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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정진원]검둥이와 독구

안양똑딱이 2017. 3. 18. 18:56

검둥이와 독구 
 

우리집 개 이름은 검둥이였다. 옛날 어린애를 낳으면 1 년이나 2 년 기다려봐서 호적에 올렸었다. 면사무소에 가는 사람 편에 부탁하면 가는 사람 마음대로 즉물적(卽物的)으로 작명해서 호적에 넣었던 시절도 있었다. ‘검둥이’란 이름도 바로 그런 것이었다. 그냥 부를 때는 ‘워리 워리’ 하였는데, 지금도 그 뜻을 알지 못하고 있다. 검기 때문에 검둥이였다. 고유명사이기에는 싱거운 이름이었으나 검둥이라 부르면 꼬리를 치고, 잘 따랐으므로 별다른 문제는 없었다. 토종 잡견이었다. 잡견이란 말이 개에게 조금 미안하므로 보통개라고나 해 두자. 얼굴이 넓적하고, 귀는 아래로 덮여 있고, 무언가 애원하는 눈빛으로 온순하게 생긴 개였다. 아무 것이나 잘 먹었다. 특별한 볼 일 없는 개여서 밤이 되면 달보고 밤새 짖는 그런 개였다. 무엇보다도 사람을 좋아하고 잘 따랐다. 밤에 동구어귀를 돌아들면 벌써 주인임을 알아채고 짖으면서, 달려 나와 반겼었다.

옆집 개는 이름이 ‘독구(dog)’였다. 독구라는 이름은 고상하고 대단해 보이고, 검둥이란 이름은 촌스럽고, 부끄러운 이름 같았었다. 나는 중학교에 들어가서도 한참 후에야 독구가 개라는 뜻의 단어임을 알게 되었다. 옆집 형이 나보다 2년 선배여서 중학교를 일찍이 들어가 영어를 먼저 배우게 된 연유였던 것이다. 옆집 개들은 그 후에도 ‘메리’나 ‘해피’ 등 고상한 이름을 가지는 행운을 누리고 있었다. 독구는 누렁개였다. 얼굴이 세모돌이이고, 귀는 예각으로 바짝 서있었다. 아마도 진도개였던 것 같았다. 우리 검둥이는 먹다 남은 된장찌개 국물을 밥찌꺼기에 쳐서 주는 것이 고작이었는데, 그 개는 가끔 육식을 하는 것으로 보였다. 옆집 형은 논에서 미꾸리를 잡거나, 개구리를 잡아서 그 독구에게 먹였던 것이다. 스스로 쥐를 잡아먹었는지도 모른다. 날쌘 개이므로 넉넉히 그랬을 것이다. 

어느 날 보니 앞마당 가에서 우리 검둥이와 옆집 독구가 처음에는 서로 반갑게 만나는 것처럼 보였다. 개들이 처음 만나면 꼬리에서 꼬리를 문듯이 빙빙 도는 게 보통이다. 그것은 꼬리가 아니라 꼬리 속에 감춘 것을 탐색하는 것이겠지만 말이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안 만나도 괜찮았을 것처럼 서로 시큰둥하게 보는 것 같았다. 우리 검둥이가 먼저 추파를 보내는 양, 독구에게 다가섰다. 그런데 독구는 경계하는 눈빛이었다. 그러더니 독구는 갑자기 검둥이의 목덜미를 물고 흔들어댔다. 검둥이는 무방비 상태에서 일방적으로 당하는 것 같았다. 한참을 독구 밑에 깔려 허우적대던 검둥이가 가까스로 위기를 면하고 일어나, 꼬리를 감추고 깨갱대며 우리집 대문 안으로 도망쳐 들어왔다.

대문 밖에서 벌어지는 이 참혹한 패전의 현장을 마루 끝에 앉아서 목격한 나는 분함을 억누를 길이 없었다. 내가 동네 또래에게 얻어맞고 들어온 것 이상으로 창피하고, 분한 마음이 한참 동안 가라앉지를 앉았었다. 홧김에 패장 검둥이를 찾아서 고무신을 벗어 던져서 두들겨 패려고 찾았으나 이미 마루 밑으로 깊이 숨어버린 후였다. 한편 독구에 대한 부러움이 있었다. 그것은 선망이었다. 그것은 글자 그대로 ‘콤플렉스’한 감정이었다. 털 빛깔이 좋아서인가, 이름이 좋아서인가, 얼굴이 잘 생겨서인가, 귀가 위로 서있어서인가, 육식을 해서인가, 싸움을 잘하고, 결국 이겨서인가? 디엔에이 차이인가, 환경과 역사 탓인가?

독구는 어째서 검둥이를 이겼는가? 검둥이들은 그 후로도 아직도 약하고, 그들은 왜 점점 강해지는가? 이 땅의 검둥이들이 독구들에게 밀려 꼬리를 다리 사이에 넣고 언제까지 떨고 서 있어야 하는가? 희면 흰둥이, 검으면 검둥이로만 알면 그만이었다. 그때 나는 요즘 시쳇말로 ‘가치자유(value-free)’의 자유인이었지만, 우리집 개의 이름만은 그렇게 쉽게 짓는 것이 아니었다. 검둥이의 이름을 ‘검은 전사’나 ‘빅토리’나 ‘트라이엄프’라고 지어주었어야 했었다.

 
 수필가이자 문학박사인 정진원 선생은 의왕시 포일리 출신(1945년생)으로 덕장초등학교(10회), 서울대문리대 지리학과를 졸업했으며 서울대 대학원에서 지리학, 석·박사과정을 마쳤다. 박사학위논문으로 ‘한국의 자연촌락에 관한 연구’가 있다. 성남고등학교 교사, 서울특별시교육청 장학사, 오류중학교 교장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