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지역얘기/담론

[최병렬]옛 군포장터(안양 호계동)에 항일운동 표지석 설치해야(2019.04.15)

안양똑딱이 2019. 4. 16. 01:16

 

옛 군포장터(안양 호계동 구사거리)에 항일운동 표지석 설치해야 한다

 

100년전 1919년 안양에서도 만세운동이 전개된 것을 아시나요? 군포시가 군포장역을 중심으로 전개된 만세운동을 적극 소개하고 있으나 사실 이 만세운동은 당시 군포장이 자리했던 안양 호계동 호계구사거리에서 시작돼 경찰관주재소가 있던 군포역까지 행진하며 펼친 것으로 지금은 행정구역상 안양.군포.의왕으로 나뉘어 있지만 당시 시흥군 주민들이 함께 벌인 만세운동이라 할수 있다.

군포시와 국가보훈처 및 독립기념관, 국사편찬위원회의 자료에 의하면 1919년 3월 31일 열린 군포장(軍浦場, 5일장)에서는 독립을 열망하는 인근 지역(현재의 군포, 안양, 의왕) 거주민 2천여명이 모여 만세운동을 펼쳤다. 당시 만세운동 참여자들은 군포장(현 안양시 동안구 호계동 666번지/ 시흥군 서이면 호계리)에서 군포장역(전철 1호선 군포역/ 현 군포시 군포1동 750-8/ 시흥군 남면 당리) 앞의 일본 경찰관주재소로 행진했는데, 일제는 경찰 외에도 군 병력까지 동원해 총을 쏘는 등의 폭력으로 군중들을 해산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군포시는 조국독립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았던 분들의 애국심과 희생정신을 많은 이와 함께 기억하기 위해 2016년 5월 10일 군포역 광장에 ‘군포항일독립 만세운동기념탑’을 세웠다. 높이 11m의 기념탑은 3∙1 정신을 상징하는 3개의 기둥 위에 항일의 혼을 의미하는 불꽃을 두 손으로 감싸는 형상을 하고 있으며 탑의 양옆에는 독립운동에 참여한 시민들과 이들을 총으로 제압하려는 일본 경찰의 대조적인 모습이 조각돼 있다. 특히 3.1절 100주년을 맞는 오는 3월 30일에는 대규모 기념행사를 펼친다.

의왕시도 만세운동이 전개된 고천동에 표지판을 세우고 매년 만세운동 기념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반면 안양시는 호계동 구사거리 지역인 100년전 3월 30일 만세운동이 시작된 곳임에도 이를 알리는 만세운동 표지석이나 조형물은 커녕 이를 시민들에게 알리는 홍보도 전혀 없어 안양에서의 만세운동 연구와 이를 알리는 작업이 필요하다.

 

[20190401]군포장역 만세운동 100년 만에 다시 울리다
출처: https://ngoanyang.or.kr/4923 [안양지역시민연대/안양지역정보뱅크]

 

안양탐사대 150차 탐방(20190316)_만세운동지 안양 호계 구사거리
출처: https://ngoanyang.or.kr/4865 [안양지역시민연대/안양지역정보뱅크]

 

독립기념관 사이트에 기록된 군포장 http://sajeok.i815.or.kr/i815/view_region/1755

 

[자료]군포장의 변천과정 이야기 https://ngoanyang.or.kr/2383

 

군포장을 아시나요 https://ngoanyang.or.kr/2132

 

 

 

 

 

 

 

만세운동 시작된 군포장은 지금의 안양 호계동이다

 

안양시 지명유래』에 따르면, 군포장은 현재의 안양시 호계3동 구장터길 일원으로 호계동 삼신아파트와 진우아파트 지역에 인접한 구군포 사거리 부근이다. 이곳 구장터 부근 도로는 구군포길로 불리기도 하며, 옛 군포장이 위치하던 지역은 ‘구장터1로’에서 ‘구장터3로’까지의 도로 명칭을 지니고 있어 이곳이 장터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군포와 안양, 의왕의 경계점인 호계3거리 인근인 이곳은 한양-과천-인덕원-사그네(고천)-지지대고개 구간인 삼남길과 한양-금천-안양-사그네(고천)-지지대고개 구간인 시흥대로가 교차하던 수원과 안양, 안산, 과천의 길목으로 조선시대부터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 중반까지 안양.군포.의왕 일대에서 가장 규모가 컷던 장(5일장)이 섰으며 당시에는 상업적 요충지였다.

5일마다 개설되던 군포장은 처음에 군포천장(軍浦川場)이라 불리웠다. 1770년 편찬된『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에 ‘군포천장(軍浦川場)’이라 표기되어 있는데 군포천 옆에 장이 섰기 때문으로 보인다.

숙종25년(1699)에 간행된 [과천현 신수지읍지]와 [과천현지도]에 '군포천'이라 표기되어 있고, 철종12년(1861) 김정호 선생이 발간한 [대동여지도]에도 '군포천'이라 표기되어 있다.

군포장이 서던 곳(현 호계동, 구 군포사거리)은 시흥길과 삼남길의 갈림길이다. 또 안양천의 상류로 옛날부터 수운을 이용하는 군포 포구로서 널리 알려져 왔기에 한강에서 부터 물자운송이 용이했을 것으로 보인다.

군포장은 조선시대 지도에도 표기될 정도로 컸다. 과천시지를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흥선대원군(1820~1898)은 국방력의 강화를 위해 전국 군현과 군사기지(진보와 수영 및 병영), 역참 등의 지도와 지리지를 제작하여 올릴 것을 명령하였다. 이에 1872년 과천현에서 직접 그려 올린 [과천지도]를 보면 [해동지도]에는 표시되지 않았던 안양장과 군포장이 표시되어 있다. 그런데 그 표시 방법이 특이하다. 두 개의 장을 만안교에서 왼쪽 아래(남쪽)의 삼남대로와 연결된 도로가 관통하고 있는 모습으로 그린 것이다.

[임원십육지(林園十六志)](1827)에서도 군포장과 안양장이 있었음이 확인된다.

군포장이 서는 날은 이웃 안양장과 더불어 수차례 바뀌어 왔다. 조선시기에는 개시일이 3․8일로 나와 있는데 1905년 군포장이 되면서 1․6일로, 1923년에는 5․10일로, 1926년에는 2․7일로 나타나는 등 주변장의 영향에 따라 변화를 거듭한 것으로 보인다.

군포장은 충청도에까지 입소문이 흘러 장돌뱅이들과 장꾼들을 불러 모았다고 한다. 담배를 비롯하여 소금, 광목 등과 쌀, 콩, 조, 보리쌀 등 농산물이 주로 거래되었으며, 안양, 군포, 의왕, 과천 등은 물론 멀리는 용인, 남양, 판교 등지의 상인이 붐벼 성시를 이루었다. 군포장의 명물은 씨름과 정월 대보름에 개최되는 줄다리기로, 이때는 시장의 열기가 고조를 이뤘다고 한다.

활기 넘치는 군포장은 역 명칭에도 영향을 미친다. 광무4년(1900)에 경부선 철도를 가설하면서 군포장에서 다소 거리가 떨어진 군포 남면 당리에 역사를 짓고 역명을 군포장역(軍浦場驛)이라 했기 때문이다. 역사 설치 후 민가가 늘어나자 군포장(현 호계3동)을 구 군포라 했고 '당말'이라 부르던 '군포장역'(현 군포역) 인근을 신 군포로 부르기 시작하였다.

번창하던 군포장은 1925년 소위 을축년 대홍수로 맑은내가 범람하자 군포역 앞으로 이전하고 시장 명칭을 그대로 승계한다. 당시 안양 북쪽에 있던 안양장도 맑은내의 범람으로 피해를 입자 안양1동 소재 구시장(안양1동 진흥아파트앞)으로 장을 옮겼는데 상설시장으로 자리 잡으면서 명칭이 안양시장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특히 1938년 경부선 복선화가 되면서 기차역 주변이 지역유통의 중심지로 자리잡아 거주지로 커지면서 군포장역은 군포역으로 이름을 바꾸게 된다. 1960년대에 와서 5일장은 도시화와 함께 사라진다. 이미 그 자리는 상설시장이 자리잡았다. 처음 장이 서던 곳은 구군포 또는 구장터로 불리웠다.
군포장은 1930년대 말까지만 하더라도 활발하게 장이 섰다. 수원과 안양, 안산, 남양, 과천에서 모여들 수 있는 길목이었기에 숱한 이야깃 거리를 생산하면서 발전했고, 수많은 장꾼들의 기대를 불러 모았다. 웬만한 장꾼들이라면 <군포장>을 모르는 사람들이 없을 정도였다고 하니 그 규모가 얼마나 컸던지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겠다.

당시 군포장하면 소설가 이무영을 빼놓을 수 없다. 죽마지우이자 시인인 ‘이흡’을 따라 군포로 낙향했던 이무영의 눈에 비친 군포장은 예사로움이 아니었다. 그는 군포장으로 생산되는 이야기를 1938년 동아일보에 <군포장 깍두기>로 연재하면서 장터의 애환과 서민들의 생황상을 그려냈다. 그 후, 이무영은 10여년간 군포에 거주하면서 농경생활에 깊은 참여를 하게 되고, 그 실천적인 체험을 바탕으로 <궁촌기> <흙의 노예> 등을 발표함으로서 <상록수>의 작가 심훈과 더불어 농민 문학의 양대 산맥이라 불리울 정도로 군포는, 그의 문학 활동에 큰 영향을 끼쳤다. 아울러 궁촌 마을(군포) 하면 이무영의 농민소설 요람지로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군포장에서는 1919년 3월 31일 2천여명의 주민들이 모여 만세운동을 펼쳤다. 군포장터(현 안양시 동안구 호계동 666번지/ 시흥군 서이면 호계리)에 모인 주민들은 장터에서 만세를 부르면서 1.8km 떨어진 군포장역 경찰관주재소(현 군포시 군포1동 750-8/ 시흥군 남면 당리) 앞까지 행진하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당시 군포장 규모가 컷기에 시장을 중심으로 안양.의왕지역의 주민들까지 함께한 이 만세운동은 사전에 치밀한 계획하에 진행됐으며 매우 조직적으로 전개한 대대적인 시위운동이었는데 군포역 경찰관주재소의 일본 경찰은 이를 멈추기 위해 군대까지 불러들여 무차별적으로 총을 쏘며 강제 해산에 나선다.

 

 

 

 

 

 

 

 

경기도와 경기문화재단이 2018년 군포역앞에 설치한 항일운동유적지 표지판에는 “군포장 경찰주재소”라 명기돼 있다. 따라서 1919년 3월 31일 2천여명이 주민들이 모여 만세운동을 시작되어 군포장 만세운동의 근원지인 안양 호계동 구사거리에 “군포장 3.1운동 만세 시위지” 표지판이 설치되어야 한다.

 

 

군포역앞 만세운동 기념탑 건립 취지글에 “군포에서도 3월 31일 장날을 맞아 군포장(호계동)에 모인 2,000여명의 주민들이 1.8Km 떨어진 군포장 경찰관주재소(당동 750-8)까지 행진하며 만세를 불렀다”고 기록. 군포에서 본 관점이지만 그래도 군포장 만세운동 출발점이 안양 호계동임을 명기함.

 

 

 

군포역앞 항일운동 표지판의 내용을 보면 “군포장 경찰주재소 3.1운동 만세 시위지는 시훙군 남면 주민들과 수원군 의왕면 주민들이 연합하여 독립만세를 전개한 곳이다“고 적었다. 이는 당시 만세 운동 시작이자 출발점이었던 군포장(안양 호계동)에서의 만세운동 전개과정 등은 전혀 없이 군포역 상황만 나열한 군포시 관점에서 본 내용이다. 더욱이 일부 글이나 언론 기사를 보면 군포장 만세운동하면 마치 군포 만세운동으로 여기고 있다.
더 큰 문제는 대다수 시민들은 물론 행정을 담당하는 공무원들, 안양문화원 관계자들 조차 군포장이 안양 호계동이며, 군포장 만세운동이 안양에서 시작돼 군포역으로 전개된 사실 조차 모른다는 점이다.
따라서 3.1 독립만세 100주년을 맞이한 오늘 안양에서 일어난 만세운동과 안양 출신 항일운동, 독립운동가에 대한 연구와 고증을 통해 기록으로 남길 것은 명확하게 남기고, 표지석과 표지판을 세울 곳에는 세우고, 오류가 있어 수정해야 할 것은 정확하게 고치는 등의 과정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