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현]천주교 ‘하우현성당’을 찾아가다
[2014.01.06]안양문화해설사
[2014.01.06]안양문화해설사
박해의 아픔을 품은 곳,
천주교 ‘하우현성당’을 찾아가다
청계산과 광교산맥을 잇는 골짜기 외딴곳, 청계산자락 기슭에 있는 하우현성당은 19세기초반 천주교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산골에 모이면서 형성된 100여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성당이다. 산세와 어우러진 조용한 산골마을에 입지한 하우현성당은 도심에 있는 대성전에서는 누릴 수 없는 색다른 운치와 정감이 느껴진다. 조용하고 주변에 울창한 산림과 높고 깊은 산 등 천혜의 자연조건들은 천주교박해를 피해 찾는 교우들에게는 숨어서 미사를 올리기에 다행이면서 적합한 안식처였다.
교통수단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대 하우현(下牛峴 속칭, 하우고개)은 옛날 광주부 의곡면에 속해 있었고 인천, 제물포, 이천, 여주를 잇는 간선도로(幹線路)가 통과 하던 지역으로 ‘동양원(東陽院)’이라는 역원(驛院)이 있던 곳이라 지금도 ‘원터(마을)’라 불린다. 또한 하우현마을은 교우들이 때로는 토굴 속에 살았던 곳이라서 일명‘토굴리’라고도 불려진다. 의왕시 청계동에 자리한 ‘원터마을’은 인덕원사거리에서 성남방면(안양-판교로)을 따라 가다보면 일명,‘도깨비도로’ 인접한 마을에 터 잡은 산골마을이다.
하우현 성당은 특히 프랑스선교사들이 1,900년 우리나라 건축의 아름다움에 반해 몸체는 석조로 구성하고, 골기와 팔작지붕으로 올려 지은 한∙불 절충식의 이색적인 ‘한옥사제관(司祭館, 경기도기념물 제176호)’이 방문객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사제관 앞마당에는 박해시절 고국 프랑스를 떠나 머나먼 이국 땅 조선으로 건너와 26세 꽃다운 나이에 제대로 선교활동 한번 못하고 순교한 외국인선교사 성 루도비꼬 볼리외 신부 기념비와 김영근 신부 기념비가 있다. 순교의 아픔과 상처를 가슴 속 깊이 간직한 볼리외 신부 성상(聖人像)이 찾는 이를 반기고 있지만, 순교 성인의 얼과 숨결을 느낄 수 있는 믿음의 터전이란 점에서 웬지 숙연함마저 느껴진다. 성 루도비꼬 볼리외 성지는 순교성인의 얼이 깃든 믿음의 터전으로 순례자, 신앙인 등 찾는 이의 발길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한편 명동성당 다음으로 유구한 역사성을 간직한 하우현성당은 얼룩진 영혼과 마음의 상처를 치유 받는 영적 안식처로 방문객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다. 밝아오는 새해를 맞아 의왕시선정 의왕 8경의 하나인 ‘하우현성당’을 찾아 세상에 찌든 묵은 때를 씻어버려 영혼을 맑게 정화하며 가다듬고, 새로운 출발과 함께 각오와 다짐을 하는 것은 어떨까? 서 루도비꼬 볼리외 신부를 주보성인으로 모시는 하우현성당은 삶에 찌들고 지친 이들에게 마음을 위로해주고 상처를 치유해주며 평온과 안식의 길로 인도할 것이다.
2014 갑오년 새로운 한해를 맞는 출발점에서 안양 인근 오랜 성당의 역사와 숨결을 간직한 곳을 찾아 성인의 발자취를 돌아보고, 고즈넉한 ‘하우현성당’을 조명한다.
□박해시대의 하우현
인적이 드문 험준한 산골짜기 조용한 곳, 하우현일대는 1,800년대 초반부터 박해를 피해 신앙인들이 몰려들어 ‘교우촌’이 형성되었다.
신유박해당시 의일점마을(현,학의리)에 살던 한덕운(韓德運, 토마스)이 광주에서 체포되어 1802년 남한산성에서 참수 치명한 사건이 있고, 병인박해당시 하우현마을에 살던 김준원(金俊遠, 아니체도)이 1868년 남한산성에서 순교한 바 있다. 1866년 병인박해때 프랑스인 볼리외(Beaulieu, 徐沒禮)신부는 성사 중 묘론리(卯論里)에서 장제철(張濟哲)의 밀고로 체포되어 3월 7일 순교한다. 여기서 4㎞지점 손골에 있던 성 김도리(St. Petrus Dorie)신부도 같은 날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 같은 날 3월 7일일 새남터에서 참수된다.
□천주교회 ‘하우현’의 역사
19세기 초반 이래 천주교인의 피난 및 안식처로 사랑받아 교우촌이 형성되었다. 1884년 하우현은 공소공동체의 모습을 갖추고 서울과 경기도를 관할하던 조선 제8대 교구장인 뮈텔신부(아우구스티노 민 대주교) 등이 정기적으로 찾아와 전교활동을 하였다. 1893년 왕림본당 2대 신부인 한 알릭스(요셉)신부는 공소강당 건립의 필요성을 느껴 초가 목조성당(10간)을 신축한다. 1895년부터 프랑스선교사들이 한국어를 배우기 위해 또는 한국의 사제들도 이곳에서 휴양했고 ‘용산신학교’ 학생들이 소풍을 겸해 찾았다. 1900년 하우현은 왕림본당에서 분리되어 본당으로 독립하는 새로운 전기를 맞이한다. 초대 본당 주임신부로 프랑스인 샤플랭(P. Oscar Chapelain, 蔡)신부가 부임하면서 ‘한옥사제관(司祭館, 경기도기념물 제176호)’을 신축하고 뮈텔(Mutel, 閔德孝)대주교의 집전으로 성당과 신축사제관의 봉헌식을 거행했다. 그 당시 아빌라의 성녀 테레사를 본당 주보로 모셨고, 주한(駐韓) 프랑스 초대공사 콜랭 드 플랭시(Collin de Plancy)가 프랑스에서 제작한 ‘성당용 종(鍾,bell)’을 기증하였는데 지금도 여전히 남아있다. 본당 창설당시 교세는 1,105명, 공소 수 16개, 관할구역은 광주군, 용인군(일부), 과천, 안산, 금천현(지금의 안양지역) 등 광범위한 지역을 관할했다. 1954년 안양일대 교세가 신장되어 안양읍내 성당을 신축함과 동시에 본당으로 승격하게 되자 하우현성당은 안양본당의 공소로 전환하여 운영하게 된다. 은퇴 후 하우현성당에서 휴양하던 김영근 베드로 신부는 성당이 노후화되어 허술함과 위험함을 인지하고, 1965년 현재의 성당을 재건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김영근 신부는 안양 수리산에 최경환 프란치스꼬 성인묘지 근처에 경당을 건축하신 바 있다.
하우현성당 사제관 앞뜰에는 1866년 박해로 순교한 외국인 선교사인 볼리외 신부 및 김영근 신부를 기리는 기념비가 조성되어 있다.
□순교자 한덕운 토마스(1752~1801, 하느님의 종 124위)
충청도 홍주출신인 한덕운 토마스는 1790년 10월 윤지충(바오로)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했다. 이듬해 윤지충은 신해박해로 체포, 전주에서 순교한다. 한덕운 토마스는 자유로운 신앙을 영위하기 위해 1,800년 10월 고향을 떠나 경기도 광주의 의일리(현, 의왕시 학의동)로 이주하여 신자들을 가르치며 권면한다. 다음해 신유박해가 터지자 그는 한양으로 가던 중 거적으로 덮여 있는 홍낙민(바오로)의 시신을 목격하고는 그의 아들 홍재영(프로타시오)이 부친을 따라 순교하지 못한 점을 질책한다. 홍재영은 그후 신앙을 되찾아 1839년 순교한다. 박해시대 신자들의 시신을 돌보는 것은 자신이 신자임을 드러내는 위험천만한 일이지만 그는 서소문 밖에서 최필제(베드로)의 시신을 찾아 장례를 치루기도 했다. 결국 당시 나이는 50세로 그는 체포되어 (경기 광주)남한산성에서 1802년 1월30일(음력1801.12.27)참수형으로 순교했다. 그는 처형장에서 “이제 사형을 받게 되었지만, 천주교의 교리를 믿으면서, 이를 가장 올바른 도리라 생각해오고 있고, (신앙의 가르침을 믿는) 그 마음 여전히 변함이 없다”라고 최후 진술한 바 있는 카톨릭 신자이다.
□성 루도비꼬 볼리외 신부(Beaulieu, 聖 徐沒禮, 1840~1866)
어려운 여건 속에서 이 땅의 신자들과 함께한 볼리외 신부는 ‘파리외방전교회’소속 선교사로 1865년 5월 고국 프랑스를 떠나 이국땅 조선에 입국한 외국인이다. 하우현과 이웃하고 있는 (광주)‘묘르니’로 와서 인근 교우촌 신자들에게 성사를 집전했다. 1866년 병인박해가 터지자 볼리외신부는 교우들의 위험을 면피할 목적으로 청계산 중턱 ‘둔토리’ 천연동굴 속에 은신하면서 어려운 여건임에도 마다 않고 전교활동을 펼친다. 그의 식부(食夫) 장제철(張濟哲)의 밀고로 체포되어 새남터로 압송, 꽃다운 나이인 26세 군문효수로 치명한다. 1866년 3월7일 순교하신 성 서 루도비꼬 볼리외 신부는 하우현 본당의 초대신부이며 묘루니, 둔토리, 하우현, 광주, 군포, 시흥, 안양지방을 전교하며 신자들의 신앙을 지켜 주시고 보호해 주신 분이시다. 조선에서 전교하던 선교사 12명 중 가장 어린나이로 당시 25세에 낮선 이국땅 조선에 입국하여 1년도 채 안된지 불과 9개월 만에 관헌에 체포되고 순교하여 허무감과 함께 안타까움 마저 그지없다. 볼리외 신부 성인의 체취와 숨결을 고스란히 간직한 ‘둔토리’ 동굴은 지금도 기도객 및 순례자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26세 꽃다운 나이에 한국교회와 신앙을 위해 피를 흘리신 루도비꼬 신부는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이 되었다.
<성 루도비꼬 볼리외 신부의 주요 약력>▸1840년 10월 8일 프랑스(랑공, 보르도 대교구) 출생
▸1849년 보르도 소신학교 입교
▸1864년 5월 21일 사제수품 후 조선전교에 임명
▸1864년 프랑스(마르쎄이항구) 출발
▸1865년 5월 ‘파리외방전교회’소속 선교사로 조선(내포) 입국
-약 3주후 하우현마을과 인접한 (운중동)묘루니마을 도착
▸1866년 2월 27일 체포(둔토리)
▸1866년 3월 7일 새남터에서 군문효수(軍門梟首)로 순교(26세)
▸1866년 5월 12일 왜고개(용산우체국 뒤) 매장
▸1900년 9월 10일 서울명동성당 안장
▸1967년 10월 22일 절두산(切頭山) 한국순교자성당 유골안치소 안치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
▸1985년 7월 15일 하우현성당 주보성인 봉헌
□하우현성당의 교회사적 의미와 가치
안양권 곁에 있는 하우현성당은 본당 역사 100년이 넘는 깊은 역사를 간직한 성당이다. 전국의 본당 중 가장 적은 곳으로 마치 시골 예배당이 연상되는 소박한 아름다움을 간직한 곳이지만 신앙의 요람지요, 여러 세대(累代)를 거쳐 100년이 넘는 믿음이 이어지는 교우촌이란 점에서 교회사적 의미가 크다. 박해 당시의 후손들이 교우촌을 형성하며 집안 대대로 세대를 이어 성당을 다니는 신자를 만나 볼 수 있는 곳이 하우현성당이다. 하우현성당은 신앙인의 후손들이 교우촌을 형성하며 다니는 작은 본당으로 후손들 중에는 안양, 군포, 성남 등지로 분가했으며 여러 본당들의 친정성당으로 여겨진다.
한편 ‘한옥사제관(司祭館, 경기도기념물 제176호)’은 명동성당 다음으로 지어진 100년이 넘는 오랜 역사를 간직한 성당이다. 외벽은 서양의 양식을 따라 석재로 되어 있고, 지붕은 골기와와 삼각지붕 형태의 팔작지붕을 얹어 서양식건축기법과 전통건축양식이 혼용된 보기드믄 한∙불 절충식 건물이다. 건축당시 고풍스런 느낌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사제관은 건물구조, 의장 등이 갖는 건축사적 가치가 매우 높은 고건축물로 평가받고 있다. (자료제공 천주교하우현 성당, 의왕시)
□하우현성당의 부속시설
십자가의 길, 성가정 동산, 치유의 집, 성물방, 하우현카페, 로사리오길
□주변을 연계한 관광자원
△하우현주변의 명승지: 통일신라천년고찰 청계사(와불, 동종, 목판, 극락보존 등), 도깨비도로, 바라산(자연휴양림조성), 백운호수(일명, 청계저수지), 청계휴먼시아수변공간, 승림식물원, (청계)천연염색체험장, 물방울놀이터, 판교박물관, 한국학중앙연구원 등
△의왕시선정 의왕 8경: 모락산, 백운산계곡, 백운호수, (오봉산)병풍바위, 왕송호수, 임영대군사당, 전통사찰 청계사, 하우현성당
△의왕 도시경관 8경: (청계,하우고개입구)도깨비도로, (내손동)문화예술길, (오전동)성 라자로마을, (고천동)의왕시청, (월암동)자연학습공원, (고천동)중앙도서관, (월암동)철도박물관, (청계동)청계 휴먼시아수변공간
□찾아오신 길
주소: 경기도 의왕시 청계동 원터 아랫길 81-6 (청계동 201)
△대중교통:
-광역좌석버스 1303, 1550-3 승차, (안양-판교로)원터마을입구 하차
-지하철 4호선 인덕원역 2번 출구에서 103번, 303번, 1-5번 버스
△승용차: 인덕원사거리에서 성남방향 직진, 원터마을에서 500미터지점 우측
☏문의: 천주교하우현성당 031)426-8921
조성현/aknews@paran.com
천주교 ‘하우현성당’을 찾아가다
청계산과 광교산맥을 잇는 골짜기 외딴곳, 청계산자락 기슭에 있는 하우현성당은 19세기초반 천주교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산골에 모이면서 형성된 100여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성당이다. 산세와 어우러진 조용한 산골마을에 입지한 하우현성당은 도심에 있는 대성전에서는 누릴 수 없는 색다른 운치와 정감이 느껴진다. 조용하고 주변에 울창한 산림과 높고 깊은 산 등 천혜의 자연조건들은 천주교박해를 피해 찾는 교우들에게는 숨어서 미사를 올리기에 다행이면서 적합한 안식처였다.
교통수단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대 하우현(下牛峴 속칭, 하우고개)은 옛날 광주부 의곡면에 속해 있었고 인천, 제물포, 이천, 여주를 잇는 간선도로(幹線路)가 통과 하던 지역으로 ‘동양원(東陽院)’이라는 역원(驛院)이 있던 곳이라 지금도 ‘원터(마을)’라 불린다. 또한 하우현마을은 교우들이 때로는 토굴 속에 살았던 곳이라서 일명‘토굴리’라고도 불려진다. 의왕시 청계동에 자리한 ‘원터마을’은 인덕원사거리에서 성남방면(안양-판교로)을 따라 가다보면 일명,‘도깨비도로’ 인접한 마을에 터 잡은 산골마을이다.
하우현 성당은 특히 프랑스선교사들이 1,900년 우리나라 건축의 아름다움에 반해 몸체는 석조로 구성하고, 골기와 팔작지붕으로 올려 지은 한∙불 절충식의 이색적인 ‘한옥사제관(司祭館, 경기도기념물 제176호)’이 방문객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사제관 앞마당에는 박해시절 고국 프랑스를 떠나 머나먼 이국 땅 조선으로 건너와 26세 꽃다운 나이에 제대로 선교활동 한번 못하고 순교한 외국인선교사 성 루도비꼬 볼리외 신부 기념비와 김영근 신부 기념비가 있다. 순교의 아픔과 상처를 가슴 속 깊이 간직한 볼리외 신부 성상(聖人像)이 찾는 이를 반기고 있지만, 순교 성인의 얼과 숨결을 느낄 수 있는 믿음의 터전이란 점에서 웬지 숙연함마저 느껴진다. 성 루도비꼬 볼리외 성지는 순교성인의 얼이 깃든 믿음의 터전으로 순례자, 신앙인 등 찾는 이의 발길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한편 명동성당 다음으로 유구한 역사성을 간직한 하우현성당은 얼룩진 영혼과 마음의 상처를 치유 받는 영적 안식처로 방문객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다. 밝아오는 새해를 맞아 의왕시선정 의왕 8경의 하나인 ‘하우현성당’을 찾아 세상에 찌든 묵은 때를 씻어버려 영혼을 맑게 정화하며 가다듬고, 새로운 출발과 함께 각오와 다짐을 하는 것은 어떨까? 서 루도비꼬 볼리외 신부를 주보성인으로 모시는 하우현성당은 삶에 찌들고 지친 이들에게 마음을 위로해주고 상처를 치유해주며 평온과 안식의 길로 인도할 것이다.
2014 갑오년 새로운 한해를 맞는 출발점에서 안양 인근 오랜 성당의 역사와 숨결을 간직한 곳을 찾아 성인의 발자취를 돌아보고, 고즈넉한 ‘하우현성당’을 조명한다.
□박해시대의 하우현
인적이 드문 험준한 산골짜기 조용한 곳, 하우현일대는 1,800년대 초반부터 박해를 피해 신앙인들이 몰려들어 ‘교우촌’이 형성되었다.
신유박해당시 의일점마을(현,학의리)에 살던 한덕운(韓德運, 토마스)이 광주에서 체포되어 1802년 남한산성에서 참수 치명한 사건이 있고, 병인박해당시 하우현마을에 살던 김준원(金俊遠, 아니체도)이 1868년 남한산성에서 순교한 바 있다. 1866년 병인박해때 프랑스인 볼리외(Beaulieu, 徐沒禮)신부는 성사 중 묘론리(卯論里)에서 장제철(張濟哲)의 밀고로 체포되어 3월 7일 순교한다. 여기서 4㎞지점 손골에 있던 성 김도리(St. Petrus Dorie)신부도 같은 날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 같은 날 3월 7일일 새남터에서 참수된다.
□천주교회 ‘하우현’의 역사
19세기 초반 이래 천주교인의 피난 및 안식처로 사랑받아 교우촌이 형성되었다. 1884년 하우현은 공소공동체의 모습을 갖추고 서울과 경기도를 관할하던 조선 제8대 교구장인 뮈텔신부(아우구스티노 민 대주교) 등이 정기적으로 찾아와 전교활동을 하였다. 1893년 왕림본당 2대 신부인 한 알릭스(요셉)신부는 공소강당 건립의 필요성을 느껴 초가 목조성당(10간)을 신축한다. 1895년부터 프랑스선교사들이 한국어를 배우기 위해 또는 한국의 사제들도 이곳에서 휴양했고 ‘용산신학교’ 학생들이 소풍을 겸해 찾았다. 1900년 하우현은 왕림본당에서 분리되어 본당으로 독립하는 새로운 전기를 맞이한다. 초대 본당 주임신부로 프랑스인 샤플랭(P. Oscar Chapelain, 蔡)신부가 부임하면서 ‘한옥사제관(司祭館, 경기도기념물 제176호)’을 신축하고 뮈텔(Mutel, 閔德孝)대주교의 집전으로 성당과 신축사제관의 봉헌식을 거행했다. 그 당시 아빌라의 성녀 테레사를 본당 주보로 모셨고, 주한(駐韓) 프랑스 초대공사 콜랭 드 플랭시(Collin de Plancy)가 프랑스에서 제작한 ‘성당용 종(鍾,bell)’을 기증하였는데 지금도 여전히 남아있다. 본당 창설당시 교세는 1,105명, 공소 수 16개, 관할구역은 광주군, 용인군(일부), 과천, 안산, 금천현(지금의 안양지역) 등 광범위한 지역을 관할했다. 1954년 안양일대 교세가 신장되어 안양읍내 성당을 신축함과 동시에 본당으로 승격하게 되자 하우현성당은 안양본당의 공소로 전환하여 운영하게 된다. 은퇴 후 하우현성당에서 휴양하던 김영근 베드로 신부는 성당이 노후화되어 허술함과 위험함을 인지하고, 1965년 현재의 성당을 재건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김영근 신부는 안양 수리산에 최경환 프란치스꼬 성인묘지 근처에 경당을 건축하신 바 있다.
하우현성당 사제관 앞뜰에는 1866년 박해로 순교한 외국인 선교사인 볼리외 신부 및 김영근 신부를 기리는 기념비가 조성되어 있다.
□순교자 한덕운 토마스(1752~1801, 하느님의 종 124위)
충청도 홍주출신인 한덕운 토마스는 1790년 10월 윤지충(바오로)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했다. 이듬해 윤지충은 신해박해로 체포, 전주에서 순교한다. 한덕운 토마스는 자유로운 신앙을 영위하기 위해 1,800년 10월 고향을 떠나 경기도 광주의 의일리(현, 의왕시 학의동)로 이주하여 신자들을 가르치며 권면한다. 다음해 신유박해가 터지자 그는 한양으로 가던 중 거적으로 덮여 있는 홍낙민(바오로)의 시신을 목격하고는 그의 아들 홍재영(프로타시오)이 부친을 따라 순교하지 못한 점을 질책한다. 홍재영은 그후 신앙을 되찾아 1839년 순교한다. 박해시대 신자들의 시신을 돌보는 것은 자신이 신자임을 드러내는 위험천만한 일이지만 그는 서소문 밖에서 최필제(베드로)의 시신을 찾아 장례를 치루기도 했다. 결국 당시 나이는 50세로 그는 체포되어 (경기 광주)남한산성에서 1802년 1월30일(음력1801.12.27)참수형으로 순교했다. 그는 처형장에서 “이제 사형을 받게 되었지만, 천주교의 교리를 믿으면서, 이를 가장 올바른 도리라 생각해오고 있고, (신앙의 가르침을 믿는) 그 마음 여전히 변함이 없다”라고 최후 진술한 바 있는 카톨릭 신자이다.
□성 루도비꼬 볼리외 신부(Beaulieu, 聖 徐沒禮, 1840~1866)
어려운 여건 속에서 이 땅의 신자들과 함께한 볼리외 신부는 ‘파리외방전교회’소속 선교사로 1865년 5월 고국 프랑스를 떠나 이국땅 조선에 입국한 외국인이다. 하우현과 이웃하고 있는 (광주)‘묘르니’로 와서 인근 교우촌 신자들에게 성사를 집전했다. 1866년 병인박해가 터지자 볼리외신부는 교우들의 위험을 면피할 목적으로 청계산 중턱 ‘둔토리’ 천연동굴 속에 은신하면서 어려운 여건임에도 마다 않고 전교활동을 펼친다. 그의 식부(食夫) 장제철(張濟哲)의 밀고로 체포되어 새남터로 압송, 꽃다운 나이인 26세 군문효수로 치명한다. 1866년 3월7일 순교하신 성 서 루도비꼬 볼리외 신부는 하우현 본당의 초대신부이며 묘루니, 둔토리, 하우현, 광주, 군포, 시흥, 안양지방을 전교하며 신자들의 신앙을 지켜 주시고 보호해 주신 분이시다. 조선에서 전교하던 선교사 12명 중 가장 어린나이로 당시 25세에 낮선 이국땅 조선에 입국하여 1년도 채 안된지 불과 9개월 만에 관헌에 체포되고 순교하여 허무감과 함께 안타까움 마저 그지없다. 볼리외 신부 성인의 체취와 숨결을 고스란히 간직한 ‘둔토리’ 동굴은 지금도 기도객 및 순례자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26세 꽃다운 나이에 한국교회와 신앙을 위해 피를 흘리신 루도비꼬 신부는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이 되었다.
<성 루도비꼬 볼리외 신부의 주요 약력>▸1840년 10월 8일 프랑스(랑공, 보르도 대교구) 출생
▸1849년 보르도 소신학교 입교
▸1864년 5월 21일 사제수품 후 조선전교에 임명
▸1864년 프랑스(마르쎄이항구) 출발
▸1865년 5월 ‘파리외방전교회’소속 선교사로 조선(내포) 입국
-약 3주후 하우현마을과 인접한 (운중동)묘루니마을 도착
▸1866년 2월 27일 체포(둔토리)
▸1866년 3월 7일 새남터에서 군문효수(軍門梟首)로 순교(26세)
▸1866년 5월 12일 왜고개(용산우체국 뒤) 매장
▸1900년 9월 10일 서울명동성당 안장
▸1967년 10월 22일 절두산(切頭山) 한국순교자성당 유골안치소 안치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
▸1985년 7월 15일 하우현성당 주보성인 봉헌
□하우현성당의 교회사적 의미와 가치
안양권 곁에 있는 하우현성당은 본당 역사 100년이 넘는 깊은 역사를 간직한 성당이다. 전국의 본당 중 가장 적은 곳으로 마치 시골 예배당이 연상되는 소박한 아름다움을 간직한 곳이지만 신앙의 요람지요, 여러 세대(累代)를 거쳐 100년이 넘는 믿음이 이어지는 교우촌이란 점에서 교회사적 의미가 크다. 박해 당시의 후손들이 교우촌을 형성하며 집안 대대로 세대를 이어 성당을 다니는 신자를 만나 볼 수 있는 곳이 하우현성당이다. 하우현성당은 신앙인의 후손들이 교우촌을 형성하며 다니는 작은 본당으로 후손들 중에는 안양, 군포, 성남 등지로 분가했으며 여러 본당들의 친정성당으로 여겨진다.
한편 ‘한옥사제관(司祭館, 경기도기념물 제176호)’은 명동성당 다음으로 지어진 100년이 넘는 오랜 역사를 간직한 성당이다. 외벽은 서양의 양식을 따라 석재로 되어 있고, 지붕은 골기와와 삼각지붕 형태의 팔작지붕을 얹어 서양식건축기법과 전통건축양식이 혼용된 보기드믄 한∙불 절충식 건물이다. 건축당시 고풍스런 느낌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사제관은 건물구조, 의장 등이 갖는 건축사적 가치가 매우 높은 고건축물로 평가받고 있다. (자료제공 천주교하우현 성당, 의왕시)
□하우현성당의 부속시설
십자가의 길, 성가정 동산, 치유의 집, 성물방, 하우현카페, 로사리오길
□주변을 연계한 관광자원
△하우현주변의 명승지: 통일신라천년고찰 청계사(와불, 동종, 목판, 극락보존 등), 도깨비도로, 바라산(자연휴양림조성), 백운호수(일명, 청계저수지), 청계휴먼시아수변공간, 승림식물원, (청계)천연염색체험장, 물방울놀이터, 판교박물관, 한국학중앙연구원 등
△의왕시선정 의왕 8경: 모락산, 백운산계곡, 백운호수, (오봉산)병풍바위, 왕송호수, 임영대군사당, 전통사찰 청계사, 하우현성당
△의왕 도시경관 8경: (청계,하우고개입구)도깨비도로, (내손동)문화예술길, (오전동)성 라자로마을, (고천동)의왕시청, (월암동)자연학습공원, (고천동)중앙도서관, (월암동)철도박물관, (청계동)청계 휴먼시아수변공간
□찾아오신 길
주소: 경기도 의왕시 청계동 원터 아랫길 81-6 (청계동 201)
△대중교통:
-광역좌석버스 1303, 1550-3 승차, (안양-판교로)원터마을입구 하차
-지하철 4호선 인덕원역 2번 출구에서 103번, 303번, 1-5번 버스
△승용차: 인덕원사거리에서 성남방향 직진, 원터마을에서 500미터지점 우측
☏문의: 천주교하우현성당 031)426-8921
조성현/aknews@par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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