용당한 논밭 및 임야의 주인과 소작인들은 불만이 많았다. 조상의 묘역이 훼손된 어느 가족은 저항하다가 ‘반일분자’로 몰리며 혼쭐이 나기도 했다. 1907년 일제에 의해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된 이후 청계산일대에는 의병들의 활동이 활발했다. 당시 광주군 학현(현 의왕시 청계동)에 거주하던 박성삼은 윤치장 의병부대의 일원으로 청계산 일대에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는 한편, 군량미와 군자금모집에 참여하다가 체포되기도 하였다.

특히 청계지역에는 마을마다 작은 서당을 중심으로 한학을 배우는 학동들이 적지 않았고, 19세기 후반 이후 하우현성당의 교세가 확장되면서 성당에서 운영하는 근대적인 학교인 경애강습소가 있어서 그곳에서 신학문을 습득하고 식민지 조선의 현실에 눈을 뜬 젊은이들이 있었다.

 

청계마을 청년들이 모여 독립만세운동을 준비하다

 

1919년 3월 1일, 서울과 평양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다. 3월 5일에는 서울지역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남대문역 앞에서 종로에 이르는 곳까지 행진하며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이 독립만세운동에는 의왕면 청계리 출신으로 배재고등보통학교 4학년에 재학 중이던 성주복도 참여했다. 성주복(成周復, 1894~1971)은 당일 아침 남대문 밖에서 고향에서 온 동생 성주관을 만나 자신이 가지고 있던 학교 도구와 양복을 동생에게 건네주고, 두루마기를 건네받아 갈아입고 만세운동 시위 대열에 합류했다.

서울에서 독립만세운동 소식은 성주복의 동생을 통해 청계 마을에 있는 친구 이복영((李復英, 1893~1938. 호적 이봉근)에게 전달되었다. 훗날 이복영의 사촌 동생 이철영의 증언에 따르면, 이복영은 뜻을 같이 하는 동지들과 사전에 의왕지역에서 만세시위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먼저 청계지역을 중심으로 인근 4개리(포일리, 내손리, 청계리, 학의리)의 책임자를 정하였다. 1주일 동안 비밀리에 만세시위에 필요한 태극기를 제작했다. 또한 집집마다 한 사람씩 반드시 참석하도록 하고, ‘숲밖에’(현 백운호수 주차장 지역) 집결하기로 했다. 이러한 계획은 마을 구장(이장)에게 통문으로 전달되었고, 그의 책임 아래 의무적으로 한 집마다 한 사람씩 참가하도록 했다. 만약 이 기밀을 누설하거나 만세운동에 불참하는 가정에 대해서는 만세시위 후 방화한다고 경고까지 했다고 한다. 이러한 사전계획과 준비는 고개 너머 고천리와 오전리, 삼리에도 전달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3월 31일 의왕면사무소앞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다

3월 중순 이후 독립만세운동은 전국적으로 급속히 확산되었다. 평화적인 만세시위는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면서 폭력화 양상을 띠기 시작했다. 3월 27~28일 인근지역에서는 시위대가 군수를 협박하는가 하면 면장을 구타하고 헌병의 총기를 빼앗고, 면사무소를 습격하기도 했다. 안양과 군포, 과천에서도 300명에서 1천명이 넘는 시위대의 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군포장역 경찰관주재소 부근에서는 3월 31일 2,000여 명의 군중이 만세시위를 벌였다.

1919년 3월 31일 밤 의왕지역에서도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청계마을 주민들은 3월 31일 저녁 무렵 ‘숲밖에’ 모여 시위대를 형성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시위대는 300~350여 명에 달했고, 그들의 손에는 태극기와 횃불이 들려 있었다. 시위대는 오전리 고개를 넘어 오매기 마을과 전주나미 마을을 지나고, 고천리 사그내마을에 있는 경찰관주재소를 거쳐 의왕면사무소로 나아갔다. 일부는 지지대고개의 산봉우리에 올라 횃불을 높이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의왕면사무소에 모인 사람들은 대부분 농민인 마을주민들이었으며, 기독교인과 천도교인들도 참여했다. 군중 수는 800여 명에 달했다. 인근의 왕곡리와 이리, 삼리지역의 주민들도 함께 했다.

시위대는 준비해온 태극기를 흔들고 횃불을 높이 들어 의왕면사무소와 경찰관주재소를 오가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의왕면사무소앞 시위대에는 면장도 함께 했다. 시위대는 주재소로 달려갔다. 주재소에 있던 조선인 순사는 “저는 (총독부)에서 주는 제복을 입고 녹을 먹는 관리이므로 내몸은 여러분들과 함께 할 수 없으나 마음은 함께 합니다. 계속해서 만세를 부르세요. 그래서 우리가 독립을 쟁취하기를 고대합니다” 라며 시위대를 격려했다고 한다.

시위대의 만세시위가 계속되자 수원으로부터 일본 보병이 출동했다. 갑자기 나타난 세 명의 보병은 총을 쏘기 시작했고, 시위대 두 명이 부상을 입고 쓰러졌다. 피하던 동료 시위자들은 부상자를 부축하기 위해 되돌아왔다. 이들은 모두 현장에서 체포되어 포승줄에 묶여 수원경찰서로 압송되었다. 46명이었다. 체포된 시위대는 밤새워 조사를 받았다. 이들 가운데 41명은 4월 1일 태형 60~90대의 무자비한 폭력적 처벌을 받고 풀려났다. 부상자 두 명 가운데 한 명, 즉 청계리의 독립만세운동 지도자 이복영은 서울 세브란스 병원으로 후송되어 치료를 받았다.

 

3.1독립만세운동의 현장이 재개발로 사라질 위기에.....

 

1919년 3월 31일 의왕면사무소앞 독립만세운동은 다음과 같은 역사적 특징을 갖는다. 첫째 계획적이고 조직적으로 준비되어 실행되었다는 점, 둘째는 비밀 누설자 또는 불참자에 대한 시위조직자들의 강력한 통제 아래 진행되었다는 점, 셋째는 농민만이 아니라 기독교인과 천도교인들도 다수 참가하였다는 점, 넷째 순사와 면장도 함께 만세운동에 참여했다는 점, 다섯째는 면사무소와 경찰관주재소를 습격하는 폭력적 양상을 보이고 있는 점, 여섯째는 일본군의 무력적인 탄압과 경찰의 폭력적 고문이 자행되었다는 점 등이 확인된다.

이와 같은 의왕면사무소 앞 독립만세운동을 역사적으로 기리기 위해 의왕문화원은 2011년 독립만세운동 사실을 역사적으로 규명하고 2012년부터 매년 3.1절을 기해 기념행사를 진행해 오고 있다. 특히 2017년부터는 기념식 중에 중고등학생들로 구성된 연극반을 구성하여 의왕면사무소앞 독립만세운동을 주제로 한 연극을 공연하고 있다.

한편, 2013년부터 의왕시민사회단체들은 연합하여 3월 31일 저녁을 기해 독립만세 시위가 전개되었던 의왕면사무소터(현 고천동 소재 의왕시청 별관/사근행궁터)에서 독립만세운동 재현생사를 해오고 있다. 특히 3.1운동이 우리나라의 자주독립뿐만 아니라 평화와 민주주의 및 인권의 가치를 지켜내기 위한 혁명임을 인식하고 마을공동체, 장애인단체, 생활협동조합, 교육공동체, 노동조합 기타 시민사회단체가 각각 3.1운동을 기념하는 ‘선언서’를 낭독하고, 횃불과 태극기를 들고 1919년 만세시위대의 발자취를 따라 거리행진을 펼치고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의왕시의 독립만세운동 현장은 재개발사업으로 인해 사라질 위기에 놓여 있다. 의왕시는 3월 31일을 의왕시의 독립만세운동 기념일로 지정하고, 독립만세운동의 현장을 보존하고, 시위대가 행진하던 거리를 ‘만세거리’로 조성하기를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