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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조성현]고려시대 안양사지(安養寺址)출토 용도미상의 철제동물장식(鐵馬)에 대한 고찰

이야기보따리/자료

고려시대 안양사지(安養寺址)출토 용도미상의 철제동물장식(鐵馬)에 대한 고찰
안양시문화해설사 조성현
 
□들어가는 말
 
2014년 갑오년(甲午年) 말(馬)의 해를 맞아 안양시 석수동 안양예술공원 초입 고려안양사지(구,유유부지/ 현,‘김중업박물관’복합문화단지)발굴 및 출토된 용도미상의 철제동물장식인 ‘철마(鐵馬, 철제말장식)’를 타도시의 사례를 고찰하여 그 성격과 (추정)용도를 규명하고자 한다.
 
철마는 말의 형태를 본 따 용해된 철을 부어 주조한 것을 말한다. 타 지역의 출토 고려시대 철마의 사례분석결과 철마는 신령스런 기운을 가진 신마(神馬)로서 호랑이 출연이 잦은 지역에서 호랑이로부터 화를 당하는 것(虎患)을 회피하는 등 교통의 안전을 확보하는 기능과 함께 민간신앙의 양상을 보이고 있다. 철마는 철제로 만든 말의 다리를 (호랑이에게)던짐으로서 함께 액운(재앙, 화)을 던져 버리기 위한 상징물로 제작한 것으로 보이며 또한 동시에 무탈, 무병과 복(안녕) 등을 기원하는 원시기복신앙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안양시는 김중업박물관이 있는 옛,유유(제약)부지의 고려안양사지 건물지에서 발굴·출토 및 수습된 철제장식용구(2점)가 보존처리결과 철마(鐵製馬)라고 밝힌 바 있어 그 성격과 용도가 궁금하여 이를 규명하는 데 학술적 연구의 목적이 있다. 복을 기원하는 제사(신앙)의 대상으로 섬긴 것으로 보이는 철마의 성격과 용도를 고찰하고 살펴본다.
 
□고려안양사지(통일신라중초사지)발굴 조사계기 및 발굴개요
 
안양시는 (주)유유제약 안양공장이 제천으로 이전함에 따라 2007년 5월 옛,유유부지 및 아름다운 공장건축물을 매입하여 공장 부지를 복합문화공간(김중업박물관)으로서의 활용계획을 모색하기에 앞서 매장문화재의 보호와 보존을 기하기 위한 일환으로 (재)한울문화재연구원(원장, 조사단장 김홍식)과 함께 발굴조사를 벌여왔다. 발굴조사 과정에서 2009년도에는 동서 장방형의 건물지인 승방지(僧房址)에서 안양사명문암키와편(安養寺銘文瓦片, ‘안양사’라고 새겨진 기와조각)이 출토되는 쾌거를 거둔다. 발굴조사과정에서 승방지의 전면에는 많은 양의 기와편들이 두텁게 폐기된 채로 남아있었는데 건물이 무너지면서 지붕위에 올려 졌던 기와들이 그대로 주저앉은 것으로 판단되며 일부 기와를 수습하여 세척하던 중 ‘안양사명문기와’가 발견되어 발굴 관계자를 흥분하게 한바 있다. 또한 태조왕건이 세우고 고려 말 최영장군이 보수(중수)했다고 문헌 속에 전해지는 ‘안양사칠층전탑지’가 발굴·조사되어 고문헌 속 고려안양사가 역사적인 실체로서 (석수동)지역에 존재했음이 명확히 규명되었으며, ‘안양사명문기와’ 및 ‘고려전탑지’ 매장유물발굴은 고려안양사의 실존 및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는 귀중한 사료로 평가 받고 있다. 한편 발굴조사 결과 중첩된 층위아래에서 수습된 와전류, 도자류 등 매장출토 유물을 통해 통일신라, 고려, 조선에 이르는 유물과 유구가 확인되어 사찰의 운영시기를 추정해 볼 수 있으며, 중초사지당간지주(국가보물 제4호) 서쪽지주 측면에 새긴 당간기(幢竿記)에 등장하는 통일신라 ‘중초사(中初寺)’와 관련된 유적으로 보이는 선대(先代) 통일신라 ‘원형초석’이 고려건물지(강당지)하부공간에서 확인되어 통일신라 중초사가 역사적인 실체로서 지역에 실존했음을 확인할 수 있는 단서가 되었다.
 
□안양사지출토 주요 매장유물(목록)
 
고려안양사가 있던 옛터인 구,유유(산업)부지(현,‘김중업박물관’단지)는 1959년 (주)유유산업제약공장 준공에 앞서 공사 중 금동용두, 사자향로발(철제향로조각), 청동그릇, 백자접시 등이 수습된바 있고, 금번 안양시의 유적 발굴조사를 통해 전돌류(명문전 등), 분청자 및 청자편, 백자편, 도기 및 도자편, 용도미상의 기와, 귀면와, 도제나발편(陶製螺髮片, 소조불부처님의 곱슬머리카락), 연꽃무늬수막새, 백자연봉 및 분청자연봉형 기와장식, 치미, 와전류, 철정(와정, 철못), 철제칼편 및 철제동물장식(안장이 있는 철마)등 금속유물, 청동국자 등 동제유물, 고려백자류, (中國産)수입청자 등 다량의 매장유물들이 무더기로 출토된 바 있고 매장유물의 일부는 ‘고려안양사박물관’에 전시 및 진열하여 지역에 공개하고 있다. 금번 고려백자류가 수습된 것으로 볼 때 안양예술공원(관악수목원근처)에 있던 가마터(陶窯址)에서 생산된 도자류의 주요 수요처 중의 하나가 고려안양사로 추정해 볼 수 있었다. 특히 ‘안양사명 암키와’는 문헌기록 속에만 남아 있던 고려 태조가 세운 문헌 속 안양사의 실체를 제대로 규명하는 귀중한 사료로 평가받고 있다. 한편 석교부재가 발굴조사 되어 돌다리를 건너서 ‘안양사’에 이르렀다는 김극기의 옛시문 속에 등장하는 ‘돌다리’의 정체를 확인할 수 있었으며 박석(薄石, 넓적하고 얇은 돌)이 깔린 전탑지가 고스란히 발굴·조사되어 고려안양사 중심건물지인 ‘금당지’앞에는 박석이 깔려있는 전탑과 삼층석탑(현, 삼층석탑은 원위치에서 유유제약건물 준공 후 당간지주 옆으로 이전)을 나란히 갖춘 쌍탑(雙塔)을 보유한 사찰임을 확인할 수 있는 단서가 되었다.
태조왕건은 고려건국 후 부처가 돕는 다는 설로써 간여하는 차 있어 그 말을 채용하여 전국에 탑(塔)과 불묘(佛廟)를 많이 두었는데 안양사의 (전)탑도 그중의 하나라고 한다. ‘안양사칠층전탑’과 관련된 문헌상의 기록의 하나인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을 살펴보면 ‘삼성산에 안양사가 있다. 절의 남쪽에 있는 탑은 벽돌을 포개서 칠층을 쌓았고 기와로 덮었다. 제1밑층은 12칸으로 벽마다 부처와 보살 등의 화상을 그렸으며 밖에는 난간을 세워 출입을 막았는데, 그 거창하고 장려한 모습을 딴 절에서는 볼 수 없다(원문, 基爲巨麗가 他寺엔 未有也)’라고 밝히고 있어 전탑의 모습을 유추하며 그려볼 수 있다.
2008~2011년까지 4차례 시∙발굴조사 과정에서 속살을 드러낸 ‘고려안양사’는 구, 유유산업 공장건물에 의해 지하하부공간에 대한 구조적인 조사의 한계성을 보이며 일부만 확인되어 정확한 배치를 판단하기 어려운 사정이지만 동∙서회랑지가 연결되고 중문-전탑-금당-강당-승방으로 이어지는 추정 고려안양사 가람배치의 일단을 제한적이나마 확인할 수 있었으며, 강당지의 추정 설법단은 배치와 구조에 있어 황룡사의 설법단과 유사성을 보여 주목을 받은 바 있다.
추정 고려안양사 가람배치이외에 문헌속 안양사를 종합적으로 살펴보면 정황상 사찰아래 자연스레 형성된 촌락인 사하촌(寺下村)인 ‘안양사 마을’이 있었고, 걸어서 다리를 지나 사찰에 이르렀으며 맑은 시냇물(淸溪)곁에 있는 사찰에는 푸른 연못(벽담, 碧潭)이 있었으며, 새벽에는 날이 밝음을 알리는 닭이 울고, 사객(寺客)들의 말(馬)이 정거했으며 부속시설로 능정스님의 영정이 있던 조사당과 안양루 누각(安養樓, 누대)이 있던 걸로 추정된다.
 
□호랑이와 안양(권)
 
삼성산이 감싸고 있는 안양과 시흥 등은 과거 호랑이의 출몰이 흔히 있던 것으로 보인다. 삼성산과 연결된 관악산의 남태령쪽에도 험준한 고개에 호랑이의 잦은 출몰이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안양 및 안양권에는 호랑이(범)와 관련된 지명이 유독 많이 남아 있어 과거 호랑이의 출몰이 잦았던 것으로 보인다.
지명 속에서 찾아보면
▲안양시 - 호계동(虎溪洞), 범계동(평촌), 호현(虎現)마을 및 범고개(박달2동),
▲금천구(시흥동) - 호암산(湖巖山), 호압사(虎壓寺)
호암산성(虎巖山城, 사적 제343호, 통일신라6~7세기, 문무왕 12년경 추정)
 
□안양권의 산성(山城)유적
 
통일신라 호암산성(금천구, 삼성산), 고려시대 영랑산성(안양시, 삼성산), 백제계 모락산성(의왕시 모락산)이 있어 안양권 지역은 전략적으로 중요한 군사적인 요충지임을 알 수 있다.
▲ 참고 호암산성,
호암산성< 虎巖山城, 사적 제343호 >은 통일신라 문무왕 12년경 신라가 나당 전쟁 시 한강을 넘어 수원으로 가는 육로와 남양만으로 침입하는 해로를 효과적으로 방어 및 공격하기 위하여 축성한 요새로 추정된다. 호암산 정상부를 두른 통일신라의 테뫼식 산성으로 둘레는 1,250m이고 이중 약 300m 구간에 성축이 남아 있다. 1990년 발굴에서 연못 2개소, 건물지 4개소가 확인되고 많은 유물들이 출토 되었다. 한우물의 조선시대 석축지는 동서 22m, 남북 12m, 깊이 1.2m의 장방형이고 조선시대 석축지 아래에서 동서 17.8m, 남북 13.6m, 깊이 2.5m의 통일신라시대의 석축지가 확인되었다.
한우물에서 남쪽으로 약 200m 떨어진 곳에서도 남북 18.5m, 동서 10m이상으로 석축 된 제2우물지가 확인되었다. 우물 지반에서도 많은 유물이 나왔는데 그 중에서도 '잉벌내력지내미< 仍伐內力只內未 >…' 명문이 있는 청동제 숟가락은 연대 결정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한우물의 동북방 50m 지점에는 서울 장안에 화재가 발생하는 것을 막기 위해 세웠다는 조선시대의 도읍설화와 관련된 석수상< 石獸像 >이 있다. 이 동물상은 개의 모양을 하고 있다. 한우물의 조선시대 석축지에 있는 석구지< 石狗池 >라는 명문이 새겨진 석재로 보아 이 연못이 전 석수상과 관련되어 석구지라고 불러졌음을 알 수 있다.
출처: http://blog.naver.com/ohyh45/20161923319
 
□호환(虎患)과 안양 - 수촌마을 도당제
 
관양1동 수촌마을에서는 웃당(당집)과 아랫당 두 곳의 제단에서 제사를 지내고 난후 마을 앞 당나무(성황나무)인 느티나무에서 제사를 지내 모두 3당에서 마을제를 올린다. 관양동 수촌마을 도당제는 산에 대한 신성함과 호랑이의 화를 두려워해 지낸 것으로 추측된다.
당제 또는 당고사라고 불리는 마을제(洞祭)는 지역의 정체성을 담아 명맥을 이어온 우리고을의 민속 제사문화로서 역사성과 전통을 자랑하는 지역의 선조들이 남긴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안양시 관내 마을제(洞祭) 제례의식이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제한적이나마 지역의 향토 문화유산으로서 명맥을 이어가며 전승되고 있다. 일환으로 관양1동 수촌마을에서는 도당제(都堂祭)가 매년 추수 후 늦가을 마을 뒤편인 관양동 현대아파트 뒤 관악산중턱 제당에서 열린다.
소머리 등 일체의 제례음식은 등지게(전통운반기구)를 짊어져 제단까지 이동하고, 정성을 드린 제물 앞에서 제례의식을 거행한다.
하얀 제례의복을 갖춰 입은 제관은 단앞에 자리를 깔고 산위 웃당(당집)과 제단석이 있는 아랫당 두 곳의 제단에서 제사를 지내고 난 후 마을 앞 당나무(성황나무, 신목)인 느티나무(수령 540년, 보호수)에서 제사를 지내 모두 3당에서 마을제사를 지낸다. 도당제는 산에 대한 신성함과 호랑이의 화를 두려워해 지낸 것으로 추측된다. 도당제은 호환(虎患)을 방지하고 마을의 안녕과 평화를 기원하는 의식으로, 도당은 마을사람을 수호하고 마을의 안녕과 풍농을 관장하면서 마을의 대동단결을 돕는 존재로 여겨진다. 또한 도당은 신에게 예배를 드리는 거룩한 공간으로 인간과 신이 만나는 장소이다.
제례의식을 마친 후 ‘김해김씨 석성공파 안양시 수촌문중 종친회’사무실에서 고사음식을 나눠 먹으며 마을공동체 의식을 다진다. 수촌마을 당제는 과거 인덕원부터 일동리(현, 관양동) 7개 마을이 참여한 역사성과 전통 있는 행사로 수령이 500여년이 넘는 보호수인 느티나무(관양1동 1377번지 소재)앞에서는 무속인이 밤새도록 굿판을 벌리며 주민들의 수명과 재복, 태평과 무탈 등 빌고 액막이를 했다고 전한다. 자연부락 이름이 뺌말인 수촌마을은 김해김씨 유생이 약 500여년 전 서울에서 과거를 보고 고향으로 가던 중 마음에 끌려 터를 잡은 후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전하며 지금도 그 후손들이 뿌리를 내려 지역에 거주하면서 마을제행사를 관장해 오고 있다.
 
□풍수와 연관된 창건내력을 지닌 비보사찰, 삼성산 ‘호압사(虎壓寺)’
 
조선 개국과 더불어 한양에 궁궐이 건립될 때 풍수적으로 가장 위협이 된 것은 관악산의 불(火)기운과 삼성산(호암산)의 호랑이 기운이었다. 그래서 왕조에서는 이를 제압하기 위해 숭례문(남대문)에는 편액의 숭(崇)자 위의 뫼산(山)자를 불꽃이 타오르는 불화(火)의 형상으로 표현을 했다. 또한 삼성산의 호랑이 기운을 누르기 위해 호랑이 꼬리부분에 해당하는 자리에 절을 창건하게 하였는데 이것이 삼성산 호압사(虎壓寺)이다. 이렇게 궁궐(경복궁)을 위협하는 호랑이 기운을 누르기 위해 창건되었다는 호압사는 18세기 전국 사찰의 소재와 현황, 유래 등을 기록한《가람고》나 《범우고》에도 호랑이의 기운을 누르기 위한 비보(裨補) 개념으로 소개되고 있다. 이는 다시 말해서 호압사가 불교 수행의 도량(道場)이면서도 풍수적으로는 호랑이의 기운을 누르기 위한 상징성 또한 지니고 있는 것이다. 호압사가 창건된 데에는 두 가지의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먼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금천조에는 지금의 시흥군의 현감을 지냈다고 하는 윤자(尹滋)의 이야기가 전한다. 이 기록에 의하면 “금천의 동쪽에 있는 산의 우뚝한 형세가 범이 걸어가는 것과 같고, 그런 중에 험하고 위태한 바위가 있는 까닭에 범바위(虎巖)라 부른다. 술사가 이를 보고 바위 북쪽에다 절을 세워 호갑(虎岬)이라 하였다.....”라 하고 있다. 호랑이 기운을 누르기 위해 호랑이 꼬리부분에 절을 창건하게 했는데 이것이 호압사이다.
(출처: 천강성 2014.03.28 15:57 http://blog.daum.net/ksjj1188/16818316)
 
□깊은 골짜기에 있던 것으로 보이는 삼성산 ‘고려안양사’
 
삼성산(三聖山)은 서울시와 관악구를 경계로 하는 산으로 관악산에서 서쪽으로 뻗어 내린 능선에서 우뚝 솟아오른 산으로 삼성산은 바위로 된 암산(巖山)이다. 일찍이 원효, 의상, 윤필 세 명의 고승이 신라 문무왕 17년(677) 암자를 짓고 수도에 정진한 것이 ‘삼막사(三幕寺)’의 기원이며, ‘삼성산’이란 지명유래는 세명의 스님(고승, 三省人)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또한 조선후기에 간행된 <시흥읍지> 등에서 고려말 불교계를 이끌어온 나옹(1320~1376), 무학(1327~1405), 인도승려 지공(?~1363)이 정진했다는 연고로 삼성산이라 칭하는 것으로 볼 때 세 명의 고승이 산명(산 이름)에 영향을 미쳤음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삼성산일원 안양시계에는 통일신라시대의 사찰로 ‘중초사(폐사)’와 전통사찰 ‘삼막사가 있으며 삼막사는 신라문무왕 17년(677)에 창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려시대의 사찰로는 고려안양사(폐사), 안흥사(현,염불사)가 있으며 그 외에도 삼성산일원에는 전통사찰 ‘안양사’ 등 많은 사찰과 암자가 산재해있어 불교문화를 접할 수 있다.
중초사지당간지주(국가보물 제4호)의 당간기록에 흥덕왕 2년인 827년 2월 30일 중초사(中初寺)가 창사했음을 명문(銘文)으로 남아있는데 옛,유유부지의 발굴조사과정에서 노출된 매장유물(원형형초석, 중복초석 등)을 통해 통일신라 중초사가 역사적인 실체로 지역에 존재했음이 입증된바 있다. 삼성산일원에 있는 삼막사, 중초사(지), 호암산성 유적 등을 통해 이 지역 일대가 삼국(고구려, 백제, 신라)의 격동기 속에서 한때 신라문화권에 속해 있음을 알 수 있고, 우리안양은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 모두가 골고루 점령했던 요충지역으로 관련된 유구와 유적들이 발굴조사 될 가능성이 많은 고장이다.
삼성산에는 염불사(念佛寺, 전통사찰 제79호)가 있는데 고려 태조왕건이 창건했다는 설도 있으며 이때 사명(寺名)은 ‘안흥사(安興寺)’로 안흥사는 염불암의 시초 및 기반이 되었던 사찰로 여겨진다. 염불사는 조선 태종7년(1407) 한양의 백호에 해당하는 관악산의 산천 기맥을 누루기 위해 왕명으로 사찰을 대중창한 바 있고 조선후기 철종에 이르러 도인스님의 칠성각(七星閣)을 건립하는 등 사세가 형성된다. 경내에는 조선후기 부도연구에 중요한 사료가 되는 마애부도(磨崖浮屠) 2기 및 종형(鐘形)부도가 있고, 수령이 500년 된 소나무(도지정 보호수 5-2)는 염불사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특히 삼성산에는 고려 태조왕건이 금주, 과주 등의 고을을 정벌하기 위하여 지나다가 현(現), 안양시 석수동(안양예술공원 초입, 김중업박물관 일원)지역에서 신라인 스님 능정(能政, 교종계열)을 만나 ‘삼성산 안양사’를 창건(900)하게 되며, 고려안양사는 ‘안양시’ 도시지명유래에 영향을 미쳤다. 고려를 건국(開國), 918)하고 통치이념으로 숭불(崇佛)정책을 내세운 왕건은 고려왕국을 불교적인 이상향인 극락(極樂, 서방정토)과 같은 살기 좋은 도시를 건설하고자하는 염원을 담아 우리시에 ‘고려안양사’를 창건하고, ‘안양사칠층전탑’을 세운 것으로 풀이된다(私見).
한편 고려 명종때 문신 김극기(金克己, 1150~1204)는 ‘안양사(安養寺)’란 제목의 옛시문 속에서 ‘그윽한 골짜기가 나오는 네(출유곡, 出幽谷), 깊은 오솔길은 성난 뱀 오는듯하고(심혜투사례, 深蹊鬪蛇來), 삼백굽이나 구불구불 이어졌어라(굴절삼백곡, 屈折三百曲)’라는 내용을 담은 한편의 한시를 남겼다.
그윽한 골짜기의 깊은 오솔길을 ‘굽이굽이 돌아 안양사에 이르렀다’는 표현을 사용한 것으로 보아 당시로서는 삼성산의 깊은 곳에 고려안양사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그는 ‘안양사’란 제목의 또 다른 옛시문 속에서 “걸어서 아름다운 다리를 지나 감색으로 붉게 단풍진 사찰(감궁紺宮, 안양사)에 이르니, 좋은 구경에 모두 불자라 다행이었네, 푸른 못(벽담,碧潭)은 환하여 가을 달(추월秋月) 잠긴듯하고...”로 시작되는 주옥같은 한시를 남긴 바 있어, 문신 김극기는 고려안양사에 매료되어 일회가 아닌 여러 차례 ‘안양사’를 방문하고, 사찰을 찬미하는 아름다운 한시들을 남겼음을 알 수 있다(‘안양사’ 한시출처: 신증동국여지승람, 권10, 경기 금천현).
 
□고려시대의 사원(안양사)의 입지와 역할
 
공직자로서 안양사지 발굴 및 박물관건립에 관여하신 김지석 안양시문화재전문위원은 고려시대 안양사는 사원이 지니는 종교적인 기능 수행이외에 일정한 시설과 일정규모의 사전(寺田, 사찰의 재산)을 유지하면서 재정적이 부가 축적된 사원으로서 지역의 주요 교역과 경제적인 거점지로서 종합적인 역할과 기능을 수행해 온 것으로 풀이하고 있다. 김 위원은 고려시대 사찰 및 사탑이 주로 육로의 큰길가나 강가에 입지하고 있어 조창과 연결되며 지역적인 위치가 교통로인 역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분석하면서 고려시대의 사원은 교통의 요지에서 불교고유의 예배와 신앙의 중심지 역할을 하면서 공용자와 여행객의 숙소, 휴식의 기능, 자치적 경제교류의 기능 등을 갖고 있다고 풀이하고 있다. 또한 고려안양사는 불교적 신앙 전파이외에 주요 교통로의 경제적 상업적 거점 및 교역의 중심지로서 역할과 함께 왕실과 관리의 휴식과 접객기능을 수행하여 국왕(태종, 조선)의 휴식(향연), 지방 관리의 전별(환송)을 위한 기능 등을 포괄할 수 있는 규모 있는 대찰로 풀이하고 있다.
한편 고려 말 최영(崔瑩)장군은 기울어가는 국가와 왕실의 안위를 태조왕건이 건탑(建塔)하여 고려건국의 상징적인 의미를 담은 전탑(塼塔, 벽돌로 만든 탑)이 기우러진 채로 방치되어있자, 이를 바로잡고자 ‘안양사칠층전탑’의 중수를 한다. 고려 말 문하시중에 이른 최영은 불법의 힘을 빌어 국가를 재건코자하는 의지를 담아 전탑을 중건하고 국가적인 행사로 낙성식(준공식)을 거행한 바 있고, 이때 국왕인 고려우왕(고려 제32대 국왕)이 내시(환관, 박원계)를 통해 향(香)을 보내고, 참여한 도승이 천명이고, 시주(布施)한 각계의 인사가 삼천명이라고 문헌 속에서 밝히고 있어 왕실사찰로서 사세와 규모를 가늠해 볼 수 있다. 따라서 고려안양사는 사세가 만만치 않은 대규모가람으로서 사찰본연의 임무인 종교적 기능이외에 중앙정부와 일정한 관계 속에서 지역의 거점으로서 부수적으로 다양한 역할과 기능을 감당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판교지역 철마(철제 말장식)의 양상 사례분석
 
‘성남에서 피어난 고려문화’를 테마로 성남 판교박물관 개관 특별전이 지난 해 2013년 12월 24일부터 금년 2월 28일까지 펼쳐진 바 있다.
전시관에는 문화유적발굴조사(2007~2008)중 성남시 분당구 판교동 판교지구신도시 건설예정지에서 발굴 수습된 고려불상의 귀여운 미소를 만끽할 수 있는 신비스런 고려불상 3점(지장보살상2구와 비로자나불상)을 비롯하여 고려시대 건축양식을 반영한 ‘청동소탑’등도 함께 공개됐다. 이밖에 판교 출토 유물 약 7천 점 중에서 아직 그 정확한 기능이 미상인 용도미상의 고려철마(鐵馬)와 고려청자, 고려동경(銅鏡) 등도 선보였다. 고려시대 철마는 12점 중 8점이 진열 전시 되었는데 8점은 철마의 다리가 하나씩 모두 결실된 특징을 갖고 있다. 과거시험을 보러가는 경유지인 판교는 삼남에서 도성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위치한 교통의 요지로서 숙박시설인 판교원(院)과, 판교점(店), 낙생지역에 역(驛, 驛館)이 설치되어 있어 교통의 요충지로서 관리나 상인 등 여행객들의 숙식과 말의 휴식에 최적의 장소이다. 수도권의 중심부에 있는 성남 판교는 한반도의 중부에서 남부로 가는 중요한 길목에 자리하고 있다. 조선후기에 이르러 한양(도성)으로 들어가는 삼남지방의 길목 중의 하나인 판교지역에서 수습된 용도미상의 고려철마(鐵馬)와 관련하여 판교박물관 정미숙 역사문화해설사는 판교지역의 ‘달래내고개’는 고개가 매우 험준한 지역으로 고려시대 호환(虎患, 호랑이의 화)을 우려하여 호랑이에게 철마의 다리를 먹이감으로 건내 던져 주었다고 언급하면서, 인간의 안전한 통행을 기원하기 위해 철마의 다리를 사용한 것으로 분석했다. ‘달래내고개’는 호랑이의 출현이 잦았던 것으로 보이며 호랑이로부터 화를 면피하기 위한 기복신앙의 일환으로 철제마의 다리를 던졌고, 그래서 철마의 한쪽 다리가 대부분 결실된 상태에서 출토되는 양상(특징)을 보인다고 여겨진다. 또한 무당집에서 발견되었다는 점에서 개인의 기복을 비는 민간신앙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한편 판교지역 개발을 위해 실시한 2002~2008년까지 6년간 문화재 조사결과 (후기)구석기시대부터 인류가 거주했던 흔적이 발견되었고 선사시대 주거지, 삼국시대 고분군, 조선시대 주거지와 분묘 등 구석기~조선에 이르는 유구가 8,000여 점 발굴된바 있다. 판교지역 고려시대의 유적은 판교동 9구역과 10구역, 12구역 등에서 건물지와 절터, 가마터, 무덤 등이 조사되었으며 청자, 도기, 기와 등 다양한 유물들이 출토 된 바 있다.
 
□고려철마(高麗鐵馬)와 민간신앙 (성남시 분당구 판교지역 사례)
 
판교원(板橋院)마을 9단지 일대에서 철마가 발견되었다. 철마는 철을 재료로 만든 말을 의미한다. 수습된 철마를 통해 이 건물지는 제사와 관련된 유적으로 추정하였고, 특히 규모로 보아 마을의 안녕과 평화 등을 기원하는 ‘당집’일 가능성이 제기 되었다. 건물지 내부(추정 당집유적, 무당집)에서 출토된 철마 유물 12점은 고려중기에 해당하는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그중 11점은 대체로 상호 비슷한 모양새이지만 이중 한 철마는 다른 유물과 달리 목이 길고 ‘갈기(말의 목덜미에 난 긴 털)’와 ‘안장(鞍裝)’등이 자세히 묘사되어 특이하다. 지금도 강원도와 삼척 등지의 서낭당(당집)에서 판교출토 철마와 유사한 형태의 유물들이 발견되고 있어 오랜 세월동안 민간에 전승되어 온 신앙임을 알려 준다. 이들은 판교처럼 주로 과거 교통의 요지나 성곽 등에서 발견되고 있어 통행의 안전을 기원하는 민속신앙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된다. (자료제공, 판교박물관)
 
□안양의 민간신앙
 
마을제(석수동쌍산신제 등), 칠성신앙(삼막사칠성각 마애삼존불), 무속신앙 등
□판교출토, 고려철마(高麗鐵馬)이미지 (자료제공: 성남시 판교박물관)
□고려안양사지 출토 용도미상의 철제동물장식(철마 2점)의 양상
▲철제동물상(철제마편) 금속유물 2점 의 제원
(단위: 길이㎝, 무게g/ 자료협조: 안양시)
∆철제동물상 1
유구출토지: 건물지2(북쪽기단 아래), 수량1점, 재질 금속
기고(길이)10.5, 구경(폭)3.9, 저경(두께)7, 무게1144.4
특징: 몸체가 두껍고 퉁퉁한 모습, 다리는 짧고 둥근 원통형형태
머리결실, 안장, 몸통의 안장이 있는 안쪽으로 장니(障泥, 말 다래)표현, 안장의 아래쪽에 타원형의 등자(鐙子, 말을 탈 때 발을 디는 제구)가 있음, 안장 안쪽으로 가슴걸이 묘사되어 있 고 뒤쪽으로 식금구(飾金具, 말띠꾸미개)확인, 다리단면 원형, 상세한 마구(馬具)표현, 주물선 확인(주조품), 등과 다리 아래 부분과 정면에 주조선보임, 몸통 뒤쪽 타원형의 구멍,
다리는 좌우 비대칭(뒷다리 한쪽 결실)
∆철제동물상 2
유구출토지: 건물지2(기와폐기층), 수량1점, 재질 금속
기고(길이)6.8, 구경(폭)2.4, 저경(두께, 높이)2.5, 무게108.8
특징: 몸통이 얇고 긴 형태, 다리는 장방형의 형태
머리형상은 남음, 몸통부 안쪽에 안장(鞍裝)확인, 몸통이 얇고 긴 형태, 몸통부 중앙에 구멍(주조품 추정), 등쪽에서 주물통을 주입한 것으로 추정, 머리 부분에 귀와 코가 있고 목이 짧다.
다리 단면 장방형
비 고
 
- (안양시) 보존처리결과 안장이 있는 철마로 확인
- 말의 다리 좌우 비대칭으로 불완전 한 모습
- 2점 모두 뒷다리 한쪽 결실: 말다리가 자연적으로 부러지거나 고 의로 부러뜨린 듯함(조성현사견)
 
□고려안양사지출토 철제마편의 이미지사진(2점)
자료제공:안양시
 
 
□결 론
옛,유유부지(김중업박물관단지內)의 ‘고려안양사지’에서 출토된 금속장식구인 철마 2점은 안양시의 보존처리결과 안장이 있는 철마로 최종 확인되었다. 말의 뒷다리는 모두 한쪽이 결실되었고 한 점이 아닌 2점 모두 좌우 비대칭으로 불완전 한 모습을 보이고 있어 주목된다. 두 점 모두 주물을 이용하여 철재 재료로 견고하게 만든 장식이기에 자연 상태로 한쪽 다리가 일괄 결실되기는 어렵다고 판단되며 고의로 2점의 철제마(장식물)에 강한 물리적인 충격을 주어 다리를 부러뜨린 것으로 보인다. 말장식의 (후면에서 보면)우측 뒷발 다리가 부러진 공통점이 보이는데 이는 다리가 자연적으로 부러졌다기보다는 고의로 부러뜨린 듯한 인상이 강력하게 풍긴다.
판교지역 고려건물지에서 수습된 고려시대 철마는 12점 중 8점이 판교박물관에 전시 및 공개된 적이 있는데 8점은 철마의 다리가 하나씩 모두 결실된 특징을 갖고 있다. 이 또한 우연의 일치라기보다는 철마의 다리를 어떤 종교적으로 의도된 목적을 갖고 고의적으로 훼손한 곳으로 보인다.
철제동물상인 철마는 과거 교통의 요지나 성곽 등에서 주로 발견되고 있어 통행의 안전을 기원하는 민속신앙과 관련이 있다고 분석되고 있다.
판교에서 출토된 철마는 신령스런 기운을 가진 신마(神馬)로서 호랑이 출연이 잦은 지역의 교통의 안전을 기원하는 기능과 함께 구복을 기원하는 민간신앙의 양상을 보이고 있다. 타도시의 사례에서 철마는 말의 다리를 (호랑이에게)던짐으로서 함께 액운을 던져버리며 무탈, 무병과 복을 기원하는 원시기복신앙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용도미상의 철마의 실체는 액운(재앙, 화, 호환 등)을 던져 없앨 목적으로 제작되었으며, 철마의 다리가 부러진 연유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한편 타도시(성남시, 판교)의 사례분석결과 철제 말장식(철마)이 출토되는 지역은 호랑이의 출몰이 잦은 곳, 험준한 고개, 여행객들의 숙식과 말의 휴식이 빈번한 교통의 요지(요충지), 성곽, 무당집(서낭당, 당집, 종교공간) 등에서 출토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고, 일반적인 주택가에서는 출토되지 않은 점으로 볼 때, 고려시대 안양사는 이러한 요소 중의 일부를 품은 것으로 사려되며 그러한 맥락에서 철제마편이 고려시대 안양사지에서 출토 및 수습된 것으로 여겨진다.
고려시대 안양사지에서 출토된 뒤쪽 다리가 부러진 철마(동물상 2점)의 실체는 제사 및 신앙의 대상으로 호환(虎患)면피 및 무탈, 무병 등 안녕을 기원하는 민간신앙의 역할과 기능을 한 것으로 판교사례를 일반화하여 조심스럽게 전망하고자 한다. 철마의 다리가 부러졌음은 동시에 액운(재앙, 화)을 던져버려 무탈과 안녕을 의미하는 상징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한편 한 지역주민에 의하면 고려안양사와 관련된 유적으로 보이는 ‘석수동마애종(경기도유형문화재 제92호)’옆 건물지 하부 지하공간에서 철제동물장식(철마로 추정) 및 작은 불구(佛具)용구(동물상, 불상류)들이 무더기로 도굴되어 고철로 폐기처분했다는 제보가 있어 고려안양사(부속 사찰건물지 등) 및 고려안양사 권역에는 금번 발굴·출토된 2점의 철마(鐵製馬)이외에 더 많은 철제동물상(철마, 鐵馬)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사견)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