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보따리/기억

[기억-정진원]한 장의 졸업사진, 덕장초교 10회

안양똑딱이 2017. 3. 19. 10:23

현실보다 이상이 언제나 더 화려하다. 사실보다 이미지가 더 아름답다. 현상보다 환상이 더 환상적이다. 눈으로 보는 인상보다 마음속에 박힌 인상이 더 인상적이다.

펜팔이 줄 수 있는 연면한 동경과 환상은 맞선의 자리에서 쩔쩔매게 되는 어색함과 대개의 실망보다 언제나 매력적인 것이다. 사진은 글자대로 사실을 있는 그대로 찍어낸 것이다.

거기에 시골 사진사의 에스프리가 깃들어 있으면 얼마나 대단한 것이겠는가. 생긴 대로 박아낸 사진일 수밖에 없는 것이지만, 거기에는 사회심리학적 행동 유인들이 내면화 되어있고, 험산준령이나 구비치는 강 같은 개인사의 곡절들이 그 얼굴 하나하나에 박혀있는 것이다.

같은 집단의 단체사진을 비교분석해보라. 언제나 회중의 변두리에 밀려나 있는 사람은 머리만 중심부로 향해서 기울이고 있는 모양이다. 가운데 서기를 원하는 사람은 어느 사진에서나 그렇게 한다.

발뒤꿈치를 반짝 들고 찍은 것을 식별해낼 수도 없고, 짐짓 웃는 얼굴의 진정성을 헤아릴 수도 없다. 사진 액면 해석의 주관성과 애매성에도 불구하고 내가 한 장의 사진을 특별히 좋아하게 된 것은 나중에 내가 그 사진 위에 여러 번 포개서 덧붙인 것들이 유난히 아름답게 빛을 발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퇴색한 사진 한 장이 금박 액자 속에서 지금도 그때 이야기를 주절주절 그치지 않고 있다.

내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 가운데 하나는 초등학교 졸업 기념사진이다. 약 반 세기 전에 찍은 것으로 누렇게 퇴색된, 보잘것없는 흑백 사진이다. 60명 남짓한 동창생들과 당시 선생님들이 한 장의 사진에 모두 들어가 있었다. 갇혀있는 것들처럼 분위기가 무거운 것은 퇴색된 사진종이 탓만은 아닐 것이다. 어떻게 보면 포로수용소 입소 동기생들의 모양이다.

연극을 준비하기 위해서 각양각색으로 분장하고 나서 기념으로 찍은 사진 같기도 하다. 졸업사진을 찍던 날 무슨 연유에선지 참가하지 못한 여자 친구 한 명과 선생님 한 분은 따로 찢어 붙이기식으로 사진 위쪽에 밀려나 있었다. 순간의 지참이 반백 년 이상 모교 건물 처마 끝에 매달린 장외인간으로 남게 될 줄은 미처 몰랐을 것이리라.

남학생들의 머리는 누가 그렇게 깎으라고 하지도 않았을 터인데 하나같이 독산(禿山)이었다. 6ㆍ25전쟁 후의 모든 산들을 닮아서인지 그 위에 나무는 전혀 없고, 풀들이 이따금 돋아나기 시작한 민둥산들이었다. 올망졸망 그 민둥산의 연봉들이 그 사진의 스카이라인을 이루고 있었다. 바리캉(일본말?)이라는 이발기구로 손쉽게 밀어댈 수 있는 모양이어서 그리 되었을 것이다.

그것도 없는 경우는 가위로 잘랐는데, 그 때는 아무리 정성을 들여도 결과는 가관이었다. 사진에서 식별할 수는 없지만 당시 친구들 머리에는 기계충(기계총, 두부백선)이란 것이 생겨서 머리 여기저기가 둥글게 파여 나간 모양이었다.

요즘도 바보짓 하는 사람으로 분장하기 위해서는 핫바지를 양쪽 높이가 다르게 걷어 올리고, 머리는 기계충으로 뻥 뚫린 모양으로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머리속을 들여다보면 쇠똥이라 부르는 때 덩이가 여기저기 붙어있었는데, 사진에는 모두 보이지 않아서 다행한 일이었다.

여학생들의 머리는 이마 중간선을 따라 수평선을 하였고, 귀 불알 끝선쯤에서 멈춘 단발을 한 모양이었다. 하나같이 통일과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그 머리칼 속에는 이와 가랑니와 서캐가 준동하고 있었을 것인데, 사진에는 보이지 않아서 다행스런 일이다!

겨울철에 사진을 찍었었나 보다. 솜바지저고리, 치마저고리 모양의 친구들이 대부분이었다. 검정색 무명 양복(5ㆍ16 후 ‘새마을복’ 비슷한) 모양의 옷이면 당시에 최고급이었다.

그 옷에는 노란 생철 단추가 달려있었는데, 오래 가지 못해서 녹이 슬고, 뚜껑이 떨어져나가 안쪽 것만 옷에 매달려 있곤 했었다. M보육원의 원아였던 몇몇 친구들은 국방색 새마을복(?) 차림으로 학교를 다녔었는데 흑백사진이므로 검은 옷과 식별되지 않는다.

신발은 대부분이 검정고무신이었다. 대개 소풍을 간다고나 해야 검정운동화를 신어볼 수 있었는데, 안 신던 것을 새로 신게 되면 얼마 가지 못해서 발이 부르트고, 물집이 생기고, 터져 쓰리고, 아파서 그렇게 되면 그 소풍은 소풍이 아니라 시베리아에 유배되는 사람의, 그야말로 형극의 길이 되었었다. 그 고무신들도 사진에서는 모두 감춰졌다.

선생님들이 맨 앞줄에 앉아계셨다. 그런 모양으로 찍는 졸업사진의 양식이 만고불변의 판박이가 되었다. 변이 없는 확고한 패러다임이 되었다.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우리 학생들을 보면 그런 모양으로 사진을 찍는다. 앞 열 중앙에 교장선생님, 그리고 좌우익에 여러 선생님들이 대개는 부임 순으로 배열되었다. 그 선생님들 가운데 내 숙부 되시는 분도 당시 교감선생님으로 앉아계셨다. 동그란 검은 테의 안경을 쓰고 계셨다.

당시 선생님들이 신고 계셨던 장화 모양의 털신은 사진에서도 분명하게 알아볼 수 있다. 그 크고, 두툼한 선생님들의 털신이 지금 나를 슬프게 한다.  

 
수필가이자 문학박사인 정진원 선생은 의왕시 포일리 출신(1945년생)으로 덕장초등학교(10회), 서울대문리대 지리학과를 졸업했으며 서울대 대학원에서 지리학, 석·박사과정을 마쳤다. 박사학위논문으로 ‘한국의 자연촌락에 관한 연구’가 있다. 성남고등학교 교사, 서울특별시교육청 장학사, 오류중학교 교장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