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보따리/기억

[기억-정진원]의왕 덕장골 촌놈 콤플렉스

안양똑딱이 2017. 3. 19. 10:27

그때는 백성의 대부분이 촌놈들인 세상이었는데도 촌놈 연쇄 콤플렉스로 스트레스를 받고 살았었다. 아무리 화려한 덕장골의 유년시대라 할지라도 어머니 안의 꽃궁에 대해서 그것은 콤플렉스였다. 아무리 덕장골이 꽃대궐이고, 그 안에 기화요초, 은빛 강물이 흐르고, 그 위를 쪽빛 바람이 불어도 저녁이면 스산하고, 그리움과 기다림에 겨워 골짜기의 밤이 무섭고, 싫었었다. 서울이란 꿈도 꾸지 못했던 시절에 촌놈 콤플렉스가 우리들을 한없는 어리보기들로 만드는 것 같았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요물들이 밀려들어왔다. 지리가미와 시레이션, 분유와 디디티, B-29와 쌕쌕이(제트기), 탄피와 앞 논에 박힌 박격포, 인민군과 중공군, 데스까브도(철모)와 덴찌(손전등). 생소하고 신기한 것들이 주어졌을 때 놀랍기도 하고 부럽기도 했었다. 어디에 어떤 나라들이 있는 것이며, 지금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가. 누가 이기고, 누가 지는 것인가. 미국이라는 나라는 하늘 위에서 땅을,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는 거인국인가. 그것들에 대해서 덕장골의 뒷간과 밥상과 구르마와 석유등잔불과 우리들의 어머니와 아버지가 콤플렉스였다.

초등학교 몇 학년 때였던가, 서울 공덕국민학교에 다니던 누가 전학을 왔었다. 말로만 듣던 서울이 부럽고, 그 초등학교를 선망하게 되었고, 전학 온 그 학생의 옷과 신발이 우리와 달라 곁눈으로 훔쳐보았었다. 안양 장에라도 가면 거기는 별유천지였다. 증기기관차가 흰 연기를 내뿜으며 엄청나게 큰 무슨 벌레가 기어가는 것처럼 미끄러져 달리고 있었으며, 장터에는 없는 것이 없이 별 희한한 물건과 사람들이 법석을 떨고 있었다. 그들이 쓰는 말이 우리와 다르고, 입고 있는 옷이 다르고, 먹는 음식도 다를 것이며, 습속 일체가 우리와 다를 것으로 생각했었다. 덕장골의 그 멍청하리만치 허전한 정밀과 초록과 황토와 코발트 하늘과 고엽과 백설이 범벅되어 결국 눈부심이거나 현현한 어둠이거나 했던 것들이 안양 장의 그 조밀함과 왁자지껄과 오색영롱과 알전구에 대해서 콤플렉스였다.

안양에서 노량진까지 기차로 통학했었다. 안양은 노량진에 대해서 콤플렉스였다. 노량진은 문안에 대해서 콤플렉스였다. 노량진 본동의 산꼭대기에 내가 다니던 중학교가 있었다. 아침 운동장에서 조회를 서면 지방에서 기차로 통학을 하던 학생들은 여름 상의만 보아도 바로 촌놈임이 식별 되었었다. 우리 통학생들의 옥양목 상의는 하나같이 누르스름했었다. 수돗물이 없었던 시골에서는 샘물이나 우물물로 빨래를 했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철분이 많아서 산화철이 되어 약간 붉은 끼가 섞이게 되었을 것이며, 근본적으로는 표백작용을 하는 클로르칼크 때문이었을 것이다. 수돗물에는 소독을 위해서 그것을 넣었던 것이며, 그 물에 빨래를 하면 어느 정도 표백작용이 일어났던 것이다. 우물물은 더군다나 덕장골의 박우물은 수돗물과 클로르칼크에 대해서 콤플렉스였다.

옛날에는 한강을 건너야만 서울이었다. 영등포, 노량진까지 모두 촌놈들의 동네였다. 더 오래 전에는 서울 남대문 문안으로나 들어가야 촌놈 신세를 면했을 터이다. 한강을 건너 용산 쪽으로 들어가는 것을 ‘문안 간다’라고 했던 것은 그 남대문 안으로 들어간다는 뜻이었을 것이다. 내가 타고 다니던 통학열차는 천안을 시발점으로 해서 서울역까지 가는 기차였다. 나는 한강을 건너지 못하고 노량진에서 내려야 했었다. 저녁에도 그 기차를 타면 서울역 쪽에서 타고 온 학생들이 그들도 촌놈 주제꼴에 노량진에서 차에 오르는 우리를 더 촌놈 보듯이 치켜보고 있었다.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에 입학하였다. 그 캠퍼스는 덕장골과 닮은 데가 많았으나 인걸은 사뭇 달라서 아는 사람이라곤 전혀 없었다. 사람에 대한 사람의 콤플렉스기 아니라 이제는 내 출신 모교에 대한 그들 모교에 대한 집단 콤플렉스였다. 나는 상당한 기간을 혼자 지냈다. 나중에는 서천에서, 이리에서 온 촌놈들과 어울려 지냈다. 다행히 교정에 마로니에 큰 나무들이 있고, 가을에는 은행나무로, 봄에는 라일락으로 덕장골의 냄새를 풍기고 있어서 서러움이 덜하기는 했었다.


수필가이자 문학박사인 정진원 선생은 의왕시 포일리 출신(1945년생)으로 덕장초등학교(10회), 서울대문리대 지리학과를 졸업했으며 서울대 대학원에서 지리학, 석·박사과정을 마쳤다. 박사학위논문으로 ‘한국의 자연촌락에 관한 연구’가 있다. 성남고등학교 교사, 서울특별시교육청 장학사, 오류중학교 교장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