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사진기록/동네탐사

[탐사65]안양 호계2동 호계초교 주변(2014.11.29)

안양똑딱이 2018. 8. 17. 18:26

 

[탐사65]호계2동 호계초교 주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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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계2동에는 안양 최초의 교육시설인 청감서원(호계서원)과 일제 강점기 초에는 낙영학교 등이 자리했던 안양 교육의 기초가 된 곳이며 범계 주민들의 풍류를 즐기던 소호정이 자리할 정도로 1900년도 초까지 안양지역 행정의 중심지라 할 수 있다.
이 동네는 1970년대 이후 자그마한 야산에 수십여채 집들이 있던 곳에 재건축이 거듭되면서 오밀조밀한 골목길은 볼 수 없으나 대형아파트와 빌라, 연립, 단독주택 등 다양한 유형의 집들이 자리하고 있으며 특히 경수대로 685번길 51에는 아주 오래된 기와집이 남아 있는데 안양에 원형으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한옥집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이 지역 역시 최근 재개발 찬반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호계온천재개발 주변지구는 ‘호계2동 915번지 일원 면적 45,701㎡에 아파트 1087세대를 짓는 사업으로 총 주민 수(토지 등 소유자, 조합원)는 468명으로 지난 2006년 8월 16일 추진위원회 승인을 받아 2013년 2월 28일 안양시로부터 정비구역 지정 및 지형도면 고시를 받으면서 주민 동의를 받아 2014년 7월 19일 ‘호계온천주변재개발지구’ 조합설립총회를 열고 사업 추진을 본격화한 반면 반대 또한 거세지면서 골목길에는 플랜카드가 나부끼고 담벼락과 전봇대에는 찬반 유인물이 부착되고 집집에는 반대하는 깃발이 매달려 있는 등 골목 사진을 찍을때 "왜 찍느냐" :어디서 나왔느냐"를 묻는 등 민간하게 반응하는 주민들도 만나는 등 어수선한 동네 풍경이다.
아파트와 주택가 한복판 경수대로733번길 34(호계2동 915-3) 에는 수도권지역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온천도 있다. 2003년에 아파트를 짓다가 고온의 온천수가 터지면서 온천과 대형찜질방으로 개장한 안양유황온천이다. 지하 804미터에서 끌어올린 물에 유황성분이 많이 함유되어 물이 좋다고 입소문 나면서 타지에서까지 몰려드는 차량으로 주변이 몸살을 앓아 민원이 쇄도할 정도였다. 그러나 유황성분이 많이 사리지고(이름도 '유황'자를 빼 현재는 안양온천), 시설의 노후화, 높은 온도의 수온이 오히려 고객의 발길을 점차 되돌리면서 경영난으로 부도나 현재 경매(안양지원 2013타경 15372)가 진행중으로 2014년11월11일 유찰(5차)돼 12월 16일(최저가 78억) 다시 매각기일이 잡혀 있는 상태다.(대지면적 1499평, 건물면적 2161평, 경매가 192억)

탐사코스: 범계사거리버스정류장(경수대로)-경수대로-경수대로110번길-경수대로122번길-안양온천-경수대로732번길-경수대로136번길-경수대로721번길-귀인로39번길-시민대로110번길-귀인로79번길-겨웃대로707번길-호계초정문-경수대로-시외버스정류소-경수대로685번길-호계도서관-오래된옛한옥-귀인로6거리(호계체육관입구)-귀인로-방축사거리(경수대로)-끝

 

변원신 선생이 들려주는 안양이야기
안양최초 개신교 전래지로 알려진 호계1동

호계동은 예전에 방죽말, 샛터말, 안말 일대가 범이 많은 곳이라 하여 범계 즉 호계(虎溪)라 칭한데서 유래되었다. 호계1동은 조선시대에는 과천현 상서면 도양리 지역이었다가 1914년 3월 1일 시흥군 서이면 호계리로 되었다. 1941년 10월 1일 안양면 호계리에서 1949년 8월 15일 대통령령 제162호에 따라 안양읍 호계리로 칭했고, 1983년 10월 1일 시 조례에 의해 호계동을 분동해 덕고개, 금성마을 지역을 호계1동으로 분리하게 되었다. 덕고개는 현 호계신사거리에서 교도소로 향하는 고개를 일컬었으며 옛날 지방에서 인자하고 덕을 쌓은 사람이 한양으로 과거를 보러 오고가던 고개라 하여 덕고개라 지칭하게 되었다.
호계1동은 동으로는 갈산동, 서로 군포시 금정도, 남으로 호계3동, 북으로 호계2동이 각각 위치해있다. 교통의 요충지로 조선시대 만안로가 개설된 이래 1930년대에는 서울과 과천, 남양을 관통하는 도로 및 경수산업도로의 개설로 서울, 과천, 수원, 안산을 연결하는 교통이 발달해 아파트가 급속히 들어서면서 인구의 유입이 급증한 곳이다. 또 중앙제지, LG전선 등 60여 업체가 소재한 중소기업 밀집지역으로 평촌신도시의 배후 상가지역으로 형성되어 있다.
역사적으로 호계1동은 안양지방 최초 개신교의 전래지로 알려지고 있다. 1895년 보고에 의하면 덕고개 출신 허대진이 처음으로 세례를 받았다고 했는데 이때 덕고개교회 즉 감리교회가 설립되었다고 하지만 그 위치는 알 수 없다. 문헌에 따르면 1909년 장로교회에서 인수하여 삼성리 교회로 명칭이 변경되었다고 전해진다.
호계2동은 호계동에서 1983년 10월 1일 시 조례 제600호로 분동해 안말, 방죽말, 샛터말 등의 지역이 호계2동이 되었다. 동으로 신촌동, 서로 안양8동, 남으로 호계1동, 북으로 비산2동이 위치했으며 안양교육의 발상지라고 할 수 있다. 동양나이론, 신아화학 등이 운집한 경공업 지역으로 강남, 경남, 대림, 덕원, 현대 등의 아파트와 연립주택이 밀집한 신흥개발지역이며 주민의 구성은 토박이가 다수를 차지한다.
방죽을 쌓아 농경지에 유입해 농사짓기가 수월했던 곳으로 안양면 이전에는 과천면 상서면사무소가 있었다. 일제강점 초기에는 안양면의 전신인 서이면사무소가 소재한 곳으로 관가의 중심지이기도 했던 호계2동은 안양 최초의 교육시설이 들어선 곳이기도 하다. 숙종 42년 1716년에 창건되어 대원군 집정 때 1870년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된 창강서원(또는 호계서원)과 옛 범계주민들이 풍류를 즐기던 소호정이 있었다. 또 일제강점기 초에 설립된 낙영학교는 비록 남아있지 않고 그 기록만 전해질 뿐이지만 이곳이 이미 오래전부터 안양교육의 발아지였다는 사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전파연구소가 있고 호계체육관이 최근 건립되었다.

 

지명유래 - 방죽말(防築洞)
<호계 2동>안말과 샛터말 사이에 있다. 조선시대에는 果川郡 下西面의 면사무소 가 있었고, 그 후 1914년 3월부터 1917년 7월까지 始興郡 西二面의 면사 무소가 있었던 유서깊은 고을이다. 이곳은 조선시대에 물을 막기 위하여 둑을 쌓았는데, 그 주변에 있는 취락이므로 방죽말 (房築洞)이라 칭했다. 그런데 이 방죽이 언제 조성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지만, 숙종 때 (1699) 발간된 <<異川邑誌>>堤壙條에 虎界堤壙在縣西南門十八里 라 했는데, 이로 미루어 보아 방죽(제언)의 이름은 호계이고, 그 위치는 과천치소(현 과천시 중앙동사무소)에서 서남쪽으로 18리 지점에 있었다. 축조년대는 숙종조 이전으로 보아야 할 것이므로, 최소한 조선 중기에 이미 방죽이있 었음을 알 수가 있다. 이 방죽은 후대에 내려 오면서 그 명칭이 바뀌었다. 광무 3년(1899)에 발간된<<異川邑誌>>堤壙條에 虎界堤壙在縣西南門十八里 라 하여 방 죽은 虎界에서 虎溪里競宇로 되었고, 이어 일제 때부터 범계방죽으로 불리우다가 1974년부터 실시된 안양6지구 구획정리사업 때 주택지로 변모되었다. 마을에서는 해마다 음력 10월초에 길일을 택해 방죽 앞에 있던 수령 300년 되는 향나무 앞에서 마을의 안정을 기원하는 群雄祭를 지내다가 1970년대에 나무가 죽자 祭를 지내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